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
만주와 중국 대륙을 누비며 활약한 한국광복군
고운기

글 학예실
만주와 중국 대륙을 누비며 활약한 한국광복군
고운기(高雲起, 1907~1943)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광복회와 공동으로 고운기를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의병으로 활동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그는 일찍이 항일정신에 눈을 떠 독립운동에 뛰어든 인물이다.

한국독립군으로 북만주에서 활동하다
고운기는 1907년 함경남도 문천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공진원이다. 그의 아버지는 을사늑약 직후 홍범도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함경도 각지에서 활동한 인물로, 1908년 홍범도가 의병부대를 이끌고 만주로 이동할 때 고운기 역시 함께 망명하였다. 1931년 말 만주의 한국독립당이 창설한 한국독립군 제6중대장으로 임명된 고운기는 쌍성보전투 등에 참가하여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한편 지청천의 명령으로 길림구국군(吉林區國軍) 대표를 만나 한중연합부대 합작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고운기의 노력으로 구성된 한중연합군은 1933년 2월 경박호에서 매복작전을 통해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이후 동경성과 대전자령 등지에서 일본군을 공격하였고, 특히 대전자령전투는 일본군 1개 연대를 섬멸시키는 승리를 거둔 전투였다.

1932년 쌍성보전투가 일어났던 현장

중국 지린성을 침공한 일본군(1931년)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대장으로 활동하다
1933년 말 한중연합군이 분열되고 일본군의 공세가 강화되어 북만주에서 활동을 더 이상 지속하기 어려워졌다. 이 무렵 한국독립군 지휘부에 한인 청년들을 군사간부로 양성하기 위해 중국 관내지역으로 이동시키라는 김구의 제의가 전달되었다.
지청천을 비롯한 한국독립군 지휘부가 제의를 받아들인 가운데, 고운기는 1934년 2월 동료들과 함께 뤄양(洛陽)군관학교 한인특별반에 입교하여 1년 2개월 동안 병기학·전술학·통신학 등 각종 군사훈련을 받고 1935년 4월 졸업하였다. 1938년 11월에는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의 대장을 맡아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는 선전활동을 주도하였다. 1939년에 임시의정원 함경도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40년에는 한국독립당 감찰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 지대장으로 활약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40년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9월 17일 개최된 성립전례식에서 고운기는 마지막으로 연단에 올라 항일전선에서 활동하는 대원들에게 보내는 연설문 ‘고중국전방장사서(告中國前方壯士書)’를 낭독하였다. 한국광복군 창설 직후 그는 제2지대장으로 임명되어 시안(西安)을 거쳐 네이멍구(内蒙古)지역인 수원성 포두로 파견되었다. 그곳에서 한인 청년들을 만나 한국광복군으로 가입시켜 총사령부가 있는 시안으로 보내는 초모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이 일제에 발각되자, 1942년 다시 충칭으로 돌아왔다.
이후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며 한국광복군의 자율적인 활동을 제한하는 ‘9개 준승’ 취소를 위한 활동을 전개하다가 병을 얻어 1943년 37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운기의 공적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 기념사진(1940년 5월 16일)

제34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기념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