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산책

남아메리카의 해방자, 시몬 볼리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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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재학(고려대학교 서어서문학과 교수)

 

19세기 초 남아메리카의 독립운동을 지도했던 시몬 볼리바르는 짧은 생애동안 베네수엘라를 비롯해 콜롬비아·에콰도르·페루·볼리비아를 스페인 식민통치에서 해방시켰다. 국명·화폐단위·지형·공항 등에 ‘볼리비아’라는 이름이 붙은 것만 보아도 남미인들에게 볼리바르가 어떤 의미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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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볼리바르

라틴아메리카 독립의 배경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02-1713)의 결과 스페인의 왕위는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차지로 돌아갔다. 부르봉 왕가는 낙후된 스페인을 개혁하고자 계몽 전제주의 아래 기존의 시스템을 혁신하는 강력한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빼앗긴 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한 시장 장악력을 되찾고자한 부르봉 왕가의 노력은 스페인의 취약한 산업기반으로 인하여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카를로스 4세(재위 1788-1808)의 무능, 마리아 루이사 왕비와 그녀의 애인 고도이 재상에 의한 국정농단은 아들 페르난도 7세가 주도하는 반란으로 이어졌다. 나폴레옹 군대의 침공으로 어수선한 틈을 타 1808년에 페르난도 7세가 부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나폴레옹은 이를 빌미로 스페인 국왕을 폐위시킨 후 자신의 형인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의 왕위에 앉혔다. 이에 자신의 왕위를 빼앗긴 페르난도 7세는 아메리카 식민지에 도움을 청하며 대폭적인 자치를 약속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실패 후인 1813년 12월 스페인 왕위를 되찾은 페르난도 7세는 식민지인들과의 약속을 헌신짝같이 저버리고 강력한 보수주의자로 돌아서며 왕권을 강화시켰다. 그가 식민지에 대한 세금을 대폭 올림과 동시에 식민지 크리오요(criollo)* 엘리트들에게 약속했던 자치권에 대한 약속을 이행하지 않자 독립에 대한 열망이 커지게 된다.


*크리오요(criollo)

스페인의 식민지배를 받던 아메리카에서 태어난 백인들은 ‘크리오요(criollo)’로 불렸으며, 스페인에서 태어난 사람들인 ‘페닌술라르(peninsular)’와 계급적으로 구분되었다. 이들 크리오요들은 스페인계 아메리카의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권력에서는 철저히 배제되었다. 페닌술라르와는 달리 ‘2등 시민’의 대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라틴아메리카 인종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메스티조(mestizo), 인디오, 흑인 등의 ‘갈색인(pardo)’들과 자신들을 구분하며 스페인 본국과 유대감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유대인 추방 이후 상공업 기반이 붕괴된 식민 모국 스페인은 스페인계 아메리카의 대농장, 광산 등에서 생산되는 수출품들의 최종 목적지가 될 수 없었다. 또한 식민지에서 소비되는 대부분 수입품의 생산지도 스페인이 아닌 영국과 프랑스 등의 다른 서유럽 국가들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스페인 왕실이 식민지와 다른 유럽 국가들 간의 직교역을 철저히 금지하자, 식민지의 경제권을 장악한 크리오요 엘리트들의 반발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시몬 볼리바르와 남아메리카의 해방

