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형목(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1919년 4월 4일부터 9일까지 이어진 양양 만세운동은 강원도 내에서 최대 규모로 펼쳐진 치열하고도 격렬했던 만세운동으로 기억된다. 당시 조화벽은 독립선언서 필사본을 버선 속에 감춰 양양지역 청년지도자들에게 전달하였고 이로써 양양 장터에서 독립을 외치는 만세함성이 크게 울려 퍼질 수 있었다. 훗날 유관순의 오빠 유우석과 결혼하여 평생 독립운동과 백성교육에 헌신한 그의 뜨거웠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조화벽과 유우석
조화벽, 식민지배의 모순을 인식하다
조화벽은 1895년 강원도 양양 감리교회 전도사 조영순과 어머니 전미흠 사이에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감리교회는 1901년 10월 하디(R.A.Hardie) 선교사에 의해 강원도에 최초로 설립되었다. 영동지역은 전통적으로 유림세력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화벽은 개신교 전래에 의한 부모님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남녀동등권을 인식하였다. 곧 개방적인 가정생활과 엄격한 신앙생활은 전통적인 가치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밑거름이었다. 부모님은 신학문을 배우려는 그를 선교사들에 의해 여성교육이 일찍이 이루어지던 함경도 원산으로 유학을 보냈다.
성경학원과 루씨여학교에서 배운 다양한 교과목은 식민지배의 모순을 인식하게 하였다. 루씨여학교는 감리교 선교사들이 세운 이화·배화·숭의·호수돈여학교 등과 함께 기독교계를 대표하는 명문사립학교였다. 당시 중등교육을 받은 여학생은 매우 희소한 여성지식인 집단이었다. 일제강점기 농촌계몽운동을 담은 심훈 『상록수』의 주인공 최용신을 묘사한 내용이 이러한 사실을 방증한다. 화벽은 개성 호수돈여학교 보통과와 고등과에서 수학하던 중 3월 3일 개성지역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는 자신의 인생항로를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양양 만세운동에 불을 지피다
조화벽은 호수돈여학교 비밀결사대 활동을 시작으로 항일운동에 직접 참여했다. 주요 구성원은 그를 비롯한 조숙경·김정숙·이경지 등이었다. 화벽은 그중 어윤희·권애라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한편 태극기 등을 기숙사 기도실에서 만들었다. 이들은 기도회를 마치고 삼삼오오 모여 거리에 나섰다. 시위대는 ‘찬미가’와 ‘독립가’를 부르며 독립만세를 외쳤고, 시민들도 가세하여 시위군중은 1,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현장과 기숙사 등에서 체포된 이들은 일제 헌병대에 끌려가 상상을 초월한 고문을 받았다. 다행히 군수와 학교 당국의 설득으로 여학생 대부분은 석방되었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만세운동을 저지하고자 중등학교에 휴교령을 내렸고, 많은 학생들은 귀향하게 되었다. 이는 오히려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결정적인 계기로 이어졌다.
독립선언서 필사본을 버선에 넣은 화벽은 원산을 거쳐 양양 대포항을 통해 고향으로 돌아갔다. 일제경찰은 그를 관사로 끌고 가서 심문하였으나 그의 소지품에서 다행히 독립선언서가 발견되지 않았다. 화벽은 독립선언서를 교인 김필선에게 전달하였고, 이는 양양 만세운동의 불씨가 되었다. 양양지역 만세운동은 유교세력과 기독교세력·현산학교·양양보통학교 졸업생 등이 주축이었다. 농민들은 농악대를 앞세우고 주민들 참여를 독려하였다. 화벽은 목사와 교회 청년들과 여러 차례 회합을 통하여 다양한 세력의 중재·통합을 성사시켰다. 군수와 일제경찰은 이러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경계와 감시를 강화하였다. 4월 4일 양양 장날에 장꾼을 가장한 주민들은 장터로 모여들었다. 이후 9일까지 치열한 만세시위가 전개된 후 5월 9일까지 군내로 확산되었다.
유관순 일가와 인연을 맺다
검거선풍이 강화되는 가운데 피신한 화벽은 그해 가을 호수돈여학교 졸업 후 공주 영명여학교 교사가 되었다. 여기에서 천안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의 주역인 유관순과 그의 오빠인 유우석을 만나 영원한 만남을 시작하였다. 화벽은 당시 공주 영명여학교 교감이었던 황인식 집에 같이 살고 있던 유관순 동생 인석과 관석을 보살피는 한편 훗날 유우석의 옥바라지도 정성을 다했다. 1923년 조화벽과 유우석은 백년가약을 맺어 부부로 탄생하였고, 이리하여 양양의 조화벽과 천안의 유관순은 올케와 시누이로 인연을 맺었다. 결혼 후 화벽은 호수돈여학교를 거쳐 원산 진성여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활동근거지를 원산으로 옮겼다.
1932년 고향 양양으로 다시 돌아간 화벽은 남편과 함께 문맹퇴치를 위해 양양교회에서 운영하던 정명학원 교사로 활동하였다. 일제가 강제로 폐교시킨 1944년까지 무산 청소년들에게 새로운 배움터를 제공했다. 식민지 노예교육에 맞선 교육활동은 학생들에게 자존감을 높이는 든든한 기반이었다. 또한 양양부인상회 발기인 모임에서 이사로 참여하는 등 사회활동을 지속한 그는 이때 중풍으로 전신마비가 된 어머니를 12년간 지극정성으로 모시며 삼 형제를 길렀다.

