흥부와 놀부, 21세기 지금은?
부지런한 흥부는 왜 가난할까?
《흥부전》은 착한 동생 흥부는 다리를 다친 제비를 치료해줘 복을 받고, 욕심이 많은형은 욕심을 부리다 벌을 받는다는 이야기로 당시의 시대상을 제대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고전으로 꼽힌다. 특히 사회학적·경제학적 측면에서 《흥부전》 다시 보기는 삶의 영원한 화두인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던진다
글 > 고영민
신분에 상관없이 누구나부자가 될 수 있었던 조선 후기,
왜 흥부는 열심히 일해도 부자가될 수 없었을까?
한국인이라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흥부와놀부’ 이야기. 형 ‘놀부’는 형제애라곤 눈 씻고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심술 사납고 악한 인간인데 반해 동생 ‘흥부’는 같은 배에서 나온형제가 맞나 싶을 정도로 심성이 아주 고운사람이다.
답답할 정도로 착한 흥부와 욕심 많은 놀부는 서양의 《햄릿》과 《돈키호테》처럼 비교대상으로 자주 쓰이는 문학 캐릭터이기도하다. 선(善)과 악(惡), 인과응보의 세계관에서 흥부와 놀부에 대한 평가는 명확해 보이지만, 사회변화에 따라 그 경계가 흐릿해지고 평가기준도 때때로 바뀌는 경우가 있었다. 작자 미상인 《흥부전》은 조선 후기의 역사성, 신분제 및 경제 체제의 변화상이 직간접적으로 반영된 매우 ‘현실적’인 작품이다
불멸의 욕망… 강남제비에서 비트코인까지
놀부는 외식 프랜차이즈 브랜드로 쓰일 만큼 일상에서도 매우 친숙한 단어다. 당장 한푼이 아쉬운 서민들에겐 흥부보단 오히려놀부에게 감정이입이 더 쉬워 보인다.사는 게 팍팍할수록 찢어지게 가난한 흥부보단 못됐지만 부자로 떵떵거리며 사는 놀부가 되고픈 욕망이 꿈틀거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인지상정 아니겠나?
동물 학대로 처벌을 받을 수 있을지언정, 멀쩡한 제비 다리를 부러트려 일확천금의 기회를 노린 놀부나 비트코인, 주식투자, 부동산 양도차익을 노린 갭투자, 그것도 아니면 소박하게나마 로또를 통해 지리멸렬한 현실을 타개하려는 심리는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 아닌가?
독자들은 윤리적 잣대로 놀부를 비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자신들의 욕망을 거리낌없이 토해내는 놀부를 통해 시원한 해방감을 맛보는 건 아닌가?
조선 후기에 활발해진 농촌경제와 공동체 분화
하지만 놀부에게 감정이입이 쉬운 사회가과연 바람직한 공동체인지는 생각해볼 일이다. 민담에 뿌리를 두고 있는 판소리계 소설흥부전은 당대의 사회·경제적 문제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흥부전의 시대적 배경인 조선 후기에는 화폐 사용이 활발해지고 고리대가 성행하며, 품팔이꾼과 천부(賤富) 또는 서민 부자가 등장하고 몰락양반도 대거 속출했다. 또, 이앙법의 보급, 상업작물과 원예작물의 재배 등 농촌경제의 활발한 움직임 속에서 농촌의 분화가 이뤄졌다.
흥부가 박을 열었을 때 나온 약재, 서적 등의 다양한 물산은 당대 사회에서의 실제적물화 유통 양상을 간접적으로나마 보여주고 있다. 비록 극단적인 캐릭터이지만, 흥부와 놀부는 조선 후기 경제 변동 속에서 탄생한 전형적인 인물이라 분석할 수 있다.
놀부는 1960년대 경제개발 시대 롤모델?
판소리 ‘흥보가’ 버전을 비롯해 1833년에 쓴필사본 ‘흥보만보록’ 등 다양한 판본이 존재하지만, 대체로 흥부는 몰락한 양반의 모습으로, 놀부는 노비계층에서 양반으로 신분이 상승된 인물로 묘사된다.
