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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어떻게’ 한국을 강제 병탄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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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한성민(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원 연구교수)



한국에 대한 일제의 침략은 러일전쟁과 함께 본격화되었다. 일제는 침략의 주요 수단으로 군사력을 이용하면서도, 결정적인 국면에서는 강제 조약을 체결하는 방식으로 한국의 국권을 침탈하였다. 「한일의정서」를 시작으로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에 이르기까지 일제는 일관되게 조약 체결 방식을 고집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여 한국 침략에 대한 경쟁자는 모두 사라졌고, 사실상 한반도를 군사적으로 점령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일제는 강제 병합까지 왜 5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을까. 또 왜 굳이 조약 체결의 형식을 고집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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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병합’에 관한 조약, 전권위임장」 (1910)

일제가 ‘조약’을 채택하게 한 「포츠머스조약」

주권국가였던 한국을 식민지로 만드는 것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일제는 한국과 관련된 열강과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기존의 한일관계를 재조정해야 했다. 또한 한국정부의 기능을 일제가 담당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병합’은 결코 당시 일제의 특정한 정치인이나 정치세력이 독자적으로 추진할 수 없었고, 일본사회의 전반적인 동의와 지지 아래 국가적 역량을 최대한 투입하여 추진해야 했다. 또한 한국사회의 반발을 최소화하면서 일제의 의도에 맞는 통치체제 준비에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따라서 일제는 점진적인 ‘한국병합’ 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는 러일전쟁의 막바지인 1905년 7월 미국과 「가츠라-태프트 밀약」, 8월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 9월 러시아와 「포츠머스조약」을 체결하여 한국에 대한 ‘보호·지도 및 감독’의 권리를 승인받았다. 이후 일제의 한국 침략이 강화되었으나, 이것이 즉각적인 한국의 국권상실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포츠머스조약」의 협상과정에서 러시아는 일제가 한국의 주권을 침해할 만한 조치를 할 경우 반드시 한국정부와 합의해야 한다는 단서조항을 달았고, 그것에 영국과 미국 등 열강도 동의했다. 이는 러일전쟁 후 일제의 즉각적인 ‘한국병합’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불법을 동원하더라도 반드시 조약 체결의 방식을 채택하게 한 주요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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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와 러시아의 「포츠머스조약」 체결 모습 (1905)

「을사늑약」부터 「한일신협약」으로 한국의 내정권을 장악하다

「포츠머스조약」이 체결된 뒤, 특파대사로 한국에 온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한국의 외교권 박탈을 규정한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했다. 이후 일제는 한국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이토를 초대 통감으로 임명하였다. 통감은 한국의 외교를 대리하는 동시에 한국에서 일제를 대표했다. 따라서 이토는 한국의 내정에 참여할 권한이 없었으나, 한국 고위관료들과의 회의기구인 시정개선협의회를 통해 내정에 깊숙이 간섭하였다. 이 시기는 일제가 한국의 통치권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한국정부와 통감부가 병립하는 이중권력 구조였다.           

광무황제는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1907년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이준·이위종 등을 특사로 파견했다. 이 회의는 주권국가 간에 국제문제를 다루는 자리였다. 만약 한국이 참가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국제사회에서 독립국으로 공인받는 계기였고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도 무효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반대로 한국이 참가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한국에 대한 일제의 보호권이 국제사회에서 공인받는 계기가 되는 것이기도 했다. 일제는 한국의 특사파견 움직임을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으나 저지하지 않았다. 헤이그에서 한국특사단의 활동에 대해서도 직접적인 방해를 하지 않고 방관하였다. 여기에는 2가지 중요한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       

