톺아보기

일제가 자행한 한인학살, 

그 만행의 진상을 파헤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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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장세윤(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지에서 벗어난 지 77년이 되어가지만, 일제강점기 혹은 독립전쟁기에 자행된 일제 당국이나 군경·민간인에 의한 ‘한인(조선인) 학살’ 만행의 진상은 아직도 제대로 규명되지 않고 있다. 심지어 최근에는 일부 외국인이나 한국인 학자들에 의해왜곡된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일제가 자행한 한인학살에 대한 진실 규명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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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대지진 당시 한인학살을 묘사한 가와메 테이지 그림  


일본군이 자행한 근대시기 첫 한인학살

1894년 전후 시기부터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주의 침략세력의 패망 전후 시기까지 약 55년간 일제 침략세력은 국내외 각지에서 한인학살 만행을 벌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1895년~1900년대 초 의병전쟁, 1919년 3·1운동, 1920년 10~12월 중국 연변·남만주 서간도지역의 간도참변(경신참변), 1920년 러시아 연해주 4월 참변, 1923년 9월 일본의 관동대지진 등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근대시기 일본군의 첫 한인학살은 1875년 9월 일본 군함 운요호(雲揚號)가 벌인 조선 연해 강화도 등 강화해협에 대한 불법측량과 침입에서 비롯되었다. 9월 20일 운요호는 강화도 초지진에서 조선군이 공격하자 초지진에 포격을 가한 뒤 이어 영종도에도 포격을 가하고 일본군 22명을 영종도에 상륙시켜 조선군과 전투를 벌였다. 조선군이 근대식 대포와 소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을 상대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일본군은 수비하던 조선군 35명을 죽이고 다수의 포와 화승총 등을 약탈하였다. 또한 일본군은 철수하면서 영종도에 설치된 영종진의 공공건물과 민가에 방화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이는 한국근대사상 일본군 한인학살의 효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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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대지진 당시 파괴된 동경 은좌거리(일본제작 사진엽서)(좌) / 운요호(우)

무자비하게 시행된 동학농민군 학살

신영우 교수(전 충북대)는 『1894년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학살』 논문에서 일본군 보고문서 『주한일본공사관기록』과 관군 기록 『순무선봉진등록』 등을 근거로 ‘일본군 책임 아래 2만 명에서 5만 명까지 이르는 많은 동학농민군이 학살되었다’고 추정하였다. 실제로 일본군 남부병참감 이토 스케요시 중좌는 동학농민군 탄압의 실질적 주역인 미나미 고시로 소좌에게 1894년 11월 19일 다음과 같이 지시하였다.              

① 동학당은 현재 충청도 충주·괴산 및 청주 지방에 군집해 있고 그 여당(餘黨)은 전라·충청 양도 소재 각지에 출몰한다는 보고가 있으니, 그 근거지를 찾아서 이를 초절(剿絶, 무력으로 모조리 끊어 없앰)할 것.       

② 조선정부의 요청에 따라 후비보병 제19대대는 다음 항에서 가리키는 3로로 나누어 진군하고, 조선군과 협력해서 연도(沿道)에 소재하는 동학당의 무리를 격파, 그 화근을 초멸(剿滅, 무력으로 모조리 없애버림)해서 재흥(再興)의 후환을 남기지 않음을 요함. (중략) 다만 이번에 동학당 진압을 위해 전후로 파견된 조선군 각 부대의 진퇴와 군수품 조달은 모두 우리 사관(士官: 장교)의 명령에 따라 하게하되, 우리 군법을 준수케 할 것이며 만일 위배하는 자가 있으면 군율에 따라 처분될 것이라고 조선정부로부터 조선군 각 부대장에게 이미 시달되어 있으니, 세 갈래 길로 이미 출발했거나, 또는 장차 출발할 조선군의 진퇴는 모두 우리 사관으로부터 지휘·명령을 받아야 할 것임.     

이처럼 동학농민군의 탄압은 일본군 주도로 조선군을 철저하게 ‘초절’·‘초멸’한다는 방침으로 무자비하게 시행되었다. 당시 동학농민군 탄압의 선봉장이었던 미나미 고시로는 후일 보고서에서 “많은 동학당을 죽이는 방침을 취하고 있다. 다소 살벌하지만, 훗날 다시 일어날 가능성을 제거하기 위해 명령에 따르고 있다.”라고 실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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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미 고시로가 동학농민군 학살 집행 내용을 기록한 「동학당정토(東學黨征討) 경력서」 _박용규 제공