스페인계 아메리카의 독립은 크게 멕시코와 남아메리카로 분리되어 진행되었다. 이중 남아메리카 북부지역의 독립을 이끈 것은 ‘해방자(el libertador)’로 불린 시몬 볼리바르(Simon Bolivar)였다. 부유한 크리오요 엘리트 출신인 그는 1783년에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Caracas)에서 태어났으며, 스승인 자유주의자 시몬 로드리게스(Simon Rodriguez)를 통해 장 자크 루소와 몽테스키외 등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이후 프랑스와 미국 여행을 통해 혁명과 공화국 건설의 열망에 사로잡힌 그는 베네수엘라에 귀국한 해인 1807년부터 남아메리카 독립운동에 인생을 바치게 된다. 스페인계 아메리카의 대표적 지식인 중의 한 명인 안드레스 베요(Andrés Bello)와 또다른 혁명가인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Francisco de Miranda)의 합류로 힘을 받은 볼리바르는 1811년에 베네수엘라의 독립을 선언하는 것에는 성공하였다. 그러나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원하지 않는 크리오요 엘리트들과 페닌술라르 등이 왕당파를 결성하여 강력하게 저항하자 결국 국외로 망명을 떠나게 된다. 이후 콜롬비아의 항구도시 카르타헤나(Cartagena)에 잠입한 그는 군대를 재결성한 후, 불과 5백명의 병력을 이끌고 안데스 산맥을 넘어 베네수엘라로 진군하였다. 스페인 국왕 페르난도 7세의 식민지에 대한 약속 불이행과 폭정에 대한 반발로 이전과는 달리 많은 크리오요들이 식민지의 독립을 지지하게 된 상황에서 볼리바르의 군대는 1814년, 카라카스에 입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폴레옹 몰락 이후 재편된 스페인 군대가 아메리카 식민지에 투입되자 또다시 눈물을 머금고 국외로 망명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자메이카와 아이티를 거쳐 다시 베네수엘라로 잠입한 그는 베네수엘라 평원지대 야노스(llanos)의 목부들인 ‘야네로(llanero)’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는데 성공하였다. 또한 나폴레옹 전쟁의 승리 이후 여력이 생긴 영국이 베네수엘라에 지원군을 파견하고, 독립 이후의 이권을 노리는 영국 상인들이 볼리바르를 재정적으로 지원하자 그의 군대는 이전과는 다르게 강력해졌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1819년, 누에바 그라나다(Nueva Granada)의 수도 보고타(Bogota) 근처 보야카(Boyaca) 평원에서 스페인 군대를 격파한 후 콜롬비아를 해방시켰다. 이후 베네수엘라와 에콰도르를 차례로 해방시킨 볼리바르는 1821년에 그란 콜롬비아(Gran Colombia)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독립의 결과

볼리바르는 1822년 7월 에콰도르 항구 도시 과야킬에서 남쪽의 아르헨티나·칠레·페루를 해방시킨 산 마르틴(San Martin)과 역사적인 만남을 가졌다. ‘과야킬 회담’이라 일컫는 만남 이후 신생 독립국에서의 군주제 실시를 주장한 산 마르틴은 모든 직위를 내려놓고 유럽으로 망명을 떠나게 된다. 이후 볼리바르는 자신이 해방시킨 알토 페루(Alto Perú)와 그란 콜롬비아의 통합을 추진하였으나 실패하고, 알토 페루는 그의 이름을 따라 ‘볼리비아(Bolivia) 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 ‘하나의 아메리카’를 꿈꾸며 강력한 중앙집권적 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해 그란 콜롬비아의 독재자로 취임한 볼리바르의 이상은 필연적으로 대농장을 소유한 크리오요 엘리트들의 이익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거대한 꿈은 시대적 한계로 인해 이루어지지 못했고, 강력한 저항에 부딪힌 그는 결국 모든 직위를 내려놓고 1830년 5월 8일, 수도 보고타를 쓸쓸히 떠나게 된다. 볼리바르는 같은 해 12월, 47세의 나이로 쓸쓸히 사망하였고, 그란 콜롬비아는 완전히 해체되었다. ‘하나의 아메리카’를 꿈꿨던 그의 이상은 오늘날의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파나마, 페루, 볼리비아 등으로 산산조각이 나있다. 또한 라틴아메리카의 분열은 미국의 개입을 가져온다고 걱정한 그의 예언은 현실이 되고야 말았다. 21세기 현재까지도 크리오요 엘리트들의 후손들이 국가의 정치와 경제를 장악하고 있는 반면, 대다수의 메스티조와 인디오들은 여전히 소외된 채 주변인으로서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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