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계형(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8월 15일, 한국·중국·일본 등은 제각기 이날을 기념한다. 지금으로부터 77년 전 1945년 8월 15일을 달리 기억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일제의 식민지에서 해방되었다고 하여 ‘광복절’이라 하고, 일본과 전쟁 중이었던 중국은 ‘승전일’이라고 하는데, 정작 이러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일본은 패전국임에도 불구하고 ‘종전일’이라 한다. 그런데 이날 유독 뉴스에서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가 보도되는데, 그 이유와 무엇이 문제인지 짚어보고자 한다.
기시다 총리는 공물, 각료는 참배
지난 2022년 8월 15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에 공물(供物)의 일종인 다마구시(玉ぐし, 비쭈기나무 가지에 베 또는 흰 종이 오리를 단 것) 대금을 봉납했다. 그는 총리가 아닌 ‘자유민주당 총재’ 명의로, 이를 사비로 부담했다. 이와 달리 각료 중 일부는 직접 신사를 방문해 참배했다. 이러한 행태는 2012년 12월 이후 계속되고 있는데, 한국과 중국의 비난을 피하려는 꼼수에 불과하다.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에 대금을 봉납하는 간접적인 참배가 직접 참배와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경계해야 하는가? 도쿄 중심가에 있는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신사(神社)란 일본 왕실의 조상이나 신대(神代)의 신 또는 국가에 큰 공로가 있는 사람을 ‘신’으로 모신 사당을 말한다. 처음에는 메이지유신 직후인 1869년 막부군과의 싸움에서 죽은 자들의 영혼을 ‘일본의 신’으로 추앙하고자 세운 ‘쇼콘샤(招魂社)’였다. 그 뒤 1879년 ‘평화로운 나라(靖國)’라는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고, 청일전쟁·러일전쟁·만주사변 당시 죽은 일본군 위패를 그곳에 봉안하였다.
이후 일본이 군국주의의 길로 나간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전사자들의 영령을 위해 제사하고 일본 왕이 참배하면서 특별한 공간으로 변모하였다. 이로써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인들에게 일본 왕 숭배와 군국주의를 고무·침투시키는 절대적인 공간이 되었다. 이에 ‘일본 왕을 위해 죽는다면 신이 되어 국민의 예배를 받을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었고, 일본의 젊은이들이 ‘야스쿠니에서 만나자’라는 약속을 하고 전쟁터로 나갈 정도였다.
야스쿠니 신사는 곧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에 이를 경계한 연합군총사령부의 명령에 야스쿠니 신사는 종교시설로 전락하였다. 심지어는 1946년 11월 3일 공포한 일본 헌법 제20조(정교의 분리)에 ‘국가나 그 기관은 어떤 종교적 활동도 하면 안 된다.’, 제89조에 ‘종교단체에 대한 공금지출 금지’라고 명문화하였다. 그런데도 그곳에 합사한 숫자는 이전보다 훨씬 늘어나 군인·민간인 등 246만 6천여 명이나 되었고, 히로히토 일왕은 패전 이후에도 그곳을 찾아 참배했다.
그러다가 자민당은 1960년대 말부터 야스쿠니 신사를 관립으로 복귀시키고 총리와 각료의 참배를 공식화하는 법률을 제정하고자 하였으나, 헌법 위배 논란에 좌절되었다. 이후 1975년 패전일에 미키 총리를 시작으로, 1978년 후쿠다 총리 역시 ‘사적인 참배’를 전제로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고는 공물료 역시 사비로 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 역시 총리가 신사 참배하는 것은 헌법의 정교분리 원칙에 어긋난다는 논쟁을 피하려는 궁여지책에서 나온 것이지만, 이때에도 헌법 위반 논란이 크게 일었다. 이때부터 일본의 우경화가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1979년 4월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를 비롯한 A급 전범 14명이 합사되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이때 오히라 총리가 참배했다는 게 더 큰 문제였다. 이러한 행위는 이들을 전범으로 규정한 극동군사재판 판결을 부인하고 침략 책임을 부정하는 것이었기에 한국과 중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로부터 맹비난을 받았다. A급 전범이란, 극동군사재판부가 1948년 11월 ‘평화에 대한 죄(crimes against peace)’로 판결한 25명을 말한다. 실제로 전쟁을 기획하고 주도한 인물들이었다. 그 가운데 사형을 당한 7명과 옥중에서 사망한 7명을 ‘쇼와 시대의 순난자’라고 하여 이들 14명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했다. 야스쿠니 신사가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으로 불리는 이유다. 하지만 히로히토 일왕은 전범의 합사를 반대하며 야스쿠니 신사를 찾지 않았고 이는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위법성을 부인하고 되풀이된 참배
일본의 우익 정치인들은 한국·중국 등 주변국의 비판과 우려에도 불구하고 매년 봄·가을 제사와 태평양전쟁 패전일에 맞춰 이곳을 집단으로 참배한다. 패전일에는 일반인 추모객들이 더욱 몰려드는데, 특히 일본 극우세력들은 욱일기를 들고나와 군국주의 시절을 찬양하며 행진하기도 한다. 패전 40주년이었던 1985년 나카소네 총리가 최초로 야스쿠니 신사에 공식 참배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일본 정부는 이는 헌법에 금지된 정부의 종교활동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억지를 부렸다. 이후 중국의 첫 거센 비난에 총리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중단되었고, A급 전범 14명을 신사에서 제외하자는 여론도 일었지만 신사 측의 반대로 무산됐다.
