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인연

독립운동 재정지원을 도운 

김형순과 한덕세 부부

아름다운 인연

글 김형목(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미국인 선교사 존스 목사의 중매로 부부의 연을 맺은 김형순과 한덕세는 미주 이민 후 한인생활을 안정시키고 한인사회를 규합하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무엇보다 독립을 위해서는 재정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인식한 두 사람은 사업으로 이룬 수익의 상당 부분을 독립운동과 동포사업 등에 아낌없이 지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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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순(좌) / 한덕세(우)

김형순,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새로운 삶을 개척하다 

김형순(Harry S. Kim)은 1886년 5월 4일 경상남도 통영군에서 태어났다. 김해김씨 삼현파로 아버지는 개화파의 일원으로 정치개혁에 참여하였다.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실패하면서 관련자들이 피살되거나 국외로 망명되자 그의 아버지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숨어 살다가 통영에서 김형순을 낳았다. 그는 6살 무렵 1891년 이모 이에스더가 살던 인천으로 보내졌다. 철도 들기 전에 자신의 의지와 달리 고향을 떠나야 하는 운명이었다. 그럼에도 비관하거나 한탄하지 않는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인천 내리교회에서 미국인 선교사 존스(趙元時, George Heber Jones)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영어와 서양학문을 배웠다. 존스의 도움으로 배재학당의 아펜젤러 목사에게 보내져 장학생으로 공부하였다. 교과목 중 외국 역사와 지리 등은 지적 호기심을 크게 자극했다. 재학 중 협성회와 만민공동회 참여를 통하여 국제적인 감각을 익혔다. 특히 YMCA 총무 이상재와 만남은 신실한 신앙인으로 거듭나는 정신적인 유산이었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인천세관에서 1년간 근무하면서 국제정세에도 나름대로 안목을 가질 수 있었다. 인천과 서울에서 학교생활과 사회생활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향후 진로와 민족문제에 관심을 돋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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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 존스 목사

미주 이주한인의 권익을 옹호하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대한제국은 지배질서 문란으로 많은 모순을 드러내었다. 생존권을 위협받는 민중은 정든 고향을 버리고 중국 동북지역이나 러시아 연해주 등지로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떠났다. 1902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공식적인 ‘디아스포라’인 이민이 시작되었다. 김형순은 하와이 이민을 위해 신설된 수민원(綬民院)의 영어 통역관 모집에 합격하였고, 하와이 사탕수수농장 한인노동자들의 통역관 및 인솔책임자로 임명받았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이민선을 타고 마우이(Maui)섬 사탕수수농장에 도착하였다. 현지 생활은 음식물이나 관습 등이 고향과는 너무 달라 많은 불편함이 뒤따랐다. 사탕수수농장에서 볼드윈(Baldwin) 지배인 밑에서 약 6년간 통역을 하면서 이주한인 권익을 옹호하는 활동을 펼쳤다. 또한 민족정체성을 일깨우기 위한 국어학교와 한인단체 활동을 지원하였다.         

1909년경 통역을 그만두고 귀국길에 올랐다. 귀국 후 존스 목사의 중매로 당시 이화학당 성악과 출신이었던 한덕세와 인연을 맺어 결혼하였다. 미주에서 돌아온 그에 대한 일제의 감시와 탄압은 ‘창살 없는 감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의 바람과 달리 생활조차 힘든 상황에 직면했다. 결국 중국 상하이를 거쳐 1913년 8월 샌프란시스코로 향하였다. 나성고등학교(Los Angeles High School)에 입학하여 고학으로 학교를 마쳤다. 재학 중 노동과 부인의 음악교습으로 약간의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1916년 봄에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북쪽으로 210마일 떨어진 중가주의 과일 농장지대인 리들리에 정착하여 묘목상회를 설립하였다. 털 없는 복숭아 넥타린(Nectarine)을 개발하여 과일 육종전문가인 프레드 앤더슨(Fred Anderson)에게 복숭아 특허품의 묘목전매권을 얻었다. 신종 넥타린 상표는 미국 전역으로 보급되었다. 일시에 엄청난 소득을 올리는 등 한인으로 드물게 ‘백만장자’로 우뚝 섰다. 그의 사업 성공은 한인들의 선망이자 지도자로서 면모를 일신하는 등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더욱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미군납으로 더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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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형제상회 옛 모습(좌) / 리들리 김형순 자택(우)


사업가로서 독립운동 지원에 앞장서다 

사업이 확장되면서 김형순은 새로운 동업자인 김호(金乎, 본명 김정진)를 만났다. 이들은 의기투합하여 ‘김형제상회(Kim Brothers Company)’를 설립했다. 지분은 김형순 50%, 그의 부인 한덕세 25%, 김호 25%였다. 이들은 한인생활을 안정시키고 한인사회를 규합하며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펼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재정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인식했다. 사업으로 번 돈의 상당 부분을 독립운동과 동포사업을 위한 기부에 열성적이었다. 이를 토대로 한인사회를 발전시키는 한편 대한인국민회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마침내 이곳에 미주 본토에서 처음으로 ‘한인타운’이 형성되었다.  

