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열의 발자취를 찾아서
한국 최초의 사적지 조사, 그 첫발을 내딛다

글 김주용 독립기념관 선임연구위원
한국 최초의 사적지 조사, 그 첫발을 내딛다
우한(武漢)의 8월은 정말 무덥다. 차는 연강대가(沿江大街)를 따라 북쪽으로 달려 우한 국민정부청사로 향했다. 강안구 중산대로에 들어서자, 마치 1920~30년대 공간에 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중산대로를 가로질러 남과 북으로 영국·프랑스·독일 등의 조계지 건물들이 지금도 옛 모습을 간직한 채 도열해 있었다.
우한 국민정부청사에서 흐릿해진 역사를 만나다
서양식 5층 건물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우한 국민정부청사 벽면에는 ‘우한혁명정부구지(武漢革命政府旧址)’라는 오석 표지판이 부착되어 있다. 입구에 들어서자 의아했다. 과연 이곳이 청사 건물이 맞나 싶었다. 1층 양쪽에는 커피숍과 상점이 들어서 있으며, 실질적으로는 호텔 대화반점(大華飯店)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호텔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으로 올라가자, 비로소 작은 전시실이 우리를 반겼다.
1926년 국민혁명군 정부는 광저우(廣州)에서 이곳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북벌과 함께 단행된 조처였다. 북벌에는 한인들의 역할도 있었다. 1926년 우창(武昌)을 공격한 국민혁명군 제4군에는 헤이그 특사 이준의 아들 이용이 있었고, 제6군에는 한인 간부 포병영 영장 이검운·부영장 권준·부관 안동만이 대표적인 참가 인물이었다. 이들은 황푸군관학교 졸업생으로, 북벌이 시작되면서 장교로 참전했다. 이 가운데 권준은 의열단 단원으로서 국공합작 초기부터 중국혁명에 참가한 인물이었다. 국민정부는 1927년 3월 10일부터 17일까지 이곳에서 국민당 제2기 3차 전체회의를 개최하여 반제국, 반봉건 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자고 결의하였다.
국공합작과 북벌의 상징이었던 국민정부청사는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사적지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건물 외형의 웅장함과는 달리 내부의 전시실은 호텔이 주인이고, 국민정부 시절의 역사가 손님처럼 변해 있었다. 그나마 이곳이 1996년 중국 중점문물단위로 지정·관리되고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삼았다. 청사를 뒤로 하고 우리는 중국의 인민예술가이자 한국의 독립운동가인, 화가 한낙연이 활동했던 우한 국민혁명군 팔로군 판사처(辦事處)를 찾아 나섰다.

우한 국민혁명군 팔로군 판사처
무더위를 뚫고 찾은 우한 국민혁명군 팔로군 판사처
오후 4시가 지났는데도 더위는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중산대로에서 좀 떨어진 장춘가 57호 옆 공터에 차를 세웠다. 어깨에 작은 사다리를 걸친 조성진 연구원은 사우나 같은 더위에 연신 땀을 흘렸다. 임공재 사진작가는 온몸에 촬영 장비를 두르고 있었다.
이선자 부관장은 우한 국민혁명군 팔로군 판사처를 찾아 담당자에게 우리가 이곳을 조사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이곳 판사처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조사를 나온 사적지로, 걸출한 한인 독립운동가이자 화가였던 한낙연이 활동했던 곳임을 재차 강조하여 마침내 촬영 허락을 받았다. 4층으로 이루어진 건물을 촬영하기 위해 임공재 사진작가와 조성진 연구원은 주변에 더 높은 건물을 찾아 사진 촬영을 시작했다.
우한 국민혁명군 팔로군 판사처는 국공합작의 산물이다. 팔로군은 이곳을 통해 업무를 관장했었다. 판사처는 무선통신기를 설치하고 중국 공산당의 지시를 전달하거나 정치·군사정보를 수집하였다. 또 왕래하는 당의 인원을 호송하거나 항일군대를 위한 군수물자를 수집·전달하는 업무도 맡았다.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한낙연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하지만 중국 옌볜조선족자치주 룽징(龍井)에는 한낙연 공원이 조성되어 있을 만큼 그는 중국 조선족을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우한 국민혁명군 팔로군 판사처 입구
중국의 미술가이자 한국 독립운동가 한낙연
한낙연은 중국에서 활동한 미술가이다. 지린성(吉林省) 룽징에서 태어나 1914년 즈음 미술을 공부하기 시작한 그는 룽징에서 3·1운동의 자극을 받아 시위에 참여하였다.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러시아를 거쳐 상하이(上海)로 피신하였고, 1923년 국민대표회의가 열릴 때 창조파와 함께 활동하였다. 1924년 2월에는 경호대 경호위원으로 프랑스 조계 및 공동조계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일본인들과 접촉하는 것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 시기에 상하이미술전문학교에서 미술을 배웠다.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고, 1929년 프랑스 리옹에서 미술공부를 하는 동안에도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하여 항일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1937년 7월에는 『파리만보』 사진기자로 활동하며 일제의 중국침략을 폭로하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부터는 우한에서 동북항일구망총회(東北抗日救亡總會)를 조직해 항일운동에 나섰다. 동북항일구망총회는 우한 국민혁명군 팔로군 판사처를 책임지고 있던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지도하에 있었다. 한낙연은 이 단체에서 발행하는 잡지 『반공(反攻)』의 표지 설계와 미술편집을 담당했으며, 여기에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는 글을 발표했다. 또한 선전사업을 더욱 폭넓게 진행하기 위해 한커우(漢口)의 세관빌딩에 선전용 대형 유화를 걸어놓기도 했다.
이외에도 친중 외국 인사들과의 교섭을 통해 중국항전 지원사업 추진에도 나섰다. 우한에서 통일전선사업을 맡고 있던 그는 독립운동가들을 적극 도왔으며, 1938년 우한이 함락되자 그해 9월 충칭(重慶)으로 활동근거지를 옮겼다. 옆 건물에서 사진 촬영을 마치고 온 임공재 사진작가와 조성진 연구원의 얼굴에는 희열과 땀이 뒤범벅되어 있었다. 건물 외부에 부착된 애국교육기지 표지판을 촬영한 임공재 사진작가는 본격적인 내부 촬영에 들어갔다. 한 시간 동안 이어진 촬영을 마치고, 일행은 한국에서 최초로 촬영한 사적지라는 뿌듯함을 공유했다.

한낙연 부부

한낙연 유작전(遺作展) 도록

한낙연 동상
창사(長沙)에서 우한에 도착하자마자 두 곳의 사적지를 연일 조사한 우리는 밀려오는 허기를 달래기 위해 후난성의 특색음식인 위토우(鱼头) 요리를 먹기로 했다. 중국의 민물고기로 한국에는 없는 머리 큰 고기, 이른바 50kg 가까이 나가는 용어(鱅魚)라 하는 물고기로 요리한 음식이다. 거칠게 간 생고추를 듬뿍 올려놓고 각종 소스로 끓여낸 요리는 한 점 한 점이 예술이었다. 거하게 저녁을 마친 우리는 다가올 내일의 여정을 위해 숙소로 향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