이때 오사카와 교토 시민 6명이 ‘나카소네의 공식 참배가 헌법의 정교분리 규정에 어긋난다’며 국가와 나카소네를 상대로 600만 엔의 국가배상청구소송을 냈다. 오사카 지법과 고법이 각기 1989년과 1992년에 모두 원고의 청구를 기각했으나, 고법은 판결문에서 ‘공비에서 3만 엔을 지출한 이 공식 참배는 헌법 20조·89조에 위반한 혐의가 짙다’라고 적시해 시선을 끌었다. 반면 센다이 고법은 1991년 야스쿠니 소송에서 공식 참배가 헌법의 정교분리 원칙에 저촉된다는 판결을 내려 위법성을 명확히 했다. 그런데도 11년 만인 1996년 7월 히시모토 총리가 전격적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찾아 파문을 일으켰다. 한국과 중국 등의 반발과 비난이 거세게 일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다. 이후 몇 년간 잠잠하더니 2001년 8월 13일, 패전일 이틀 전에 고이즈미 총리가 다시금 신사에 참배하였다. 이는 주변국의 ‘직접적 비난’을 피하려는 속임수에 불과했다. 당시에도 남북한과 주변국의 비난은 거셌고 자민당의 지지기반인 우익들도 그리 반기지 않았다. 그런데 고이즈미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재임 기간 내내 패전일을 피해 참배하였고, 2006년 8월에는 당일에 참배하기까지 했다. 이로써 한일·중일 관계 모두 급속도로 냉각되었고, 헌법 20조 위반 판결이 나왔지만, ‘사적인 것’이라며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주변국의 반대·자국 내 반발 여론·히로히토 일왕의 반대에도 굴하지 않았다.
세계 평화를 위해 참배 중단해야
고이즈미에 이어 총리가 된 아베는 1차 집권 당시(2006.9~2007.9)에는 참배를 자제했다. 그러다 제2차 집권 이후부터 태도가 달라졌다. 일본 부총리와 각료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한국의 일본 수산물 금지 조치 및 일본의 WTO 제소 등으로 한일 간에 관계가 극도로 악화한 가운데, 2013년 12월 아베 총리가 7년 만에 다시 야스쿠니 신사를 찾아 참배하였다. 그러고선 그는 지난 총리 재직 당시 신사 참배를 하지 않은 것에 ‘통한’이라고 하거나, ‘신사는 미국 국민이 전사자를 추모하는 알링턴 국립묘지와 같다’라는 망언도 서슴지 않아 국제적인 비웃음을 샀다. 뿔난 국내 여론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었다. 이에 한국·중국 등은 물론 미국으로부터도 비판을 받자 그 뒤론 주요 행사 때 공물을 보내는 것으로 참배를 대신했다. 이는 현재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지금껏 한국 정부는 일본 총리가 직접 참배하거나 공물을 보낼 때와 각료들이 참배할 때 깊은 실망과 유감을 표하곤 했다. 그런데 2022년 8월 광복절 77주년을 맞아 대통령실은 일본 각료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2차 세계대전 패전을 한 일본 입장에서 ‘멈출 수 없는 관습’이라고 말해 논란을 일으켰다. 그러한 안일한 이해는 한일관계에 전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본 정부나 우익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한일관계를 뛰어넘는 문제이기에 그렇다. 이는 ‘군국주의 망령을 부르는 범죄’이기에 세계 평화를 위해서 극히 경계해야 할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