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오늘 세계의 그날

1945년 연대기

1945년 연대기



글 강응천 기획집단 문사철 대표, 역사저술가


1945년 연대기





인류가 이겼다. 사상 최악의 반인륜 범죄 집단을 이끌고 광기의 전쟁을 일으킨 독일과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렸다. 대량살상무기를 동원한 전쟁이 어떤 정치적 목적에도 복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인류는 평화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새로운 세계 질서를 설계해 나갔다. 그러한 설계도의 한쪽 구석에는 36년의 일제 식민 지배로부터 벗어난 한국의 미래도 자리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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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 조선총독부 앞 풍경



독일과 일본의 항복

1943년 11월 이란의 테헤란에 모인 미국·영국·소련 등 연합국은 스탈린의 주장에 따라 북프랑스 상륙작전에 합의했다. 이듬해 6월 미국 아이젠하워 장군이 이끄는 연합군은 프랑스의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 독일의 점령 아래 놓여 있던 프랑스를 수복해 나갔다. 소련도 동부전선에서 나치 독일을 거세게 밀어붙였다.

전세가 기울어가는 가운데 연합국 수뇌들은 전후 처리 문제를 더욱 긴밀하게 논의해 나갔다. 논의의 초점은 두 차례나 전쟁을 도발한 독일이 다시는 전쟁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방안과 아직도 항복하지 않고 있는 일본을 어떻게 제압할 것인가로 모아졌다. 1945년 2월 크림반도의 얄타에 모인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처칠 영국 수상, 스탈린 소련 원수는 큰 틀에서 합의점을 찾았다. 전쟁을 일으킨 독일의 영토를 축소할 뿐 아니라 동독과 서독으로 분할해 전쟁 능력 자체를 영원히 제거한다는 것이었다. 또 독일이 항복한 뒤에는 소련이 병력을 동쪽으로 돌려 아시아에서 일본과의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막대한 물량을 보유한 미국은 서부 전선에 무제한 폭격을 가하면서 베를린으로 압박해 들어갔고, 소련도 반대편에서 베를린을 항해 진격했다. 1945년 4월 말, 양국 군대는 중부 유럽의 엘베강에서 만나 하이파이브를 주고받았다. 그해 5월, 독일에게 더 이상 희망이 없음을 확인한 히틀러는 베를린 관저 지하에서 자살함으로써 전쟁 범죄의 책임을 회피했다. 독일은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연합국은 얄타협정에 따라 항복한 독일을 동서로 나누고 서쪽은 미군, 동쪽은 소련군이 맡아 독일군을 무장해제시켜 나갔다. 또 동쪽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소련군이 만주와 한반도를 향해 남하할 준비를 진행시켰다. 

태평양전쟁 초기에 승승장구하던 일본의 기세가 결정적으로 꺾이게 된 계기는 미드웨이해전이었다. 일본은 진주만 공격으로 기선을 제압한 상태에서 미국의 해군력을 초토화하기 위해 태평양 한가운데 있는 미드웨이 해군기지를 총공격했다. 이 공격에는 항공모함 4척과 소형 항공모함 3척, 수상 비행기를 탑재한 항공모함 2척, 전함 11척, 순양함 15척, 구축함 44척, 잠수함 15척 등 진주만 공격 때보다 훨씬 많은 군사력이 동원됐다. 그러나 일본이 이 운명의 해전에서 대패함에 따라 전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1945년 7월 26일 독일의 포츠담에 모인 미·영·중·소 수뇌들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권고했다. 일본이 이를 거부하자 미국은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사흘 뒤에는 소련군이 만주와 한반도의 일본군을 공격하기 시작하고, 미국은 나가사키에 또 한 방의 원자폭탄을 떨어뜨렸다. 나가사키에서만 4만 명이 죽고 도시의 절반이 파괴되었다. 사망자가 10만 명에 이를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자 전 세계는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원자폭탄의 가공할 위력에 전율했다.