국내에서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미주 본토 각지에서는 공동회가 조직되어 적극적인 독립운동 지원사업에 나섰다. 중가주에서도 한인공동회(韓人共同會)가 열렸다. 한인사회에 신망이 높았던 김형순은 김호와 공동대표를 맡았다. 재미한인들 역량을 결집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3개조 결의안 제안하였다. ① 상하이 한교전체대회의 결정에 호응해 임시정부를 후원하며, ② 후원금을 수합해 임시정부로 보내며, ③ 재미한인의 총역량을 집중해 재미한교연합회를 조직한다. 이러한 제의에 미주한인단체는 ‘임시정부로 집중하자’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미주 한인사회의 지도력을 인정받은 김형순과 김호는 1940년대에도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9개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미주지역 민족적인 역량을 결집한 역사적인 성과물이나 마찬가지였다.     

광복 이후에도 김형순은 사업을 계속하면서 1950년 1월 2일부터 1960년까지 북미국민회의 중앙집행위원장을 10년간 지냈다. 더불어 경기도 평택군 이북면에 ‘꽃동산애육원’을 설립하여 전쟁고아들을 돌보았다. 가난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는 등 인재양성에도 남다른 관심을 기울였다. 이화여대와 건국대 등에도 꾸준히 장학금을 보냈다. 1957년 5월 중가주 리들리에서 조국과 민족의 장래를 위해 김호·김원용 등 실업가들과 한인재단(Korean Foundation)을 설립하였다. 1977년 1월 25일 91세로 사망하자 장례식은 대한인국민회장으로 치러졌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2011년에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사업가로서 독립운동 지원에 앞장서다 한덕세, 독립운동 자금모집과 재정지원 활동을 펼치다

한덕세(다른 이름 김덕세, Daisy)는 1896년(일설에는 1894년) 12월 28일에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다. 개신교 신자로서 근대교육 수혜로 이화학당에서 성악을 전공한 신여성이었다. 김형순과 부부의 인연을 맺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은 독립운동을 위해 상하이로 떠난 후 1913년 활동무대를 미국으로 옮겼다. 1917년경에야 로스앤젤레스에 안착한 김형순은 한덕세와 가족들을 불려들었다. 리버사이드와 피닉스를 거쳐 중가주 리들리에 정착한 부부는 리들리한인민숙과 리들리한인직업소개소를 설립하였다. 이는 미주에 최초 ‘한인타운’이 형성되는 밑거름이 되었다. 한덕세는 김형순의 사업을 돕고자 가사도우미나 어린이보살핌 등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음악강습소 운영을 하며 피아노와 성악 레슨은 문전성시를 이루었으며, 상당한 수입원이 되었다. 그의 헌신적인 활동은 김형순의 사업에 재정적 원천이 되었다.        

한덕세는 1919년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대한인국민회와 대한여자애국단 단원과 사무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기념행사나 한인들 모임이 있을 때마다 축가를 도맡아 부르기도 했다. 1920년에는 이화학당 은사인 김호를 만났는데, 이 인연은 훗날 김형제상회라는 사업을 성공시켜 한인들에게 대단한 관심과 주목을 받았다. 이들의 인연은 1968년 김호가 사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그는 은사 부인이 미국으로 올 때까지 선생을 보살피는 따듯한 인간애를 발휘하였다. 또한 미주이민사에서 여성들의 역할에 주목하면서 한덕세는  ‘리들리 독립운동그룹 5인’이나 ‘리들리 5김’ 중 한 사람으로 기록되기도 하였다. 한덕세는 1977년 5월 5일 사망하여 같은 해 1월 먼저 별세한 남편 김형순이 묻힌 리들리 공동묘지에 합장되었다. 정부는 그의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하여 2014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편 ‘김형제상회’ 가옥에서 시작된 리들리한인교회는 한인사회 생활공동체의 구심점이었다. 2003년 미주이민 100주년부터 이 교회에서 중가주 한인역사연구회·한미재단·애국선열유족회 등의 연합으로 매년 애국선열추모대회를 개최한다. 교회 바로 앞 공터는 김형순이 갈 곳 없는 노인과 노동자·한인 유학생들의 숙식을 해결해주기 위해 건립했던 한인노동자 기숙사와 양로원이 자리하고 있다. 2010년 11월 13일 한국의 독립문 원형을 4분의 1로 축소한 독립문과 광장에 애국지사 10인(이승만·안창호·윤병구·이재수·김종림·김호·한시대·김형순·송철·김용중)의 기념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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