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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3발의 총성으로 ‘한국병합’을 응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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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한성민(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원 연구교수)



대한의군 참모중장이었던 안중근이 일제 최고 국가원로였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의거가 일어났다. 그의 총구는 사람만을 겨눈 것이 아니라 ‘한국병합’을 준비하던 일제를 겨냥하였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한국병합’의 명분을 찾던 일제에 빌미를 주었다는 인식이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그의 저격이 정말 ‘한국병합’의 빌미를 제공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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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동아시아에 울려 퍼진 총성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경 중국 동청철도의 하얼빈역. 플랫폼에 질서정연하게 도열한 러시아군 의장대와 흥분된 기대감 속에 운집한 환영객들 앞으로 특별열차가 멈춰 섰다. 왜소한 체구에 수염을 길게 기른 동양계 노신사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수행원들과 함께 걸어 나오자 의장대의 팡파르보다 환영객들의 함성이 먼저 터졌다. 그 순간 총성이 울렸고 함성은 비명으로 바뀌었다.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이 일제 최고 국가원로이자, 초대 한국통감을 역임하는 등 일본의 한국침략 과정에서 중심적 역할을 수행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이 의거가 당시 동아시아 사회에 준 충격은 대단하였다. 러시아 및 일본 관헌이 총출동하고 많은 인파가 모인 공개적인 장소에서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는 한국인 청년이 단신으로 일본의 대정치가를 저격했다는 사건 자체도 매우 강렬하였으나 당시 동아시아 국제정치에서 이토가 차지하는 비중으로 인하여 관련 국가들의 이목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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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좌) /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 사살 후 러시아 관헌에게 체포되는 장면을 묘사한 기록화(우)

조선의 명사수 일제 우두머리를 저격하다

안중근은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향반 안태훈과 조마리아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글공부와 사냥을 즐기는 소년으로 성장하여 명사수로 소문났다. 그의 사격실력이 처음 사회적으로 발휘된 것은 1894년 갑오농민전쟁에서였다. 농민들의 저항에 부정적이었던 다른 양반과 마찬가지로 안태훈은 민병대를 조직하여 농민군 진압에 나섰고, 안중근은 16세의 나이로 선봉대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3년 후 천주교에 입문하면서 안중근은 문명개화론적 세계관을 형성하는 한편, 국권상실의 위기로 치닫는 상황에서 국권회복을 고민하게 되었다.           

특히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조국의 현실에 직면하여 안중근은 국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민족의 실력양성이 급선무라고 판단하였다. 1906년 평안도에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설립하고, 국채보상운동과 서북학회 참여 등 적극적인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광무황제 강제 퇴위와 군대해산 등 한국의 식민지화는 더욱 가속되었다. 이 같은 현실에서 안중근은 애국계몽운동의 한계를 인식하고, 국외로 망명하여 무장독립투쟁을 모색하였다. 1908년 러시아 연해주에서 의병을 조직하여 일본군에 대항하였다.     

1909년 3월 안중근은 12명의 동지와 함께 비밀조직 단지회를 조직하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와 매국노 이완용을 3년 내에 사살할 것을 맹세하였다. 실행의 기회는 바로 그해에 찾아왔다. 이토가 러시아의 재무대신과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이 신문에 보도되었다. 이에 안중근은 10월 26일 이토가 하얼빈에 도착하자마자 의거를 거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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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관련 총기

만국공법에 따라 살인범이 아닌 전쟁포로로 대우하라

사건 직후부터 지금까지 한국에서는 안중근을 한국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리고 침략의 원흉을 사살한 민족의 영웅으로 인식한다. 반면 일본에서는 근대 일본을 이끈 대정치가를 저격한 테러리스트라는 인식이 강하다. 그런데 관심을 저격사건에서 그것이 끼친 영향으로 돌리면 한일 간에 묘한 공통점도 나타난다. 안중근의 이토 저격이 ‘한국병합’ 실행의 계기가 되었다고 파악하는 흐름이 있다는 점이다. 일본에서는 평소 ‘한국병합’에 반대하고 한국에 대해 보호육성정책을 펴던 이토를 한국인이 사살했기 때문에 이를 계기로 일본은 급격하게 ‘한국병합’을 결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한국에서는 이토가 ‘한국병합’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그 주역이었다고 반박하면서도, 이 사건은 ‘한국병합’의 명분을 찾던 일본에게 그 빌미를 준 것으로 파악하는 인식이 일부에서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당시 일제는 통감부에 의한 한국보호통치를 일본의 문명적 시혜이며, 이를 통해 한국은 점차 문명화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의 전반적인 동의 속에서 보호통치가 행해지고 있다고 국제사회에 홍보하고 있었다. 일본 정부 내부에서는 이미 1909년 7월 6일 각의에서 ‘한국병합’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무리 없이 실행하기 위해 한국 내에서는 반일세력 제거를 위한 ‘의병대토벌작전’을 전개하면서 외부적으로는 다른 열강과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있었다. 이토의 만주시찰은 중국 동북지역에서 철도를 매개로 예상되는 미국과 러시아의 결합을 사전에 저지하고, ‘한국병합’에 대한 러시아의 승인을 목적으로 삼았다. 바로 이러한 때에 안중근이 한국침략의 중심인물인 이토를 저격했다.           

