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숨결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
충남 부여

글·사진 임운석 여행작가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
충남 부여
충남 부여 사람들은 금강을 백마강이라 부른다. ‘백제에서 가장 큰 강’이란 뜻이다. 백마강은 백제의 마지막 수도인 사비성이 있던 부소산을 휘감아 돈다. 삼천궁녀로 잘 알려진 부소산 낙화암에 오르면 백제의 눈물이 흐르듯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백마강의 유구한 흐름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지금은 유모차가 다닐 수 있는 산책로로 가꾸어졌지만 분명코 백제의 역사가 부소산 곳곳에 흩어져 있다.

백제문화단지에 가면 사비성의 문화적 우월성을 느낄 수 있다
부흥과 패망이 교차하는 곳
백제는 위례성을 첫 도읍지로 정한 뒤 웅진성을 거쳐 사비성을 세 번째 도읍지(백제 성왕 16년(538))로 건설했다. 사비성이 왕조의 마지막 도읍지가 될 거라는 사실은 누구도 알지 못했을 게다.
부여 여행에서 빼놓지 말아야 할 곳이 국립부여박물관이다. 여러 전시물을 통해서 역사의 큰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꿸 수 있기 때문이다. 박물관은 4개의 전시실로 나뉘며 전시유물만 1천여 점이 넘는다. 그중 백미는 백제 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이다. 이것은 사비시대를 대표하는 유물로서 1993년 부여 능산리에서 출토됐다. 아래에는 용이 연꽃 봉우리를 물고 있고 위에는 봉황이 가슴을 한껏 부풀려 위엄을 과시한다. 백제 장인들의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엿볼 수 있는 최고의 수작이다.
박물관을 나와 백제초등학교를 따라 돌아가면 정림사지에 이른다. 정림사지는 사비도성의 중앙에 위치했던 절터다. 도심에 세워진 절로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꼽힌다. 현재 남은 것은 연지와 8.3m에 이르는 5층 석탑, 그리고 석불좌상 등이다. 넓은 부지에 덩그러니 홀로 선 석탑이 폐망한 왕조의 멈춰버린 시계추를 보는 것처럼 비탄하다. 매표소 오른쪽에는 정림사지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 정림사지박물관이 있다.
정림사지에서 500m 거리에 부소산성이 있다. 부여의 중심에 자리한 부소산은 106m의 나지막한 산이지만 산성이 축조될 만큼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하지만 전쟁이 없는 평소에는 왕실 정원으로 사용되어 왕자들의 휴식처라는 뜻의 ‘태자골’이라 불렸다. 백제 성왕(?~554)이 538년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하면서 쌓은 토성과 통일신라 때 성을 에워싸고 연결해 다시 쌓은 토성이 남아 있다. 산 정상부에 오르면 백마강이 한눈에 펼쳐지고 부여 읍내를 발아래 둘만큼 조망이 좋다.

멈춰버린 시계를 보는 듯한 정림사지5층석탑

역사의 흔적을 밟으며 걷는 산책
부소산 산책은 부소산문에서 출발한다.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가 우거진 부소산은 맑은 공기와 시원한 풍경이 인심 넉넉한 부여 사람의 모습을 빼닮은 넉넉한 공원이다. 산책로를 따라 들어서서 왼편으로 향하면 부여동헌과 부여객사가 있다. 백제 땅에 조선인이 터를 잡았는데 5칸짜리 동헌이 큰형님 집에 더부살이하듯 조심스럽게 자리를 펴고 앉았다. 산성이라고 해서 산능선을 따라 걷는 길이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유모차를 밀고 온 사람도 보이고, 엄마 아빠 손을 잡고 온 아이도 있다. 그만큼 길이 수월하고 걷기 좋다.
삼충사에서 발길이 멈춘다. 백제의 세 충신인 성충, 흥수, 계백을 기리는 사당이다. 일제 말기 조선총독부는 현재 삼충사 터에 일본 왕이 직접 참배하는 214천㎡ (6만5천여 평)에 이르는 ‘부여신궁’을 지을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부여에 도쿄 신궁과 비슷한 규모의 신궁을 지어 ‘황민화 작업’에 박차를 가하려는 의도였다. 공사가 한창 진행되던 중 독립을 맞이했고 결과적으로 신궁공사는 중단되었다. 천만다행이다. 이후 1957년 그 터에 삼충사를 지었다. 삼충신 중에서 흥수는 나당연합군이 공격해오자 백제의 멸망을 예견하듯 백마강과 지금의 옥천군 식장산 주변인 탄현을 지킬 것을 간청하였다. 하지만 돌아온 결과는 왕과 대신들의 외면뿐이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계백 장군은 황산벌(오늘날 논산)에서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결론적으로 당나라는 백마강을, 신라는 탄현을 함락함으로써 백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터만 남아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어
삼충사를 돌아보고 다시 산책로를 따라나선다. 이어 도착한 영일루 터에는 원래 계룡산 연천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던 영일대가 있었다. 지금 것은 조선 고종 때 세운 관아문 ‘집홍정’으로 1964년에 이곳으로 옮긴 뒤 영일루라 부른다. 누각 안쪽에 걸린 ‘인빈출일(寅賓出日)’ 현판은 ‘삼가 공경하는 마음으로 해를 맞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주변에 잡목이 많아서 일출을 볼 수 없다. 영일루에서 몇 걸음 안 가 군창지가 보인다. 군대에서 쓸 식량을 비축해두었던 창고 터로 부소산성의 중심부에 해당한다. 소나무가 우거져 옛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부소산은 백제 때 ‘솔뫼’라고 부를 정도로 소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지금도 오래된 소나무가 하늘을 향해 높게 자라고 있지만 백제시대의 나무가 아니다. 백제가 멸망할 때 부여는 7일 동안 화염에 휩싸였다고 한다. 부소산의 소나무도 그때 모두 타버렸다가 이후 북미산 리기다소나무와 한국산 소나무를 심어 지금처럼 다시 울창해졌다.
부소산을 걷다 보면 군데군데 흙더미가 길게 이어진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토성의 흔적이다. 부소산성은 군창지와 사자루의 산봉우리를 머리띠를 두르듯 쌓은 테뫼식 산성과 이를 둘러싸고 있는 포곡식 산성이 혼합된 복합식 산성이다. 포곡식 산성만이 백제시대의 것이고, 나머지 두 테뫼식 산성은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눈 덮인 구릉을 따라 수혈병영지와 반월루가 모습을 드러낸다. 반월루는 일출을 보던 영일루와 정반대 방향에 있다. 누각에 서면 부여 읍내와 구들래 들판, 백마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잡목에 가린 영일루의 풍경과 비교된다. 멸망한 왕조의 안타까움 때문일까. 빛과 생명의 상징인 일출보다 어둠의 이미지가 강한 달을 더 잘 볼 수 있으니 말이다.