이는 ‘신분’과 ‘경제력’의 어긋남이 심화된것으로 조선 후기 신분제 붕괴의 단면을 보여준다. 몰락한 양반인 흥부는 관념적 윤리관과 현실 사이의 괴리에서 허우적대는 무책임한 인물로, 현실감 있는 놀부는 향촌사회를 주도하는 실용주의자로 평가받기도 한다.
이러한 평가는 1960년대 이후 경제개발 이념이 강조되면서 정점에 이른다. 흥부는 게으르고 무능력한 존재로, 놀부는 대단히 진취적인 인물로 평가되는 경향이 짙었다. 그래서 흥부는 경제개발에 방해가 되는 인물로 배척돼 수난을 당하기도 한다.
매품팔이 나선 흥부가 기가 막혀
사실, 흥부는 조선 후기 경제변동 속에서 토지로부터 이탈된 빈민층을 대변하는 존재다. 앉아서 굶어죽거나 허례허식에 묻혀 지내는 몰락한 양반이라기보다는 경제현실에 뛰어들었지만 실패한 자의 모습으로 보는게 온당할 듯싶다.
흥부와 아내가 계절마다 쉼 없이 온갖 품을 파는 장면은 흥부가 전형적인 날품팔이꾼의 고난을 짐 지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알수 있다. 춘궁기에 굶고 있는 가족을 위해 관청에 가서 환곡(정부미)을 요청해 보지만 이방은 높은 이자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니 죄지은 사람 대신 곤장을 맞고 돈을 받는 매품파는 일을 해보라고 조언한다.
극단적인 예지만, 토지로부터 유리돼 품팔이 노동자가 된 흥부가 오직 자신의 노동을 상품으로 팔아야 연명할 수 있는 현실은 서구 자본주의 태동기와 몹시 흡사하다
부의 공정성에 관한 물음… “흥부는 왜?”
놀부는 이기적 욕망이 나쁜 게 아니라 오히려 사회발전에 기여한다는 논리를 펴기도한다. 이는 “우리가 빵을 먹을 수 있는 건 빵집 주인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빵집 주인의 돈을 벌고 싶은 이기심 때문”이라고 말한 아담 스미스의 논리를 연상케 한다.
굶주리는 동생을 방치하는 놀부의 비윤리성을 차치하더라도, 흥부전이 형제간의 빈부격차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핵심은 무엇일까? 흥부처럼 선량하고 부지런한 사람은왜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가? 같은 사회의 구성원들끼리 어느 정도까지의 빈부격차, 부의 불평등을 용인할 수 있는가?
흥부전은 초월적 존재의 개입을 통해 부조리를 단번에 해결한다. ‘하늘이 내려준 사회복지’만이 당시 민중이 유일하게 의탁할 곳이었는지 모른다. 《흥부전》에 나타난 부의 공정성 문제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큰 화두다. 21세기 대한민국은 흥부의 나라인가? 놀부의 나라인가?
현대적 관점에서 다시 보는 ‘돈’에 대한 인식
18세기 당시 사회 구조의 모순으로 부익부빈인빅 현상이 더욱 심해지고, 조선을 오랫동안 지탱해오던 기존의 전통과 권위가 흔들리면서 신분 중심의 사회 질서가 흐트러지고, 돈이 힘과 권력이 되는 사회가 됐다. 마치 오늘날의 사회 단면을 보는 것처럼. 거기서 살아남은 자들은 ‘부농’으로, 반대로 무능한 자들은 가난한 하층민으로 품팔이로 겨우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면서 연명해야하는 대목은 비단 조선 후기만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더 실감나기도 한다. 경제적 자립이 먼저냐, 도덕적 삶이 먼저냐, 왜 흥부는 열심히 일해도 부자가 될 수 없었는가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정말 잘 사는 삶인지에 대해 여러 관점에서 생각해보게 한다.
“ 그럼 저 배곯은 자식들은 어떻게한단 말입니까?
짚신이라도삼아 팔아 자식들을 살려 내시오.”
“ 짚이 있어야 신을 삼지.”흥부가 손을 내저었다.
“ 저 건너 부잣집에 가서 좀 얻어 보시오.”
아내는 흥부의 등을 떠밀었다.
흥부가 아내의 채근에 밀려 기어이
건너편 부잣집에 짚을 구걸하러 갔다.
- 《흥부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