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

중국 상하이의 최초 한국인 독립운동 단체 

‘동제사’에 참여한 

김갑·민제호·한흥교

이달의 독립운동가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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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상하이의 와이탄(外滩) 전경

신규식을 중심으로 조직된 동제사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독립운동가들은 국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이어 나갔다. 1912년 중국 상하이에서 신규식을 중심으로 박은식·신채호·조소앙·김규식 등은 독립운동 뜻을 함께하며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였다. 상하이 최초 독립운동단체 동제사는 중국혁명인사들과 교류하며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를 결성하기도 하고, 상하이의 한국유학생들을 위해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세워 청년교육에 앞장섰다. 이후 동제사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는 임시정부의 여러 직책을 역임하거나 지원하면서 독립운동을 이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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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식(좌) / 「동제사 창립 취지문」 _1914 독립기념관 소장(우)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에 헌신한 김갑

김갑은 1889년 부산 동래에서 출생하였고 본명은 김진원(金瑨源)이다. 경상도 지역의 첫 비밀결사인 대동청년단에 참여하였던 그는 상하이로 망명 후 동제사 회원이 되었다. 그리고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수립되자,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경상도 대표의원(’19년)·노동총판(’25년)·재무장(’27년) 등을 역임하며 독립운동을 이어 나갔다. 1930년에는 김구·조완구·엄항섭·이시영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하여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그는 1933년 44세의 젊은 나이로 서거하는데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민장으로 애도하였다. 정부는 김갑의 공적을 기려 1986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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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좌) / 김갑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장에 선임됨을 알리는 기사, 「임정소식」『신한민보』_1927.12.22(우)

다방면으로 임시정부를 지원한 민제호

민제호는 1890년 서울 종로에서 출생하였고 민우명(閔禹明)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1913년 상하이로 망명한 민제호는 동제사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제2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된 그는 임시정부 운영자금을 위해 경기도 모집위원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부터 1929년까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내며 대한적십자회·상하이 대한인 거류민단을 통해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1932년 윤봉길 의거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같이 피신하였다. 그러던 중 병을 얻어 1932년 42세의 나이로 항저우에서 서거하였다. 정부는 민제호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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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제호가 참여한 대한적십자회 관련 기사,『신한민보』 _1920.4.16(좌) / 민제호가 참여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련 기사, 「선언문」 『신한민보』 _1921.4.21(우)

의료활동으로 독립운동을 펼친 한흥교

한흥교는 1885년 부산에서 출생하였고 한진산(韓震山, 韓辰山) 또는 한생(恨生)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그는 일본 오카야마(岡山)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1911년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신해혁명에 적극 참여하던 한흥교는 중화민국 육군 군의정(軍醫正)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또한 1912년 신규식·조성환 등과 함께 동제사 조직에 참여하면서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의료를 도맡았다. 1935년부터 광복될 때까지 산시성 타이위안에서 대동병원을 운영하며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광복 후 고국으로 돌아와 의료활동을 이어 나간 그는 1967년 82세로 서거하였다. 정부는 한흥교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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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흥교가 중국 신해혁명에서 세운 공로로 받은 훈장_1911 한종수 소장 / 중국육군 군의 시절 한흥교 _한종수 소장

한흥교 가족사진(오른쪽 한흥교)_독립기념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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