이것은 단순한 충동이 아니라 뚜렷한 계획하에 실행되었다. 그는 의병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이토를 사살함과 동시에 재판 투쟁을 통해 일제의 허울 좋은 동양평화론의 실체를 전 세계에 폭로하고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세계 여론에 호소하고자 했다. 이 때문에 안중근은 체포된 직후 자신을 만국공법에 따라 일반 살인범으로 대우하지 말고, 전쟁포로로 대우할 것을 요구하고, 이토의 죄상을 15개조로 논리적으로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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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사건 공판 속기록』(1910.5.13.)(좌) / 사형 집행 직전 촬영한 안중근 사진 (1910.3.26.)(우)

사건의 파문을 최소화하기 위한 일제의 계략

‘한국병합’을 계획하고 있던 일제는 이 사건의 여파가 확대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사건이 부각되면 우선 한국에서 안중근은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될 수 있고, 제2나 제3의 안중근이 나올 수 있는 문제였다. 그 결과 ‘의병대토벌작전’ 이래 감소추세에 있던 한국의 의병투쟁이 격화될 위험이 있었다. 일본 내에서는 ‘한국병합’에 대한 민간의 강경 여론이 자극받게 될 것이고, 이것은 일본정부가 조심스럽게 준비하던 ‘병합’ 계획에 차질을 빚을 수 있는 문제였다. 또 열강의 이목이 쏠린 가운데 일본의 한국침략 문제가 국제적으로 주목받게 될 상황이었다. 이렇게 되면 그동안 일본정부가 치밀하게 준비해 온 ‘한국병합’은 한국의 전면적인 반발이나 다른 열강의 개입으로 좌절되거나 일본의 강경 여론에 밀려 일본정부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에서 민간 주도의 병합이 추진될 수도 있는 문제였다. 따라서 일본은 안중근에 의한 하얼빈 의거의 파장이 되도록 축소되기를 원했다.           

일제는 사건의 파문을 최소화하기 위해 안중근에 대해 불법적인 정치재판을 전개하였다. 사건 직후 한국인 안중근은 러시아 헌병에 체포되어 수사받은 뒤 사건 당일 일본 관헌에 넘겨졌고, 일본의 법정에서 일본법률에 의해 살인범으로 사형을 받아 1910년 3월 26일 순국하였다. 이것은 당시 일제가 한국에 강제하여 체결한 조약마저도 위반하고, ‘사법권 독립’의 조항도 침해한 총체적인 불법재판이었다.


이토 사살은 곧 일제의 ‘한국병합’에 대한 응징

안중근의 이토 사살은 한국침략의 중심인물인 이토를 제거한 것이지만, 단지 이토 개인에 대한 응징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재판에서 관동도독부의 사법부는 안중근에게 무죄 석방의 조건을 내걸고 “개인적으로 이토를 오해하여 저격했다”는 진술을 집요하게 요구했다. 안중근 의거의 파장으로 우려되는 한국 내에서의 반일운동 고양, 국제정세를 모르고 강경해지는 일제의 ‘한국병합’ 여론, 그리고 일제의 한국에 대한 허구적인 문명통치론에 대한 열강의 개입을 불식시키는 최상의 방법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안중근으로부터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안중근은 오히려 “이토에게 개인적인 원한은 없고, 오해하지도 않는다. 개인적으로 살인을 꾀한 범죄인이 아니라 대한국 의병 참모중장으로 하얼빈에 와서 전쟁을 개시, 습격 후 포로로 잡힌 것이다”라고 답변했다. 즉 안중근은 일본 제국주의의 법정에서 이토 개인에 대한 응징을 넘어 제국주의 일본의 한국침략정책에 대한 응징임을 명확히 했다. 그의 총구는 이토 한사람만을 겨눈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 일본의 한국침략정책을 겨눈 것으로, 안중근 의거는 ‘한국병합’을 준비하고 있던 일본정부에 직접적인 타격을 준 투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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