첫째 일제는 한국특사단의 공개적인 반일활동을 허용할 정도로 자유롭고 문명적으로 지도하기 때문에 서구 열강처럼 식민통치능력이 있다는 점을 내보이려는 의도였다. 둘째 이 사건을 빌미로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한층 강화하려는 의도였다. 이러한 일제의 의도는 일정하게 달성되었다. 헤이그에서 회의 참가를 거부당한 한국특사단은 한국에 대한 일제의 침략 내용을 폭로했으나, 열강의 특별한 문제제기는 없었다. 이것은 일제의 한국정책에 대한 열강의 암묵적 동의를 의미했다. 이후 일제는 침략을 더욱 강화하여 1907년 7월 광무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한일신협약」을 체결하여 한국의 내정권을 장악하였다. 뒤이어 한국군대의 해산·사법권 및 경찰권의 위임·일본인 차관(次官)의 채용 등을 규정한 「비밀각서」를 체결하였다. 이로써 통감은 명실공히 한국의 국정을 총괄하는 최고 통치자가 되었고, 국정의 주요 사항은 통감 주도하에 한국정부의 관료들이 참석하는 시정개선협의회에서 결정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의 국방과 치안도 일본군으로 대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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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을사늑약」 전문 (1905) / (아래 좌)「한일신협약」 전문 / (아래 우)『대판조일신문』(1907.7.24.) / 왼쪽부터 이준·이상설·이위종

침략의 의미를 완화하기 위해 고안한 용어, ‘한국병합’

1909년 3월 그동안 한국정책을 책임졌던 이토가 통감직의 사임을 표명하자, 일제의 내각총리대신 가쓰라 다로(桂太郞)와 외무대신 고무라 쥬타로(小村壽太郞)는 4월 초 이토를 찾아가 ‘한국병합’에 대해 동의받았다. 이때부터 일제는 한국 식민지화에 대해 ‘병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당시 일제 외무성의 정무국장 구라치 데쓰키치(倉知鐵吉)가 ‘합방’·‘합병’과 달리 양국의 대등한 통합이 아니면서도, ‘병탄’과 달리 침략의 의미를 완화하기 위해 고안한 용어였다.   
이후 일본정부는 7월 6일 내각회의에서 ‘한국병합’ 방침을 공식적으로 확정하였다. 당시 각의에서 통과된 「대한정책의 기본방침」은 ‘① 적당한 시기에 한국병합을 단행할 것, ② 병합의 시기가 도래할 때까지 병합의 방침에 기초하여 충분히 보호의 실권을 장악할 것’이었다. 이와 함께 그 실행지침으로「대한시설대강」을 통과시켰다. 주요 내용은 일제의 군사력과 경찰력을 바탕으로 일제 관리들이 한국의 주요 시설 및 기관을 장악하여 권한을 확대하고, 많은 일본인을 이주시켜 통치의 근거를 견고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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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진회 회장 이용구

일제의 큰 그림을 위한 ‘합방청원운동’ 진압

일제는 이 시기까지도 ‘한국병합’의 구체적인 실행 시기를 결정할 수 없었다. 「포츠머스조약」의 단서조항으로 인해 열강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의병은 한국사회에서 일제의 침략에 맞선 거의 마지막 저항세력이었다. 1909년 9월~10월의 이른바 ‘남한폭도 대토벌작전’을 통해 의병과 같은 조직적인 저항세력이 사라졌음을 확인한 이토는 중국 동북지역시찰에 나섰다. 그 목적은 러시아의 재무대신 코코프쵸프(V. N. Kokovtsov)를 만나 중국 동북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미국에 대한 공동대응과 ‘한국병합’에 대한 러시아의 양해를 구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이토는 10월 26일 하얼빈에 도착하자마자 안중근에게 사살당했다. 이로써 일제의 의도는 일단 좌절되었으나 사건의 여파는 상당했다. 일본 내에서는 즉각 한국을 ‘병합’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했고, 한국의 친일단체 일진회는 12월 「합방청원서」를 발표했다.         
하지만 이것은 일제가 바라던 것이 아니었다. 당시 일본사회에서 분출되고 있던 ‘한국병합안’은 일제가 생각하고 있던 ‘한국은 완전히 폐멸되어 일본의 일부가 된다’는 ‘병합안’과 일치하지 않았고, 일진회의 ‘합방청원운동’은 한국인들의 반발을 초래하고 있었다. 게다가 ‘한국병합’에 대해 열강의 승인을 받지 못한 상황에서 이토 사망으로 한국문제가 국제적 관심사로 부상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한국병합’이 좌절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갖게 된 일본수상 가쓰라는 곧바로 열강을 향해 “당분간 이토의 한국정책은 변함없이 유지될 것이다”라고 발표했다. 이와 함께 일제는 한국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차단하기 위해 안중 근에 대한 재판을 신속하게 진행하고, 소네 아라스케(曾?荒助) 통감은 일진회의 ‘합방청원운동’을 진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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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이완용 / (우)「‘한국병합’에 관한 조약」, 『조선총독부 관보』(1910.8.29.)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 으로 막을 내린 대한제국 역사

