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홍석우(한국외대 우크라이나어과 교수)
2022년 2월 24일에 시작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전쟁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역사기술의 충돌이다. 러시아의 역사 서술에 따르면,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은 단일 민족이며 우크라이나의 영토는 근본적으로 러시아 땅이다. 이러한 서사에 근거하여 푸틴은 우크라이나의 주권적 실체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그는 우크라이나의 정체성과 주권을 부정하면서 일명 ‘특수군사작전’을 펼치며 우크라이나 영토를 러시아에 통합하려 하고 있다. 반면 우크라이나인들은 독자적·민족주의적 역사기술에 입각해 러시아의 주장을 전면 부정하고 있는데, 과연 우크라이나인들의 주장의 근거는 무엇인가? 여기서 우크라이나 역사기술의 틀과 내용을 완성한 미하일로 흐루셰우시키(Mykhailo Khrushevsky, 1866-1934)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그의 사상과 역할을 통해 우리는 20세기 초 발생한 우크라이나의 독립과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미하일로 흐루셰우스키
미하일로 흐루셰우스키, 그는 누구인가
미하일로 흐루셰우스키에게는 많은 호칭이 따라 붙는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와 역사학의 아버지·위대한 역사가이자 독립운동가 등으로 불린다. 또한 20세기 초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이끈 중앙라다(의회)의 초대 의장이며 우크라이나 민족공화국(Ukrainian National Republic, 1917-20)을 세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위대한 지도자였다.
그는 역사가로서 방대한 자료에 근거하여 우크라이나인들이 기나긴 역사 속에서 독자적 정체성을 발전시켜왔으며, 특정한 영토범위 내에서 민족을 건설해 왔음을 증명하려 했다. 이러한 역사기술 작업을 통해 그는 당시 주류 역사관으로 받아들여졌던 러시아제국의 공식적 민족담론에 대담한 도전장을 제시했다. 흐루셰우스키는 모스크바공국과 러시아국가의 기원을 키이우 루스에 두는 전통적인 러시아적 역사관에 반대하며, 키이우 국가와 이 국가의 법제 및 문화는 우크라이나-루스 민족의 창조물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과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인들이 거주하던 영역 및 공간의 차이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삶의 방식·가치관·정치적 지향성의 차이를 발생시켰고, 결국 두 민족의 정체성 차이를 발생시켰다고 보았다.
우크라이나인의 독특한 정체성과 목적론적 사고
흐루셰우스키는 우크라이나인들의 독특한 정체성을 구성하는 ‘우크라이나적 요소’로 키이우 루스로부터 이어지는 역사의 연속성 이외에 우크라이나어와 정교·코자크를 강조했다. 우크라이나 역사와 러시아 역사의 전개를 별개의 것으로 보았을 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어가 러시아어의 방언이 아닌 독자적 언어라는 주장을 펼쳤다. 언어는 민족의 혼과 정신을 전달하는 매체로 두 민족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요소이기도 하다. 이와 더불어 정교(회)는 민족정신의 근간을 이루는 요소로 리투아니아·폴란드·러시아 등 외세에 의해 지배되는 상황에서 우크라이나인들에게 정신적 위안과 민족적 소속감을 가져다주는 존재였다. 흐루셰우스키는 키이우 루스 시기 도입된 정교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정교회는 우크라이나 민족성의 유일한 대표자였고, 민족적 깃발이었으며 동시에 민족문화의 가장 견고한 지주였다. (중략) 정교회가 붕괴하면 민족의 삶 전체가 최종적으로 무너진다.” 이처럼 흐루셰우스는 우크라이나인들을 키이우 루스의 정당한 계승자로 설명한 것이다.
그가 강조한 또 다른 우크라이나 정체성의 구성 요소는 바로 우크라이나의 전사그룹 코자크*이다. 코자크는 키이우 루스의 멸망과 함께 우크라이나의 통치귀족층·엘리트그룹이 사라진 우크라이나 사회에서 타민족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의 농민 가족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 형성된 군사공동체이다. 흐루셰우스는 코자크를 우크라이나 민족성의 근간으로 우크라이나의 통일과 독립을 이끌 주역으로 여겼다. 흐루셰우스키의 코자크에 대한 집착과 강조를 혹자는 19~20세기 널리 펴져있던 인민주의의 영향으로 보는 경향도 있으나, 코자크가 구성한 사회의 수평적 구조와 민주주의적 성격이 당시 러시아 사회의 중앙집권적·전제적 성격과 대비되는 것을 볼 때 왜 흐루셰우스키가 코자크에 주목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즉, 그는 코자크를 통해 미래 우크라이나인들이 지향할 평등하고 민주적인 국가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흐루셰우스키에게 있어 자유·평등·민주주의가 통용되는 사회와 민족국가의 건설은 바로 우크라이나인들에게 부여된 역사적 숙명이며 목적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코자크
키이우 루스의 멸망과 함께 우크라이나의 통치귀족층·엘리트그룹이 사라진 우크라이나 사회에서 타민족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의 농민 가족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 형성된 군사공동체
우크라이나의 독립과 그 의미
1917년 두 번의 러시아혁명으로 제정러시아가 붕괴되면서 우크라이나의 독립은 현실로 다가왔고 미하일로 흐루셰우스키는 우크라이나 중앙라다의 초대 의장으로서 정치선언문을 발표해 우크라이나 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천명했다. 그가 제4차 유니버설(1918.1.22)을 통해 선포한 독립선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크라이나인) 여러분의 힘과 의지로 우크라이나 땅에 자유로운 민족공화국이 탄생했습니다. 고생하는 대중들의 자유와 권리를 옹호하고자 했던 조상들의 오랜 꿈이 실현됐습니다. (중략) 지금부터 우크라이나 민족공화국은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독립적이고 자유로우며 주권을 가진 우크라이나 국민의 국가입니다. 우리는 러시아·폴란드·오스트리아·루마니아·터키 등 모든 이웃 국가들과 평화롭고 우호적인 삶을 살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독립한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삶을 방해할 권리가 없습니다. 권력은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만 속할 것(입니다).”
비록 계속되는 백군·적(볼셰비키)군과의 전쟁 그리고 폴란드를 비롯한 주변 국가들의 압력으로 어렵게 탄생한 우크라이나 민족공화국은 단명하였지만,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는 민주주의와 독립에 대한 정치사상적 전통과 열망은 사라지지 않고 70년간의 소비에트 시기에도 지속되었다. 결국 1991년 소비에트 사회주의체제의 붕괴와 우크라이나의 독립은 우연적이며 새롭게 발생한 것이 아니라, 흐루셰우스키가 주장한 바와 같이 오랜 세월 우크라이나인들이 추구해온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정치적 열망과 목표가 완수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2004년 오렌지혁명·2014년 마이단 저항과 존엄성혁명·2014년부터 이어온 우크라이나동부전쟁 그리고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전쟁에서 일관되게 우크라이나인들이 요구하는 것은 러시아로부터의 독립·주권보장·자유민주주의의 실현이다. 이는 바로 흐루셰우스키가 우크라이나 역사기술 작업을 통해 주장해 온 우크라이나인들의 역사적 사명과 목표와도 일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