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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암동 학살의 참혹한 진상을

국제사회에 고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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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장세윤(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


일본군은 1920년 8월 소위 ‘간도지방 불령선인(不逞鮮人) 초토(剿討)계획’을 세우고 같은 해 10월 ‘훈춘사건’을 조작하여 소위 ‘간도출병’을 단행하였다. 이에 맞서 독립군의 ‘청산리 독립전쟁’이 전개되었다. 독립군에게 큰 피해를 입은 일본군은 결국 독립군 추적에 실패하고 난 뒤 1921년 5월까지 북간도 및 서간도 지방에서 대대적 학살만행을 저질렀다. 이를 ‘간도학살(경신참변, 간도참변)’이라고 한다. 당시 일제가 자행한 간도학살을 직접 목격한 의료선교사 스탠리 마틴은 한인들의 피해 상황을 조사·촬영한 뒤 일제의 만행을 국제사회에 폭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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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리 마틴(좌) / 간도학살에 희생된 동포들을 위한 합동 장례식(우)

일본군이 저지른 천인공노할 만행

강덕상·가지무라 히데키 편, 『현대사자료 28(조선 4)』(도쿄 미스즈서방, 1972)에는 ‘1920년 가을 중국 연변지역(북간도)에 출동한 일본군 제28여단이 이 지역에서 조선인 522명을 죽이고 조선인 가옥 534채를 불태웠는데, 재산 피해액은 66,850엔(원)으로 추정된다’는 통계를 낸 기록이 실려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은 인명 및 재산 피해가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이처럼 일본 군경의 천인공노할 만행에 의한 참혹한 탄압사례는 헤아릴 수조차 없다. 독립운동 후원이나 주도 혐의자를 총살하거나 전투 중이거나 도주한 자를 사살하였고, 군자금 모집이나 독립운동 혐의자를 참살(목을 베는 것) 및 자살(총칼로 찔러 죽이는 것)하였다. 또한 타살·고문·생매장·방화·약탈·강간 등 극히 잔인한 방법이 모두 동원되었다. 연길현 구사하에서 피난간 창동학교 교사 정기선을 체포하여 얼굴가죽을 벗겨내고 눈알을 빼서 서씨집 가족과 함께 묶은 뒤 집에 가두어놓고 불을 질러 태워 죽인 사례만 보아도 일제가 얼마나 참혹한 방법으로 우리 민족을 탄압하였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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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대적 한인학살이 벌어졌던 장암동(좌) / 일제의 간도학살 만행을 보도한 미국 신문기사 『시카고 데일리』(1920.12.11.)(우)

장암동 학살을 알린 스탠리 마틴

이 무렵 ‘제2의 제암리 학살사건’이라 할 수 있는 장암동 학살사건이 일어나 많은 내외국인을 놀라게 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수원 제암리 학살사건 현장을 직접 답사·조사하고 사진을 찍어 국내외에 널리 알린 스코필드 박사가 있었듯이, 1920년 10월 말의 중국 길림성 용정 장암동 학살사건 역시 당시 연변지역에서 의료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던 스탠리 마틴(Stanley H. Martin, 1890~1941)에 의해 진상의 일부가 국내외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캐나다인 장로교 선교사였던 마틴은 장암동참변 현장을 목격한 뒤 다음과 같이 기록하여 참혹한 진상을 널리 알렸다.

“10월 31일, 우리들은 찬랍파위촌(瓚拉巴威村, 장암동을 가리킴)에 사실을 알아보러 갔다. 목격자 증언에 따르면 (10월) 29일 새벽에 무장한 (일본군) 보병 한 부대는 이 기독교 마을을 포위하고 산적한 밀짚 위에 방화하며, 남자라면 노인과 어린이를 가리지 않고 집밖으로 끌어내어 다 사살하고, 채 죽지 않은 자는 불속에 집어넣고, 집안에서 울면서 이 비참한 광경을 보는 사자(死者)의 어머니와 처자의 가옥을 또 불질러 전 마을이 불타고 말았다. (중략) 잿더미 속에는 시체가 즐비하여서 우리들은 이 잿더미를 헤치고 노인의 시신을 보았는데, 몸에는 총탄자국이 여러군데 있고 몸은 벌써 다 타버리고 간신히 목만 붙어 있었다. 우리는 사진을 몇장 찍고 다른 데로 갔는데, 방화한 지 36시간이 지났는데도 시체타는 악취가 나고 지붕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중략) 내가 알고 있는 36개 촌에서만 피살자가 모두 140명이었다.”