미국의 원자폭탄 공격으로 일본은 사실상 전쟁을 수행할 능력을 상실했다. 일본이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없게 된 또 하나의 원인은 소련의 대일전 참전이었다. 소련군은 파죽지세로 연해주를 넘어 한국과 만주의 국경 지대뿐 아니라 동해상에서 청진, 원산 등의 항구에 맹렬한 폭격을 퍼부었다. 독일이 이미 항복해 연합국의 모든 병력이 일본을 겨냥하고 있는 상황도 일본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일본 수뇌부는 항복을 결정하고 연합국과 막후교섭에 들어갔다. 한·중·일 3국의 입장에서 볼 때는 1931년 만주침략으로 시작된 ‘15년전쟁’이 막을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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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전함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을 하고 있는 일본 외상



절대무기의 등장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인류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실전 투하된 원자폭탄은 그로부터 불과 20여 일 전인 1945년 7월 16일 탄생했다. 그날 미국의 뉴멕시코주 로스앨러모스에서 세계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이 성공했다. 실험에 참여한 물리학자 페르미는 원자탄의 엄청난 위력에 놀라면서도 “핵폭발 순간에 천 개의 태양보다 밝다”라며 감격했다고 한다.

맨해튼계획으로 불린 원자폭탄 실험은 그동안 진행돼온 각국의 핵 개발 경쟁의 산물이었다. 원자폭탄 개발은 1938년 독일 과학자 오토 한이 우라늄 핵의 연쇄 반응을 발견하면서 시작되었다.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각국은 물리학자들을 동원해 핵분열을 무기 개발에 이용하기 위한 연구 작업에 뛰어들었다. 먼저 독일이 하이젠베르크를 주축으로 우라늄협회를 결성했다. 영국도 1940년 모드위원회를 신설해 핵무기 개발에 착수했다. 미국은 독일이 원자탄을 개발할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뒤늦게 개발에 합류했다. 1942년 6월 미국은 수많은 과학자와 기술자를 동원해 맨해튼계획을 비밀리에 신속히 추진시켰다. 미 육군의 그로브스 장군이 계획의 총책임을, 로렌스와 콤프턴이 과학 기술 부문의 책임을 맡았다.

단 며칠 사이에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원자폭탄은 이처럼 세계 최고의 두뇌들이 집결한 첨단 과학 연구의 산물이었다. ‘절대무기’의 등장은 인류가 다시는 세계대전을 일으키지 말아야 할 절대 이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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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9일 일본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 당시 모습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전쟁

제2차 세계대전 참가국은 연합국 측 49개국, 동맹국 측 8개국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광복군이 국내진공작전을 개시하기 직전에 일본군이 항복해 승전국 자격을 인정받지 못했다. 중립국은 스위스 등 6개국이었다.

60개국에 육박하는 참전국이 동원한 병력은 총 1억 1,000만 명에 이르고, 그 가운데 2,700만 명이 죽었다. 놀라운 것은 민간인 희생자도 그에 못지않게 많다는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과 비교해 동원 병력은 약 2배, 전사자는 약 5배, 민간인 희생자는 약 50배에 이르렀다. 유럽에서는 사생결단의 혈전을 벌인 독일과 소련의 희생자가 가장 많았다. 특히 소련은 민간인을 포함한 사망자가 2,000만 명(전사자 1,360만 명)으로 전 인구의 약 1/10을 잃었다. 독일인 사망자는 550만 명(전사자 500만 명)으로 역시 전 인구의 약 1/10에 이르렀다. 일본은 250만 명(전사자 185만 명)으로 전 인구의 약 1/40을 잃고, 중국인은 1,300만 명이 죽었다.

