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독립운동은 통일운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글 이계형 국민대학교 특임교수
독립운동은 통일운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1945년 우리 민족은 광복을 맞았지만, 독립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미완으로 남은 사건, 해결되지 못한 문제, 기억해야만 하는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은 독립운동사를 과거에 머문 역사가 아닌 현재의 문제로 다루며, 오늘도 신문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독립운동 및 일제강점 이슈를 소개한다.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미완의 역사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연합군사령관 맥아더가 북위 38선을 경계로 ‘미소분할점령책’을 발표했다. 이로부터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었으니 벌써 70년이 훌쩍 지났다. 우리 역사는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시대를 지나 발해와 신라의 남북국으로 재편되었고, 후삼국을 거쳐 고려로 통합되었다. 비록 발해 영토를 상실했지만, 고려가 들어서면서 발해 유민들을 받아들여 진정한 통일국가의 시대를 열었다. 천자국, 황제국을 자처한 고려의 태조 왕건이 하늘의 뜻을 받아들였다는 뜻의 ‘천수(天授)’를 연호로 정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후 우리 역사는 하나의 국가로 존재해왔다. 1910년 8월, 경술국치를 당하기 이전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일제 35년간의 식민통치를 당한 뒤 미·소 강대국 사이의 냉전 시작과 더불어 38선을 경계로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갈렸다. 고려가 건국된 이후 1천 년 만에 처음 벌어진 일이다. 우리의 역사를 5천 년이라 한다면, 상당히 긴 시간이 흐른 시점이었다.
긴 호흡으로 우리 역사를 본다면 남과 북이 하나가 될 것은 자명할 것이다. 그렇지만 통일 국가를 이루기 위해 잠시도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역사적 사명이다. 우리를 강제로 침략한 일제를 탓할 수도 있고 미·소 간의 책임이라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우리 스스로가 해결해야만 하는 민족 문제이다.
통일된 조국이라는 이정표 따라
해방 직후 국외에서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던 인사들이 국내로 속속 돌아왔다. 이승만은 미국 뉴욕에서, 김구는 중국 충칭에서 남한으로 돌아왔고 소련의 지지를 받던 김일성은 북한에 모습을 드러냈다. 새로운 나라가 세워질 것이라는 기대는 1945년 9월 7일, 미군정이 공포한 「미군정 포고령 1호」에 의해 꺾였다. 미군정이 ‘38도선 이남의 조선과 조선인에 대하여 미군정을 시작한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김구가 이끌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끝내 대한민국 정부 자격을 인정받지 못했고,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환국해야만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45년 12월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에서 한반도를 미·영·중·소 4개국의 신탁통치하에 둔다는 안이 발표되었다. 크게 소용돌이치는 정국 속에서 김구는 제2의 독립운동을 천명하고 임시정부의 역할을 재삼 강조하였다. 김구는 내무장관 신익희에게 「국자(國字)」 제1호, 2호의 임시정부 포고문을 발령케 했다. 이는 미군정의 모든 한인 관리와 경찰들은 임시정부의 명령에 따를 것을 선포하는 내용으로 미군정과 정면 대치하는 조처였다. 서울의 많은 경찰서장이 김구를 찾아와 충성을 맹세하기도 하였다. 이후 임시정부는 전면에서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로부터 35년간의 식민통치를 받다가 독립하였는데 또다시 열강의 신탁통치를 받을 수 없다는 강력한 저항이었다.
이는 곧 임시정부 통일운동의 시작이었다. 1945년 12월 19일 오전 11시 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영회에서 불린 환영합창가에서도 통일 국가의 염원과 의지를 읽을 수 있다.
1. 원수를 물리치고 맹군이 왔건만은 우리의 오직 한 길 아직도 멀었던가. 국토가 반쪽이 나고 정당이 서로 분분 통일업신 독립 없다. 통일 만세, 통일 만만세.
2. 30년 혁명투사 유일의 임시정부 그들이 돌아오니 인민이 마지하여 인제는 바른 키를 돌리자. 자주독립 독립업신 해방 없다. 통일 만세, 통일 만만세.
하지만 정국은 김구의 의지와는 반대로 흘러갔다. 한국의 임시정부 수립을 원조할 목적에서 설치된 미소공동위원회가 성과를 내지 못하고 1947년 10월 해체되자, 유엔은 그해 11월에 임시한국위원단을 구성하였다. 그 감시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하였으나, 1948년 1월 소련에 의해 UN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이 거부되면서 남한만의 총선거 실시로 귀결되고 말았다. 이에 김구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맹렬히 반대하며 비장한 목소리로, “삼천만 자매 형제여…(중략)…현시(現時)에 있어서 나의 유일한 염원은 삼천만 동포와 손목 잡고 통일된 조국, 독립된 조국의 건설을 위하여 공동 분투하는 것뿐이다.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需要)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내 한 몸의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한반도 분단이 고착화될 위기에 처하자 김구는 “우리가 살길은 자주독립 한길뿐이다!”라며 반대하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1948년 4월 19일, 방북을 결행하였다. 김구 등 남한대표단은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개최된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였다. 본회의장 단상에는 태극기가 게양되었고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당시만 해도 북한에서도 태극기와 애국가를 국기와 국가로 인정하였다. 남북연석회의에서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 반대를 천명하고 미·소 양군이 철수한 뒤에 전조선정치회의를 소집하여 직접 비밀투표로 통일정부를 수립하자는데 협의하였지만 이는 실현되지 못했다. 김구는 빈손으로 돌아왔고 1948년 남과 북에 이념을 달리하는 정부가 각기 수립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당시 김구는 서산대사의 다음과 같은 시구를 즐겨 썼다고 한다.
踏雪野中去 눈에 덮인 들판을 걸을 때에는
不須胡亂行 함부로 어지러이 걷지 마라
今日我行跡 금일 내가 걸었던 흔적이
遂作後人程 뒷사람들에게 하나의 이정표가 될 것이니.
해방 후 70여 년 이어진 남북 분단, 70세 노구의 독립운동가가 걱정했던 ‘뒷사람들’이 어느새 현재의 우리가 되었다. 김구는 뒷사람들에게 ‘통일’이라는 명확한 목표와 방향의 이정표를 남겼다. 독립은 반드시 하나 된 조국의 독립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걸었던 위대한 흔적을 따라 그가 제시한 통일된 조국이라는 이정표를 향해 걷고, 때로는 뛰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도 ‘뒷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이정표를 남겨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