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리하고 친절한 ‘디지털 감정 흥신소’가 뜨고 있다
고객님의 감정을 대신해 드립니다!
스스로는 놀이를 즐기지 못하고, 놀이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며 거기에 자신을 대입해 즐거워하는 것과 같다. 소개팅 자리에서 만난 이성 사이에 흐르는 어색함에 어쩔 줄 몰라 하는 타인의 모습을 방송으로 보며 “맞아~ 소개팅이란 바로이런 거지” 하며 자신의 상황인 양 즐긴다.
- 《트렌드 코리아 2019》에서
일상 속 감정대리, ‘문자’와 ‘이모티콘’
김난도 교수의 《트렌드 코리아 2019》는 감정을 대리해주는 사람이나 상품, 서비스를 ‘감정대리인’으로 명명했다. 방송 매체에서 이를 가장 잘 활용한 상품이 ‘액자형관찰 예능프로그램’이다. 여러 계층의 시청자를 대신하듯, 다채로운 캐릭터(출연자)들이 출연해 크고 작은 사건(이벤트)들이 발생할 때마다 캐릭터 유형에 최적화된 ‘감정 퍼포먼스’가 펼쳐진다. 캐릭터들의 성격이나 말투, 외모, 스타일 등은 모두 달라야 하고, 시청자들의 시선을 끌 수 있는 리얼리즘(사실주의)은 최대한, 시종일관 유지돼야 한다. 이들은 시청자들을 대신해 행복해하고 분노하며,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프로 정신을 마음껏 발휘한다.
TV는 그렇다 쳐도 일상에서는 과연 어떠한가? 지인과연락을 취할 때, 음성으로 통화하기보다는 문자나 카톡을 주고받는 게 훨씬 편하며, 내 감정을 대신할 이모티콘이나 사진을 보내는 게 효과적이라 여긴다. 아무리 자제하더라도 감정이 실리 수밖에 없는 음성통화는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이모티콘은 내 감정을 효과적으로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진짜 내 감정을 숨길 수 있고,상대방의 날카로운 창도 막아내는 단단한 방패다. 미스터리 음악 쇼 <복면가왕>을 보며, 복면 뒤 가수의 정체가 궁금하기보다는 복면 자체의 캐릭터를 즐기는 건 아닐까? 가왕이 연승에 실패한 건 노래를 못해서가 아니라 복면의 약발이 다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바야흐로 ‘대리’ 시대
앱으로 호출하는 편리한 대리운전 플랫폼처럼, 바야흐로 감정대리업이 생활 속 곳곳으로 스며들고 있는 ‘대리시대’이다. 《트렌드 코리아 2019》는 감정대리인의 유형을 △감정을 대신 느껴주는 ‘감정대행인’ △스스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을 대신 표출하는 ‘감정대변인’ △상황에 맞게 감정을 큐레이션 해주는 ‘감정관리인’ 등이 있다고 분석한다. 상당수의 TV 예능 프로그램은 감정대행인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고 있다. 출연자의 꾸밈없는 리액션을 보며 내 감정이 이입되고 어느덧 일심동체 경지까지 이른다. 나 대신 감정을 표현해주는 감정대변인의 대표적 사례가 바로 포털 뉴스의 댓글 창이다. 뉴스의 긴 텍스트를 분석하는 건 너무 피곤한 일, 제목만 대충 훑어보고 곧바로 댓글 반응을 읽어보는 게 습관이 됐다. 심지어 사진기사마저 댓글을 먼저 본다. 자기만의 가치관으로 뉴스 가치를 평가할 필요가 없어졌다. ‘좋아요’나 ‘추천(공감)’, ‘비추천(비공감)’ 버튼 클릭이면 충분하다.
AI, 내 감정을 부탁해
감정대행과 대변을 넘어 감정까지 관리해주는 서비스와 상품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바둑 AI(인공지능)인‘알파고’ 알고리즘처럼, 고객의 감정을 분석하는 AI도얼마든지 가능하다. 고객의 감정을 분석해 최적의 서비스(음악·영화 스트리밍, 여행, 쇼핑 추천 등)를 제공하는 다양한 ‘감성 큐레이션’ 플랫폼을 일상에서 쉽게 찾을수 있다.