이러한 통계를 볼 때 제2차 세계대전의 가장 큰 특징은 민간인 희생자가 두드러지게 많다는 점이다.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나치스의 인종주의였다. 민간인 희생자 가운데 유대인이 약 500만 명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 숫자는 나치스의 지배를 받은 유대인의 약 70%에 해당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총력전 개념이 등장하면서 전쟁이 민간인을 배제하지 않는 대량 살육전으로 비화한 것을 꼽을 수 있다. 유럽 각국과 미국이 과학 기술에 많은 투자를 하고 군수산업을 육성한 결과 원자폭탄을 비롯해 가공할 살상력을 지닌 폭탄과 탱크, 전투기 등이 쏟아져 나왔다. 그로 인해 대량 살육의 피해는 더욱 증폭되었다. 주택과 산업 시설 등 재산상의 피해는 미처 헤아리기 어려운 천문학적 규모에 이르렀다. 승전국과 패전국을 가리지 않고 발생하는 이 같은 피해 상황을 보고도 누가 전쟁을 통해 정치적 목적을 이루려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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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된독일 베를린 거리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1944년, 미국 연합국과 소련을 포함한 44개국 대표들이 뉴햄프셔주 브레턴우즈에 모였다. 1930년 이래 각국이 평가절하 경쟁을 벌이는 바람에 야기된 통화 가치의 불안정을 해소하기 위한 회의였다. 44개국 대표들은 전후 세계 금융 질서를 새로 세우기 위한 국제 통화 제도를 도입하는 데 합의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경제의 기본 틀을 이루게 된 브레턴우즈 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세계 각국의 통화 가치는 미국 달러를 기준으로 일정하게 유지하는 고정환율제를 채택하되, 근본적인 불균형이 있을 때만 변경하도록 한다. 기준이 되는 미국 달러는 금 1온스(약 28g)당 35달러로 정했다. 아울러 새 국제 통화 제도를 관장하는 기구로 국제통화기금(IMF)과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별칭 세계은행)을 두기로 했다. IMF는 원조가 시급한 나라에 공급될 장기 자본을 마련하고, IBRD는 환율 안정과 국제수지의 불균형을 바로잡는 데 필요한 금융 지원을 담당하게 되었다.

세계 각국이 미국 달러로 자유롭게 무역을 하되 이 같은 자유무역의 안정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각국의 화폐 가치를 달러 기준으로 고정한다는 것이다. 전세계 금의 대부분을 보유하고 있던 미국은 각국이 무역으로 벌어들인 달러를 가져오면 언제든 금으로 바꿔 주었다. IMF와 IBRD는 미국 중심의 세계 경제가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지원하는 금융기관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 1960년대까지 이어진 세계 자본주의의 황금시대는 이처럼 미국이 큰형님 노릇을 확실하게 하는 자유무역체제 속에서 가능했다.


해방은 하루뿐이었다!

미국과 소련이 주도하는 전후 세계 질서에서 한국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해방 한국의 최대 현안은 38선이었다. 미국은 8월 10일경 정책 실무자들이 다급하게 획정한 것을 소련이 받아들였다고 설명했다. 한 민족의 운명을 좌우할 중대 결정이 일개 실무진의 임의적 판단에 의해 내려졌다는 설명은 무책임해 보인다. 그러나 한반도에 대해 완벽한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미국과 소련의 분할 점령으로 한국 현대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안타깝지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이와 관련해 운명의 8월 10일경 관련 당사국들의 움직임이 주목되고 있다. 연합국은 포츠담선언에서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고, 일본은 한국과 타이완만은 놓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8월 9일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폭이 떨어지고 소련이 참전하자, 이튿날 일본은 포츠담선언을 받아들일 뜻을 밝혔다. 그리고 미국을 상대로 한 일본의 화평 공작이 본격화됐다. 공산 소련보다는 미국 쪽과 협상하는 것이 그나마 일본이 덜 죽는 길이었다.

소련군이 한반도로 밀고 내려오자 조선총독부는 더욱 다급했다. 아베 총독은 소련의 서울 점령을 기정사실로 보고 좌익 계열이던 여운형에게 질서 유지와 자신들의 안전을 위탁했다. 그러나 미국을 상대로 한 일본의 화평 공작은 헛되지 않았다. 8월 22일 서울이 포함된 38선 이남을 미군이 점령한다는 방침이 아베 총독에게 전해지자, 조선총독부는 다시 한국인을 상대로 치안 유지에 나섰다. 서울에 들어간 미군은 식민 통치 기구를 그대로 활용하고 친일파를 등용했다. 중도파 정치인 안재홍은 “해방은 (항복 선언 이튿날이던) 8월 16일 하루뿐이었다”라고 잘라 말했다. 강대국 중심의 냉혹한 국제 질서 속에서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이룬다는 험난한 과제가 한민족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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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좌우 합작에 앞장섰던 여운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