공주 영명학교 기숙사 터
유우석, 공주 만세운동에 나서다
유우석은 1899년 아우내장터 만세운동 주역인 유중권과 이소제 사이에 3남 2녀 중 장남으로 천안군 동면 용두리에서 태어났다. 다른 이름은 준석·관옥으로 유관순의 오빠이다. 그는 감리교회가 운영하던 장명학교를 졸업한 후 교사 김구응의 주선으로 공주 영명학교에 재학 중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영명학교는 영명여학교와 더불어 충남지역을 대표하는 기독교계 사립학교였다. 공주에서는 3월 12일과 15일에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자극받은 영명학교 교사 김관회·이규상·현언동, 졸업생 김사현, 재학생 오익표·안성호, 목사 현석칠·안창호 등은 3월 24일 밤 영명학교 사택에 모였다. 이들은 4월 1일의 공주읍 장날을 이용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때 우석은 학생대표로서 3월 30일 영명학교 조수 김수철의 집에서 노명우·강윤·윤봉균 등과 만나 독립만세운동 계획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튿날 이들과 함께 기숙사에서 독립선언서 1,000여 매를 등사하고 대형 태극기 4개를 만들었다.
4월 1일 오후 2시 우석은 학생들과 함께 장터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군중에게 나누어 주고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며 읍내로 파급되자 여학생들도 동참하는 등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일제 기마경찰은 군중을 강제로 해산시키려는 기세였다. 우석은 노명우와 함께 말고삐를 잡아채 일제경찰을 끌어내려 발길로 걷어차 실신시켰고, 현장을 본 다른 일제경찰은 우석을 칼로 후려쳤다. 간수들은 시위 당시에 입은 부상으로 법정에 걸어갈 수 없던 우석을 인력거에 태워 법정에 세웠다. 공주검사국으로 송치된 그는 이때 동생 유관순을 잠시 만나기도 했다. 이후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 형·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경성법학전문학교 전경(1911)
사회운동과 사상운동을 병행하다
유우석은 출옥 후 배재학당에 편입하였고 이어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재학 중 조국수호회를 조직해 활동하다가 구금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퇴학당하여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화벽과 결혼 후 활동근거지를 강원도 양양과 함경도 원산 등지로 옮긴 그는 1926년 이향·조시원·김연창·한하연 등과 비밀결사체인 본능아연맹을 만들어 사상운동에 나섰다. 당시 공산주의 계열의 북풍회·화요회 등 각 분파는 세력 확장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주하·김삼룡·강기덕·장기욱 등이 원산과 서울을 빈번히 왕래함으로 일촉즉발할 분위기였다. 충돌의 도화선은 본능아연맹과 원산청년회 사이에 경리장부사건, 원산여자청년회에서 개최한 강연회 내용 등에서 비롯되었다. 본능아연맹의 공격을 받은 서수학이 중상을 입고 응급치료를 받다가 사망했다. 우석은 상해치사 혐의로 구속되어 함흥지방법원에서 3년 형을 선고받았고, 1928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정당방위로 판명되어 무죄가 선고되었다. 장기욱이 고소한 상해죄부분은 유죄가 인정되어 벌금 30원의 판결을 받았다. 이후에도 원산청년당 추진을 저지하려는 본능아연맹과 여러 차례의 연쇄적 충돌로 일제경찰의 개입을 초래하였다. 그는 이후 양양·강릉 등지 영동지역을 연합한 설악회를 조직해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구속되었다. 조국광복을 향한 열정은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으로 이어졌으나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다.
우석은 여성권익 옹호를 위한 활동에도 나섰고, 노동자 권익 향상에도 참여하는 등 사회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 또한 해상상구회 부회장으로 해상승조원의 자구책을 위한 여러 방안을 모색하였으며, 원산의 대표적인 석산유치원이 경영난에 직면하자 후원회원으로서 활동했다. 이는 어린이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부부가 함께 민주주의 수호에 앞장서다
광복 후에도 부부는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일본군에 징집된 아들 유제충이 돌아오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더욱이 광복은 이들이 바라는 방향과 달리 진행되었다.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 지도를 펼쳐놓고 38선을 그었고, 양양도 두 토막이 나고 말았다. 이는 분단체제 고착과 더불어 이념적인 갈등을 증폭시켰다. 부부는 소련군의 박해를 받다가 결국 월남하여 서울에서 건국사업에 나섰다.
우석은 대한노동총연맹 위원장·전국혁명자총연맹 중앙집행위원·통일독립운동자 중앙협의회 간사·유도회청년회 총본부장·순국선열유족회 회장·독립노동당 부위원장 등을 맡았다. 자유롭고 통일된 대한민국 건설을 바라는 그의 심정과 달리 남북분단은 우리의 가장 비극적인 한국전쟁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유유우석은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을 전개하다가 1968년 5월 28일 사망했고, 동지들은 예총회관 광장에서 사회장을 거행했다. 정부는 그의 공을 기려 1982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조화벽 역시 건국사업을 위한 사회활동을 이어갔다. 임영신·박마리아 등과 함께 여성 권익옹호에 앞장섰다. 전쟁 중 막내아들 유제인을 폐렴으로 잃은 이후 서울 성북구 정릉 미아중앙교회에서 여선교회 회장으로 봉사하다가 1975년 9월 5일 사망했다. 며느리 김정애(전 3·1여성동지회장)는 “정신보다 물질에 대한 갈급증으로 목 타는 세상에서 참사람이자 참어른인 조화벽이라는 존재가 새삼 그립다.”고 회상했다. 정부는 그의 공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오늘날 조화벽은 춘천의 윤희순, 철원의 곽진근과 함께 강원도의 3대 여성독립운동가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