낙화암 위쪽 절벽 봉우리에 있는 백화정
절개를 지킨 백제여인들을 기리기 위한 정자다
백마강이 한눈에, 낙화암 백화정에 오르다
낙화암 앞에 서면 누구나 의자왕(?~660)과 삼천궁녀를 떠올린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의자왕은 삼천궁녀와 놀아난 방탕한 왕이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역사의식이 낳은 결과물이다. 즉, 삼국을 통일한 승전국인 신라의 입장에서 역사를 기술한 결과 정치적 논리에 의해 의자왕을 폄하했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공통된 입장이다. 「삼국사기」는 의자왕에 대해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가 있어 사람들이 해동의 증자라 일컬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집권 초기 외교와 군사력을 안정시키고 권력 기반을 다져 민심을 얻었다고 한다.
삼천궁녀 역시 근거 없이 조작된 것이란 주장이 지배적이다. 나당연합군에게 패해 수도가 함락되자 적군에게 쫓긴 부여의 수많은 여인이 부소산 정상으로 도망쳐 지금의 낙화암에서 백마강으로 뛰어내렸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낙화암을 찾는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달빛 어린 낙화암의 그늘 속에서 불러보자 삼천궁녀를~’ 하고 <백마강>을 흥얼거린다. 낙화암 정상에는 1929년에 세운 백화정이 있다. 강물 소리를 따라 더 내려가면 고란사와 백제 임금이 고란초를 띄워 마셨다는 고란약수가 있다. 약수를 마시면 3년 젊어진다고 해서일까. 많은 사람이 두세 번은 족히 마신다. 발길을 돌려 부소산 서문으로 내려와 구드레나루터까지 다녀오면 부소산 산책이 마무리된다.

부소산성은 어린아이를 동반한 가족여행객들도 충분히 산책하듯 거닐 수 있다.
부활한 백제를 만나다
백제문화단지는 1400여 년 전 백제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역사복합문화단지다. 조성기간만 17년이 걸렸으니볼거리와 체험거리가 무궁무진한 것은 당연할 터. 매표소를 지나면 백제 사비궁의 정전인 천정전과 서궁, 동궁이 펼쳐진다. 천정전은 왕의 즉위의례, 신년 행사 등 굵직굵직한 국가의식을 거행하던 곳이라서 그런지 위엄이 넘친다. 지금껏 봐왔던 조선의 궁궐과 다르게 화려한 것이 특징이다. 서궁의 무덕전에서는 백제시대 복식을 체험해볼 수 있다. 왕이 입던 용포와 장군의 갑옷, 문관이 입던 옷 등 다양한 복식이 준비되어 있다. 사비궁 오른쪽에는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백제 위덕왕(525∼598)14년에 창건한 절이 있다. 경내에는 대웅전과 오층목탑 등이 복원되어 있는데 목탑의 높이는 38m에 이른다.
백제문화단지에는 백제인들의 실생활을 살펴볼수 있다. 사비궁을 지나 언덕 아래에 조성된 생활문화마을과 위례성마을이 그곳이다. 귀족 가옥은 황산별 전투로 잘 알려진 계백장군의 집을 재현해 놓았다. 서민들가옥에서는 염색, 목공, 압화 등 체험거리가 다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