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 편집실
중국 상하이 독립운동단체의 효시 동제사
동제사(同濟社)는 1912년 7월 4일, 신규식이 중국 상하이에서 조직한 최초의 한국 독립운동 단체이다. 신규식은 육군무관 출신으로 국내에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다가 1911년 3월에 상하이로 망명 후 동제사를 결성하였다. 신규식은 신해혁명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이후 많은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을 갈망하며 중국혁명운동의 근거지인 상하이지역으로 모여들었다. 신규식은 국내에서 계몽운동을 전개하여 명성을 떨쳤던 박은식이 만주를 거쳐 상하이로 오자 그와 더불어 애국지사를 결집하여 민족운동을 추진할 단체결성을 추진하였다.
동제사라는 명칭은 ‘동주공제(同舟共濟)’를 줄인 말로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같은 배를 타고 피안(彼岸)에 도달하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진정한 설립 목표는 국권회복에 두었다. 본부는 상하이에 두었으며, 베이징·톈진·만주 등 중국지역과 미주·일본에 지사를 두었다. 상하이로 망명하는 독립지사와 이주하는 동포 수가 증가함에 따라 조직은 점차 확대되어 명실상부한 독립운동단체로 성장하였다. 동제사는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중국 내 독립지사들의 구심체 역할을 하였다. 신규식이 순국한 1922년 9월 이후의 활동은 알려지지 않았다.
신규식의 상하이 거주지
1911년 신규식이 상하이 망명 후 거주 및 활동했던 건물이다.(2016년 촬영)
주소 : 상하이 황푸구 남창로 100롱 5호
동제사를 함께 이끈 신규식과 신건식
신규식은 1880년 2월 22일 충북 문의군 동면 계산리에서 태어났다. 1900년 9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여 전술학·군제학·병기학 등 다양한 신학문을 접하였다.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한 뒤 1902년 7월 육군보병참위에 임관되어 문무를 겸비하고 근대문물과 사상을 습득하였다. 1905년 일제에 의한 을사늑결 소식에 의병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음독자결을 시도하였고, 이 사건으로 오른쪽 시신경이 마비되고 말았다. 이후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재차 음독자결을 시도했으나, 대종교 종사 나철에 의해 목숨을 건졌다. 이듬해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신정(申檉)으로 개명하고 쑨원(孫文)이 이끄는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에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가맹한 뒤 10월 무창의거에 참가하여 신해혁명에 공헌하였다. 1912년에는 동제사를 조직하여 이사장이 된 그는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자 법무총장으로, 그 후 다시 총리대리로 외무총장을 겸직하였다. 이후 1922년 3월에 모두 사직하고 병으로 요양하다가 9월 25일 사망하였다. 신건식은 신규식의 10살 아래 동생으로 동제사에 가입한 이래 지속해서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1921년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압록강에서 헌병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으로 불구의 몸이 되었다. 1922년 병보석으로 신의주감옥에서 출소한 후 상하이로 탈출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신규식·신건식 집터
당시 주소는 '충북 문의군 동면 계산리'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 신건호(인차2리 거주, 63세)의 증언에 의해 청원군 가덕면 인차리로 위치를 확정하였다.
위치고증 : 「신규식 공적조서」와 「신건식 공적조서」에 기록된 본적지를 통해 위치를 확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