‘한국병합’의 여건은 1910년에 접어들어 마련되었다. 중국 동북지역에 미국의 개입이 강화되자 4월 러시아는 일제와 공동대응을 협의하는 과정에서 ‘한국병합’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5월에는 열강의 대표국가 영국도 동일한 의사를 밝혔다. 러시아와 영국이 ‘한국병합’을 양해하자 일제는 곧바로 ‘한국병합’ 실행을 결정하고, 5월 30일 ‘병합’의 책임자로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를 육군대신 겸임의 제3대 통감에 임명하였다. 이 직후 데라우치는 일제 각 부처 실무책임자들을 모아 병합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한국병합’의 구체적인 실행안을 만들도록 했다.      

병합준비위원회는 ‘한국병합’은 조약을 체결하여 실행하고, 한국에서 당분간 일본헌법을 실행하지 않으며, 총독에게 입법·행정·사법의 전권을 부여한다는 등 모두 22개 항목의 「병합실행방법세목」을 입안하였다. 일제는 이것을  7월 8일 각의에서 통과시켰다. 이후 ‘한국병합’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그것은 무력을 동원한 데라우치의 강압과 이완용 등 일부 친일관료들의 협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7월 23일 서울에 도착한 데라우치는 곧바로 위수령을 내려 한국에서 모든 정치집회와 연설회를 금지시키고 무력시위로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그 후 8월 16일부터 한국의 전권위원인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남산의 통감관저에서 ‘한국병합’ 실행을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일제가 제시한 ‘한국병합안’을 이완용이 대부분 그대로 수용했기 때문에 협상기간은 불과 1주일도 걸리지 않았다.   

협상과정에서 이완용이 수정을 요구한 사안은 단 2가지였다. ‘병합’ 후에도 ‘한국’이라는 국호와 한국 황실에 대해 ‘왕’으로 존칭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데라우치는 ‘한국’의 명칭 사용은 국제사회에서 혼동할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거부하고, 황실의 존칭에 대해서는 한국의 민심을 자극할 수 있다는 이완용의 의견을 수용하였다. 이에 광무황제는 ‘이태왕’, 융희황제는 ‘이왕’, 황태자는 ‘영친왕’의 존칭을 사용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이것으로 담판은 종결되었다.  

무장한 일본군이 궁궐을 완벽하게 포위하고, 한성의 전역에서 삼엄한 경계망을 전개한 가운데, 8월 22일 창덕궁에서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다. 조약을 체결하여 ‘병합’을 실행한다는 일제의 방침에 따른 형식적인 어전회의였다. 이미 모든 실권을 잃은 융희황제의 재가를 받자마자 이완용은 데라우치와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1주일 뒤인 8월 29일 ‘한국병합’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이것으로 대한제국의 역사는 끝났고, 한국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을 때까지 일제의 식민통치를 받았다. 지금부터 112년 전, 1910년 8월 29일은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치욕의 날이지만 이 뼈아픈 역사가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되새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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