군사적 침략을 위해 감행된 의병 학살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일제는 한반도에 대한 군사적 침략을 감행하였다. 이는 종전에 개항장을 중심으로 한 부분적 군대 파견과는 달리 한반도에 대한 전면적 군사지배의 실행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일본군보다는 오히려 관군을 상대로 싸워야 했던 전기의병 때와 달리 러일전쟁 이후의 의병들은 일본군과 전면전을 벌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906년 중반 충청남도 홍주의병의 봉기는 일본군과 대규모 접전을 벌인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일본군은 1906년 5월 19일 1,200여 명의 의병들이 점령한 충청남도 홍주성(지금의 홍성)을 5월 31일 새벽에 기습하여 빼앗았다. 이를 홍주성전투라 부른다. 이후 일본군은 6월 7~9일 경까지 무자비한 의병 수색과 탄압을 자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의병 300명이 학살된 것으로 파악된다. 홍주성전투 직후 부임한 군수 윤시영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의병 시신 83구를 매장했고, 또 목이 잘린 시신 15구를 찾아내 6월 8일 매장하였다. 사상자가 몇백 명인지 알 수 없으며, 사방 수십리 지경 안에는 인적이 끊기고 잡힌 사람이 160여 명인데, 모두 차례로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들으니 심히 참혹하였다.” 또한, 이 전투에 참가한 의병장 유준근은 후일 『마도일기(馬島日記)』에서 ‘의병 300여 명이 전사했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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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성 수복〉 민족기록화_장리석(1975)

군사적 침략을 위해 감행된 의병 학살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이후 일본군의 의병 학살은 대체로 3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러일전쟁 이후부터 1908년 상반기까지이다. 1906년 5월부터 의병 학살이 시작되어 1908년 6월까지 약 2년간 통계상으로는 의병 11,419명이 학살된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1907년 8월 군대해산 직후 의병전쟁이 격화하면서 일본군의 학살에 비례하여 의병들의 희생이 컸던 것으로 분석된다. 두 번째는 1908년 하반기 이후부터 1910년 8월 대한제국의 멸망 전후 시기이다. 1909년 9월부터 2개월간 일본군은 주로 호남지역을 대상으로 소위 ‘남한대토벌작전’이란 대규모 탄압을 전개하여 의병과 민간인들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세 번째는 1910년 일제강점기 이후로 일본군 수비대가 종전의 분대 중심에서 소대·중대 중심으로 배치되고, ‘토벌’보다는 ‘일상적 감시체제’로 전환되는 단계이다. 1910년대에 헌병경찰제도가 시행되면서 식민지 무단통치 체제가 확립되어 갔던 것이다.         

일본군과 지속적·대규모 전투가 이루어져 많은 의병 희생자가 나온 시기는 1907년 8월 이후의 후기의병 시기로, 이때 일본군이 집중적으로 의병 학살을 자행하였다. 일본군이 나중에 정리한 『조선폭도토벌지』 통계를 보면 1906년부터 1911년까지 의병 17,779명이 희생된 데 반해 일본군측 피해는 136명에 불과하였다. 특히 이 통계를 보면 1907년부터 1909년까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희생된 사망자(전사자)와 부상자 숫자를 비교해보면 부상자보다 사망자 숫자가 훨씬 많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일반적 전투나 전쟁 사상자 숫자와 비교해보면 매우 비정상적인 것으로, 일본군이 의병들을 학살했음을 실증하는 통계이다. 이 밖에도 너무나 많은 학살과 만행 사례가 있지만, 지속적이며 장기적 차원에서의 조사·연구·교육은 아직 미흡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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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포에서 자행된 일본군의 김성삼·이춘근·안순서 의병 학살(1904.9.21)(좌) / 평남 성천에서 체포된 최후의 조선의병장 채응언(1915.7)(우)

넋을 달래기 위하여 남아있는 과제

우리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일제 당국과 군경·민간인들에 의한 한인학살과 살상 등의 만행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특히 ‘사할린 미즈호 마을’과 ‘가미시스카 경찰서의 학살사건’, ‘오키나와의 구메지마 학살사건’ 등은 1945년 8월 15일 이후 발생했다는 점에서 우리를 더욱 충격에 빠뜨리며, 가슴을 아프게 한다. 이렇듯 일본 점령지와 한인 강제동원 지역 등에서 더 많은 학살 사례를 조사·규명하여 억울하게 숨져간 한인들의 넋을 달래야 할 것이다. 지난 2019년 8월 초에 방송된 KBS-1TV의 특집다큐 〈사할린, 광복은 오지 않았다〉를 취재한 이정훈 기자는 당시 취재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면서, “정부의 공식 보고서조차 오류가 있다”고 하였다. “당초 사할린 미즈호 마을 학살사건 희생자는 27명으로 알려졌는데, 소련군 재판기록을 확인해보니 35명가량 된다”고 밝혔다. 앞으로 진정한 한일우호관계의 회복을 위해서는 과거 일본 제국주의 침략세력의 한국 및 한국인에 대한 침탈과 각종 만행의 피해에 대한 객관적 사실 정립과 올바른 역사인식의 확산·제고가 필요하다. 특히 일본 우익세력의 학살만행 부정을 비판할 필요가 있다. 또 추후 국내외의 새로운 자료를 발굴·활용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침략과 강점기간에 자행된 대학살을 세계적·보편적 관점인 ‘제노사이드(Genocide, 대량학살)’의 관점에서 체계화하고 그 진상을 널리 전파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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