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

상하이의거로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린 청년
윤봉길

상하이의거로 <BR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린 청년<BR />윤봉길



글 전시부


상하이의거로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린 청년 윤봉길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 및 광복회와 공동으로 윤봉길을 2019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던 윤봉길은 1930년 중국으로 망명, 1932년 김구가 조직한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의거를 결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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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계몽과 농촌개혁에 앞장서다

윤봉길은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예산에서 태어났다. 1918년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9년 3·1운동이일어나자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며 학교를 자퇴하였다. 이후 1921년 매곡 성주록이 운영하는 오치서숙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전통교육을 받으면서 민족잡지인『동아일보』와 『개벽』 등을 구독하며 민족의식을 키웠다.

윤봉길은 1926년 야학당을 개설해한글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7년에는 한글 교육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농민독본』을 집필하여 교재로 사용하였다.1928년에는 일제하 피폐해진 농촌을 부흥시키고자 부흥원을 건립하고 이듬해에는 월진회를 조직하여 농촌개혁을 추진하였다.


상하이의거를 결행해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다

농촌계몽이 성공하려면 민족이 먼저 독립되어야 한다는 식민지의 현실을 깨달은윤봉길은 1930년 3월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않는다(丈夫出家生不還)’는 편지를 남기고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중국 다롄과 칭다오를 거쳐 상하이에 도착한 윤봉길은김구를 만나 독립운동에 참여할 뜻을 전달하였다. 그리고 1932년 4월 29일에 훙커우공원에서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과 일본의 상하이 침략 승리 기념식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투탄의거를 결심한 후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다.

4월 29일, 윤봉길은 훙커우공원에서열린 기념식에 참석하여 일본 국가 연주가 끝나갈 무렵 단상 위로 폭탄을 던졌다.윤봉길의 의거는 세계 각지에 보도되어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알렸으며, 만보산사건 등으로 갈등을 겪던 한국과 중국이 힘을 합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중국국민당 정부가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윤봉길은 총살 순국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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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尹奉吉)

1908.06.21. ~ 1932.12.19.

충청남도 예산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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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독본』제2권 계몽 편에 수록된 조선지도_보물 제568호

윤봉길은 1927년 농촌운동 교재로 ‘계몽 편’, ‘농민 편’, ‘한글 편’으로 구성한『농민독본』세 권을 저술하였다. 

‘백두산’, ‘낙심말라’, ‘조선지도’ 등의 글에서 농촌계몽과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저술한 책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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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진회 창립 취지서_보물 제568호

1929년 4월 23일 윤봉길은 농촌을 구제하고 농촌 진흥을 목표로 월진회를창립하였다. 

윤봉길은 중국으로 망명하며 월진회 공금 60원을 사용하였는데,칭다오에서 일하며 번 월급을 고향으로 보내 공금을 갚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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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의 한인애국단 가입 선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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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애국단장 김구와 단원 윤봉길

윤봉길은 의거 3일 전인 4월 26일 개인적 차원의 의거가 아니라 

한민족의 의사를대변한 것을 알리기 위해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