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독립운동가의 초상
종교인이
함께 이룬
독립의 꿈

글 김정인 춘천교육대학교 교수
종교인이 함께 이룬
독립운동의 꿈
민족대표 33인, 그들은 3·1운동의 기획자였다. 민족대표 33인은 천도교 15명, 기독교 16명, 불교 2명으로 모두 종교 지도자로 이루어졌다. 1910년대 조선총독부는 한국인의 정치, 사회 활동을 허용하지 않았다. 해외로 망명하지 않은 지식인들은 종교계나 교육계에서 활동했다. 그들이 바로 3·1운동의 주역으로 나선 것이다. 3·1운동 이후에도 종교인들은 민족운동에서 주요 세력으로 활약했다. 무장투쟁에 나섰던 대종교도 있었다.

민족대표 독립선언 기록화(태화관)
3·1운동의 기획자, 민족대표
1918년 말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를 위한 파리강화회의 개최를 목전에두고 지식인들은 세계정세를 예의주시하며 독립운동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런데 1919년 1월 18일 파리강화회의가 개막한 사흘 후인 1월 21일에 고종이 급사했다. 도쿄에서 ‘2·8독립선언’을 준비하던 유학생들은 독립선언 준비 소식을 알리고자 송계백을 국내에 밀파했다. 국내외적 상황이 한국인의 독립 열망을 세계에 알릴 호기라고 판단한 종교계는 본격적인 독립운동 모의에 나섰다.
제일 먼저 천도교가 연대에 기반한 독립운동을 제안했다. 천도교 창건자인 손병희와 그의 측근인 권동진, 오세창, 1910년 국망 직후 천도교에 입교해 보성고등보통학교 교장을 맡고 있던 최린이 주모자였다. 그들은 1919년 1월 말부터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연대를 위한 연락 실무는 최린이 맡았다. 최린이 제일 먼저 기독교 장로로서 평안북도 정주에 거주하는 이승훈과접촉을 시도했다. 이승훈은 2월 11일에 상경해 천도교의 독립운동 계획을듣고는 동참할 뜻을 밝혔다. 당시 기독교는 중앙집권적 단일조직인 천도교와 달리 장로교와 감리교로 양분되어 있었다. 이승훈은 장로교와 감리교 간의 연대를 시도했다. 그는 평안북도 선천과 평안남도 평양에서 기독교 지도자들과 접촉한 후 상경해 서울의 기독교 지도자들을 만났다.
천도교와 기독교의 연대가 성사된 것은 2월 24일이었다. 양측은 3월 1일 오후 2시에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기로 합의했다. 독립선언서는 천도교에서 인쇄하고 지방에서도 천도교인과 기독교인들이 서울의 독립선언식 일시에 맞춰 독립선언식을 갖도록 독려하기로 했다. 또한, 민족대표는 천도교와 기독교에서 각각 선정하되, 불교와도 연대하기로 결정했다.최린은 그날 밤 신흥사 승려인 한용운을 만나 연대를 요청했다. 1월 말부터최린에게 독립의사를 비쳤던 한용운은 즉시 승낙했다. 한용운의 주선으로해인사 승려인 백용성의 동의도 받았다. 마침내 천도교, 기독교, 불교의 연대가 성사된 것이다.
2월 27일과 2월 28일에는 민족대표 선정, 독립선언서 인쇄와 배포 등구체적인 진행과 관련한 연대 활동이 펼쳐졌다. 2월 27일에 종교계는 민족대표를 최종 선정했다. 천도교가 경영하는 보성사에서는 기미독립선언서 2만 1천 매가 인쇄되었다. 2월 28일의 독립선언서의 배포 역시 종교계의 연대를 통해 이루어졌다. 천도교는 북부 지방을 중심으로 배포에 나섰다. 기독교는 학생들을 통해 서울에 배포했고 연락이 닿는 지역에도 보냈다. 불교계에서 한용운이 나서 서울과 남부 지방에 배포했다. 그날 밤 처음으로 천도교·기독교·불교 지도자, 즉 민족대표 중 23명이 손병희의 집에 모였다. 민족대표들은 3월 1일 학생들이 독립선언식 예정 장소인 탑골공원에 집결한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들이 체포될 경우 폭동이 일어날 것이라 우려하며 장소를 태화관으로 변경했다.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 중 29인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가졌다. 민족대표들은 조선총독부에 독립선언식 거행 소식을 알리고 한용운의연설을 듣고 만세삼창을 불렀다. 곧 헌병과 경찰 80여 명이 태화관에 나타나 민족대표들을 체포했다.