이 사건 직후 일제 군부는 외국인 선교사들의 참상 폭로와 국내외 각지 전파를 우려하여, 중국 지방 관헌이나 연변의 용정지역에 있는 선교사들에게 일본군의 학살을 변명하는 각서를 보내거나 무마하는 후안무치한 조치를 단행하는 등 진상을 은폐하고 왜곡하기에 급급한 추태를 보였다.  그러한 내용은 「사이토 대좌에게 보내는 길림독군공서 공함 제288호」 및 「미즈마치 대좌가 용정촌 외국인 선교사에게 보내는 각서」, 『조선군사령부 간도출병사』에 상세히 수록되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는 1920년 10월 9일부터 11월 30일까지 중국 동북의 북간도와 서간도 일대에서 피살 3,469명(이 중 북간도 2,626명, 서간도 843명), 피체 170명·강간 71명·민가 전소 3,209건·학교 전소 36건·교회당 전소 36건·곡물 전소 5만 4,045석의 피해가 있었다고 집계하여 발표하였다(『독립신문』 87호, 1920.12.18). 그러나 일본군은 사살 494명·체포 707명으로 축소보고 했다. 한편 중국 당국은 피살 324명·재산피해 100만 원가량으로 조사하였다.

결국 일제 군경은 이러한 만행으로 한인사회를 초토화하여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없애는 데 일시적으로 성공한 듯 했다. 간도학살 후 일제의 무력탄압이 강화되면서 친일세력이 확산되고 일제 측의 한인 지배정책이 강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 한인들의 저항과 민족운동은 줄기차게 지속되어 일본 제국주의 세력을 괴롭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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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용정에 있던 푸트(W.R.Foote)  목사가 장암동 학살의 참변을 외부에  알리는 영문 편지(1920.10.30.)(좌) / 제창병원에서 진료 중인 스탠리 마틴(우)

스탠리 마틴의 업적을 기리다

스탠리 마틴은 캐나다 뉴펀들랜드의 세인트존스시에서 태어났다. 1916년 6월 온타리오에 있는 퀸즈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캐나다 장로회 소속 선교사로 한국에 파송되었다. 같은 해 중국 길림성 용정에서 제창(濟昌)병원 원장으로 의료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1919년 3월 13일 용정에서 펼쳐진 독립만세운동으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이들을 제창병원으로 옮겨 치료하고, 희생자들을 위해 장례를 치러줬다. 또 병원 및 부속 건물을 독립운동가들의 피신처 및 독립운동 선전물 인쇄장소 등으로 제공했다. 1920년 10월 말 북간도 간도학살 피해 지역을 방문해 한인들의 피해 상황을 조사·촬영했으며, 희생자 유족을 위로하는 예배를 열고 조의금을 전달했다. 더불어 보고서를 작성해서 캐나다 토론토시 장로교 전도본부에 전달하고, 토론토 그로브지에 보도하게 하는 등 일본제국주의 세력의 살상행위 등 만행을 국제사회에 폭로하였다.           

1927년 3월까지 제창병원장으로 재직하다가 서울 세브란스의전 흉부내과(호흡기 내과) 교수로 임용되었다. 1928년 최동·이용설 교수와 함께 한국 최초의 항결핵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활동하며 결핵 치료와 계몽활동에 노력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이듬해에 캐나다로 돌아간 후 1941년 심근경색으로 타계했다. 그의 외아들 역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1950년 9월 전사하고 말았다. 딸 마가렛 무어 역시 휴전 직후 남편과 함께 한국에 와서 1984년 귀국할 때까지 극작가 겸 연출가로 선교와 계몽에 많은 공을 세웠다. 1968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을 기리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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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 현장에 세워진장안동 참안 유지 기념비

일제 만행의 잔혹성과 야만성을 어떻게 해석·평가할 것인가

일제의 각종 만행과 학살을 단순히 일본인들의 잔인한 민족성으로 봐야하는가, 아니면 전쟁 상황이라는 특수한 상황 혹은 일본인들의 한인에 대한 차별적 인식이나 인종적 편견, 전통적으로 지속되어 오던 조선·조선인 멸시관 등으로 봐야할까. 일제 당국과 조선총독부의 차별·억압·수탈정책, 1931년 9월의 만주사변(9·18사변)과 중국 동북지방 침략, 1937년 중일전쟁 도발, 1941년 12월의 아시아태평양전쟁 도발 등으로 연속되는 전쟁 상황 즉 특수한 상황이라는 외부적·국제적 요인을 고려할 수 있지만, 다른 요인은 없었을까.        

미국의 저명한 문화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는 『국화와 칼 - 일본문화의 틀』(을유문화사, 2019)에서 일본인의 민족성을 위계서열 의식, 은혜와 보은, 그리고 의리에 대한 독특한 도덕 체계, 죄와 악에 대한 의식이 결여된 대신 수치심을 기본으로 하는 일본의 문화 체계로 설명하였다. 손에는 아름다운 국화, 허리에는 차가운 칼을 찬 이중성의 일본인으로 결론지었다. 물론 이러한 미국학자의 평가를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만, 일제의 한인학살 만행 등을 다각도로 조명하고 그 배경과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참고할 만한 의견이다.             

앞으로 일제강점기 및 그 전후시기에 자행된 일본 군경 및 기관·단체·민간인 차원에서의 다양한 한인학살 관련 자료 발굴 및 증언 채록을 해야하며, 한국정부 및 민간차원에서의 적극적 조사·연구·교육이 필요하다. 또 한·중·일·러·미국 등 여러 나라들의 국제적 연대와 협력을 모색해야하며, 학계의 공동연구 및 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희생자 추모 기념사업을 추진하는 등 다양한 대책을 적극 추진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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