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편집실
올해는 동학농민운동과 3·1운동을 이끈 의암 손병희 선생이 순국한 지 100주기가 된 해이다. 이를 맞이하여 그의 업적과 정신을 기리는 추모 특별전이 현재 근현대사기념관에서 펼쳐지고 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근현대사기념관 정햇살 학예사에게 전시에 관한 궁금한 이야기를 묻고 들었다.

의암 손병희 사진
Q. 먼저 근현대사기념관을 소개해주세요.
서울 강북구에 자리한 근현대사기념관은 헌법정신의 요체인 자유·평등·민주의 이념이 단순히 외래의 소산이 아니라 선열들이 피땀 흘려 체득하고 축적해 온 소중한 가치임을 감동이 있는 서사로 전달함으로써, ‘독립운동가들이 꿈꾼 나라’ 그리고 ’사월혁명의 투사들이 소원했던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의 미래상임을 널리 알리고자 2016년 설립되었습니다.
Q. 이번 전시의 기획 취지가 궁금합니다.
동학농민운동과 3·1운동을 이끈 민족지도자 의암 손병희 선생 순국 100주기를 맞아 선생의 독립운동 업적과 정신을 조명하는 뜻깊은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선생의 일생을 조명하는 이번 전시는 종교인을 넘어 사상가이자 혁명가로서 시대를 이끌었던 선생의 참뜻을 다시 한번 되새겨보는 소중한 기회가 되길 바라며 기획하였습니다. 이번 전시는 서울시 강북구와 천도교중앙총부가 공동주최하고 국가보훈처와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 후원으로 민족문제연구소와 근현대사기념관이 주관하여 개최하였습니다.
Q. 의암 손병희 선생의 업적을 소개해주세요.
손병희 선생은 호서동학군 통령으로서 동학농민운동을 이끌었으며, 3·1운동의 정신적 지주로서 독립운동의 초석을 놓았습니다. 동학을 이어받아 천도교의 기반을 닦고 교리와 조직을 체계화하였으며, 나아가 언론·출판·교육을 통해 민족혼을 일깨우는 데 앞장섰습니다. 엄혹한 시대에 일신의 안일함보다는 조국과 민족의 장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진 선생의 업적은 현재까지 우리 후손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1 손병희가 49일 수련회를 개최할 때 사용한 가마솥과 독
2 손병희의 낙관
3 손병희의 장례식 사진
Q. 이번 전시에서 특별히 주목해야할 유물이 있나요?
이번 전시에서는 손병희 선생이 독립운동에 대비하여 봉황각에서 7회에 걸친 49일 수련회를 할 때 사용한 가마솥과 독을 비롯한 선생의 명함·낙관 등 다수의 귀한 유품과 선생의 가족사진·장례식사진 등을 공개합니다. 또한 천도교중앙총부가 소장한 동학·천도교 경전·동학 농민군 포고문·고시 등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민족문제연구소·독립기념관·고려대 박물관·동덕여대박물관 등이 소장한 3·1운동 당시의 각종 선언문과 사진 그리고 보성전문학교·동덕여학교 관련 사진과 문서 등 흥미 있는 자료들이 함께 전시됩니다.
Q. 전시와 연계된 강좌도 눈길을 끄는데요.
이번 전시와 연계하여 〈3·1운동을 이끈 민족지도자, 의암 손병희〉를 주제로 무료 특별강좌를 개설했습니다. 일반 시민과 학생을 대상으로 한 이번 강좌는 7월 16일까지 매주 토요일(총 5회)마다 근현대사기념관 2층 강의실에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강좌 신청은 근현대사기념관 홈페이지(www.mhmh.or.kr)와 전화(02-903-7580)로 문의하시면 됩니다. 역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의 참여를 기다리며, 더불어 이번 강좌뿐만 아니라 답사와 순회전시도 준비 중이오니 많은 기대 바랍니다.
Q. 관람객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나요?
오늘날 대한민국의 번영은 손병희 선생을 비롯한 수많은 애국선열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독립을 위해 노력했던 손병희 선생의 피와 땀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기는 계기가 되길 바라며, 선열들의 고귀한 유지를 받드는 소중한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전시는 9월 30일까지 진행되오니 많은 관심 바랍니다.
손병희(孫秉熙, 1861∼1922)
순국 100주기, 그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며

손병희(좌) / 천도교 간부들을 연성·수련시키기 위해 설립한 봉황각(우)
동학농민운동을 이끌다
손병희는 1861년 4월 8일 충북 청원군에서 아버지 손두흥과 어머니 경주 최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22세 때 동학에 입도하여 1894년 9월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호서동학군 통령으로 임명되어 전봉준과 함께 농민군을 이끌었다. 공주를 점령하기 위해 치른 이인전투에서는 승리하였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우금치전투에서 패배하였다. 이후 최시형으로부터 의암(義菴)이라는 도호를 받은 그는 1897년 12월 24일 동학의 종통을 이어받아 동학 3대 교조가 되었다. 교조가 된 후 전국을 돌아다니며 동학 재건에 노력하였다. 하지만 동학농민운동 실패 후 동학에 대한 탄압이 수그러들지 않자 세계사정을 살피고 동학교단 재건 구상을 위해 외유를 계획하였다.

일본 망명시절 동지들과 찍은 사진, 앞줄 오른쪽 두 번째 손병희 (1905)(좌) / 국내 최초의 대판형 신문 기관지 『만세보』(우)
천도교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펼치다
일본으로 망명 후 국정혁신과 사회개혁을 주장하는 갑진개혁운동을 추진하고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였다. 1906년 1월 귀국 후에는 천도교를 근대적 종단으로 쇄신 발전시켰다. 또한 일본에서 귀국할 때 인쇄시설을 들여와 천도교중앙총부 내에 인쇄소를 설치하여 출판언론운동과 민족교육운동에 힘썼다. 국내 최초의 대판형 신문인 기관지 『만세보』를 창간하는 한편 민족혼을 일깨우고 독립정신을 함양시키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교육임을 깨닫고 경영난에 처한 보성학교와 동덕여학교 등을 인수하여 운영하기도 하였다. 이후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국권 회복에 대한 결의를 다지며 천도교단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준비해 나갔다.

3·1독립선언서(좌) / 임종 전 손병희(우)
독립정신을 일깨우고 잠들다
1919년 민족대표 33인의 지도자로 3·1운동을 주도한 그는 “이번 거사는 조선의 신성한 유업을 계승하고 아래로 자손만대의 복락을 작흥하는 민족적 과업이다. 이 성스러운 과업은 제현의 충의에 의지하여 반드시 성취될 줄 믿어 의심치 않는다”라고 강조하며, 3·1운동이 성공적으로 전개하도록 당부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 기념식을 거행한 뒤 일제경찰에 체포된 그는 서대문감옥에서 투옥 중 병보석으로 출옥하여 치료받다가 1922년 5월 19일 만 61세의 나이로 운명하였다. 그의 유해는 서울 우이동에 있는 봉황각 옆에 안장되었으며,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로를 기리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