2·8 독립선언 당시 동경 YMCA단원이었던 송계백

일본 망명 시절의 권동진(왼쪽)과오세창(오른쪽)
종교 연대를 이끌어 낸 손병희, 이승훈, 한용운
천도교, 기독교, 불교 연대의 주역은 손병희, 이승훈, 한용운 등 3인이었다. 손병희는 민족대표를 이끈 천도교 지도자로서 1894년 동학농민전쟁에서 농민군을 이끌었던 동학 지도자다. 이후 동학 3대 교주가 되어 동학의 근대화를 추구하며 이름을 천도교로 바꿨다.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많은 사람이 동학에 뿌리를 둔 천도교에 몰려들어 1919년 무렵 천도교인은 100만 명에 달했다. 손병희는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서 민족대표들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후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는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19년 11월에 뇌출혈로 쓰러졌다. 하지만 병보석은 계속 기각되었고 1920년 10월 20일에야 출감할 수 있었다. 끝내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1922년 5월 19일 서거했다. 손병희는 천도교가 조직과 재정을 동원해 3·1운동을 기획하는 데 앞장서도록 이끌었던 민족대표의 지도자로서 사실상 3·1운동으로 자신의 삶을 마감하는 희생을 치렀다.
이승훈은 기독교 장로이자 자산가였다. 어릴 적 부모를 모두 잃고 10세에 유기상점 점원을 시작으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이후 부자가 되었다. 1907년 안창호의 권고로 비밀결사인 신민회에 가입했고, 이후 오산학교와 태극서관, 자기회사 등을 설립했다. 1911년 2월에는 안중근의 사촌 동생 안명근이 독립군자금을 모금하다 검거된 ‘안악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조선총독부가 ‘테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을 조작해 105명을 기소한 ‘105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승훈은 주모자로 지목돼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 징역 6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19년 2월 천도교의 독립운동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감리교와 장로교를 아울러 기독교 지도자들을 결집했다.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경무총감부로 호송되어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과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민족대표 가운데 가장 늦은 1922년 7월 21일에 출옥했다.
한용운은 1904년경 출가해 승려 생활을 시작했다. 1910년대에는 불교의 친일화에 반대하며 한국불교의 개혁방안을 제시한 『조선불교유신론』을 발간하는 등 불교의 혁신운동을 이끌었다. 1919년 2월 24일 최린으로부터 기독교와 연합해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백용성과 함께 민족대표에 가담했다. 2월 28일에는 독립선언서를 서울과 남부 지방에 배포했다. 3월 1일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서 “오늘 우리가 집합한 것은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기 위한 것으로 자못 영광스러운 날이며, 우리는 민족대표로서 이와 같은 선언을 하게 되어 그 책임이 중하니 금후 공동 협심하여 조선독립을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내용의 연설을 하고 만세삼창을 선창했다.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경성지방법원 검사장의 요구로 「조선 독립에 대한 감상」이란 논설을 집필해 제출했다. 징역 3년을 선고받아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른 뒤 1921년 12월 22일 감옥 문을 나왔다.

천도교 지도자 손병희


대종교 간부 나철
민족운동을 펼친 종교들
3·1운동을 선도적으로 이끌었던 천도교는 3·1운동 이후 민족진영을 이끄는 주류로 부상했다. 1920년대 천도교는 교단의 민주주의적 운영을 이끌어 내며 천도교청년회를 중심으로 문화계몽운동에 앞장섰다. 『개벽』, 『어린이』, 『신여성』, 『학생』, 『농민』 등의 잡지를 발간했고 청년운동, 소년운동, 학생운동, 여성운동, 농민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천도교는 신파와 구파로 분화되었는데 구파는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에 참여했고 신파는 조선농민사를 조직해 농민운동을 펼쳤다. 3·1운동 이후 기독교는 사회운동의 일환으로 물산장려운동, 농촌계몽운동 등에 뛰어들었다. 1930년대에는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조선총독부와 충돌했는데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한 기독교인들은 탄압을 받았다. 불교는 청년을 중심으로 조선불교유신회를 결성하고 불교 개혁과 대중화 운동을 펼치며 민족정신을 고취했다.
한편 나철이 1909년 창건한 대종교는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만주로 본부를 이전했다. 그곳에 살던 많은 한인이 대종교에 입교했다. 대종교는 만주에 학교를 세우고 단군 사상을 전파하며 중광단이라는 무장단체를 결성했다. 중광단은 3·1운동 이후 만주지방에 흩어져 있던 대종교인을 규합해 대한정의단으로 개편했다. 대한정의단은 대한군정서를 거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시에 따라 서일을 총재로, 김좌진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북로군정서로 확대 개편되었다. 1920년 북로군정서는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불교계 대표 한용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