큐레이션 서비스란 여러 정보를 수집하고 선별해 이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 글로벌 온라인 스트리밍 시장을 석권한 넷플릭스는 개인 맞춤형 큐레이션 기술과 독보적인 오리지널 콘텐츠, 편리한 사용자 환경을 통해 유튜브를 위협하고 있다. 특히, 모바일 서비스가점차 개인화하는 추세에 따라 이동통신사 콘텐츠 사업도 큐레이션 서비스로 탈바꿈하고 있다. 통신사들이 보유한 가입자들의 모바일 활용 패턴은 훌륭한 빅데이터소스이며, 5G 기술까지 더해져 맞춤형 콘텐츠 사업에 더욱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됐다
감정의 과잉시대, 자기방어
‘감정대리’라는 말이 올 한 해 시장을 이끌어나갈 키워드로 소개될 만큼 이슈화된 근본적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누구나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는 기쁨(희), 노여움(노), 슬픔(애), 즐거움(락) 등의 ‘감정’은 인간다움(휴머니즘)의 핵심요소로 인식돼왔다. 하지만, 생존에 없어선 안 될 물과 공기를 돈으로 사고팔 수 있는 시대가 됐듯, 감정마저 사고파는 시대가 된 것이다. 《트렌드 코리아 2019》는 많은 소비자가 인간이 느끼는 다양한 감정중에서도 좌절, 두려움, 분노, 열등감, 독선, 불안감 등의부정적 감정표현에 유난히 서툴다고 평가한다. SNS를포함한 다양한 소셜미디어에는 행복하고 즐거운 긍정적 감정만이 넘쳐나는 데에 반해 부정적 감정을 처리하는 감정 근육이 급속히 쇠퇴해 스스로 소화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내 감정은 소홀하게 되는 감정노동
급기야는 그러한 부정적 감정을 스스로 다룰 수 없어 디지털 기술에 의탁하는 문화가 확산되고 관련 산업이 활발하게 등장하고 있다. 어쩌면 감정대리가 전염병처럼확산되는 현상은 부정적 감정은 물론 긍정적 감정까지 처리하는 과정에서 에너지가 너무나 많이 소모되기 때문에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자기방어’ 기제에서 나온것일 수도 있다. 감정을 온전히 처리하기에는 우리네 일상은 너무나 바쁘다. 특히, 자신의 본래 감정과는 전혀무관한 ‘거짓 감정’을 상품, 서비스로 제공해야 하는 ‘감정노동’에 지쳐서 정작 진짜 내 감정을 소홀히 취급할수도 있다. 《트렌드 코리아 2019》는 “기쁘고 행복한 감정도 중요하지만, 삶이 더 풍부하고 가치 있으려면 모든감정을 인정하고 포용해야 한다”며, “자신의 감정과 마주하라”고 조언한다. 하지만, 직장에서 자신의 감정과솔직히 마주하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리고 조직과 사회는 이를 책임지거나 떠맡을 수 있는가?
영화 <트루먼 쇼>에서 시청자들이트루먼의 삶에 매혹된 이유는 그의행동과 감정들이 진짜이기 때문이다. 현실의 내 감정은 인위적인데, 리얼리티 TV 프로그램 속 인물의 감정은 ‘진짜’라는 아이러니가 우리를 몹시 당황스럽게 한다. 20년 전에 개봉했던 <트루먼 쇼>가요즘 더욱 실감나게 다가오는 이유는 단순히 ‘레트로(복고풍)’ 트렌드 때문만은 아니다. 리얼리티 프로그램과 SNS, 가상현실, 페이크(가짜) 뉴스 등으로 가득찬 우리의 현실과비슷하기 때문이다. 트루먼은 일상에서 자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배우이고,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만들어진 세트장이라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그의 인간관계, 직장, 결혼 생활은 전부 각본이고, 카메라 5,000대가 각본에 따라 움직이는 트루먼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한다. 시청자가 신(神)의 경지에서 피조물을 바라보는 이보다 완벽한 리얼리티 쇼가 있을까? 신과 인간의 차이점 중 하나는 신은 ‘두려움’이나 ‘공포’가 없기 때문이다. 현실(Reality)이 텔레비전의 오락거리로 소비되는 이유는 온갖 감정에 대한 두려움을 출연자에게 모조리 떠맡긴 채 시청자는 신의 입장에서 피조물(출연자)의 감정을 멀리서 관망할 수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 밖을 떠난 우리는, 어쩌면 집 안에 있을 때조차 또 다른 창조주의 피조물이 될 수 있다는 걸 잊지 말자.
참고문헌
- 김난도 외, 《트렌드 코리아 2019》, 미래의창, 2018.
- 앨리 러셀 혹실드/이가람 역, 《감정노동》, 이매진,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