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하나,위인을 기른 위대한 어머니, 김점순
둘,일제강점기 농민들은 흙을 먹고 살았다?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하나]
글 은예린 자유기고가
위인을 기른 위대한 어머니, 김점순
사람의 이면에는 그의 어머니가 숨은 그림자처럼 자리 잡고 있다. 시대의 흉악범들이 내면에 어머니와의 상처가 숨 쉬고 있어 나쁜 길을 갈 수밖에 없었음을 고백하는 바와 같이, 위대한 인물이 탄생하기까지 역시 어머니의 인품과 교육이 서려 있다.

김점순 여사

종로경찰서 투탄 의거 현장
어머니의 가정교육이 인생항로를 결정하다
“어머니는 우리의 마음속에 얼을 주고 아버지는 빛을 준다.” 독일 소설가 장 파울(Jean Paul)의 명언을 다시금 더듬어 본다. 어린 시절 알게 모르게 우리의 외형에 가려진 내면의 꿈과 욕망, 의욕은 모두 어머니의 영향임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또 “온갖 실패와 불행을 겪으면서도 인생의 신뢰를 잃지 않는 낙천가는 대개 훌륭한 어머니의 품에서 자라난 사람들”이라고 강조한 앙드레 모루아(Andre Maurois)의 명언도 우리를 겸허하게 만든다. ‘맹모삼천지교’라는 어머니의 자녀교육의 중요성을 숱하게 들었기에, 윤봉길 또한 마지막 순간 두 아들에게 유언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아비가 없어도 어머니의 사랑과 교양으로 동서양 역사상 성공한 인물이 많다.’ 편지에 담긴 그의 가르침은 자식들을 안심시켰다.
아들의 의열투쟁을 지원한 어머니 김점순 여사
우리 민족에게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결코 짧지 않았던 아픈 시절이 있다. 지울 수 없는 비참한 역사의 한 페이지가 마침내 마감되고, 만세를 부르며 환호하던 시간도 어느덧 세월이 흘러 70년이 훌쩍 지났다. 과거의 그때,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앞장선 영웅들이 있었다. 낯선 타국에서 외교를 통해 민족을 구하고자 희생한 인물들도 많다. 그러나 유관순·안중근·윤봉길 등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교과서를 장식하며 익숙하게 알려진 독립운동가에 비해 생소한 인물들 또한 적지 않다. 그 가운데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해 독립운동사에 새로운 신화를 써내려간 김상옥이 있다. 그리고 그의 나라와 민족을 위하였던 도전과 용기 뒤에는 숨은 조력자이자, 스승이요, 헌신적인 희생을 강조했던 어머니 김점순 여사가 있었다.
당시는 남녀가 유별하고 여성은 오직 안사람으로서 역할에만 충실해야 한다는 관념이 강한 시절이었다. 그러나 김점순 여사는 독립운동에는 남녀 구분이 없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아들 김상옥의 활동을 지지하고 열성적으로 도와주었다. 나라를 잃고 1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1919년 가을, 암살단을 조직한 아들 김상옥이 일경에 붙잡히게 되자 그녀는 증거 인멸을 위해 인쇄용 등사판을 파괴하는 지혜를 발휘했다. 1921년에는 김상옥이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자금 모금을 위해 국내 활동 중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아들을 피신시키기도 했다. 대신 가족과 함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온갖 고초가 뒤따랐다. 이후 1923년 드디어 김상옥이 종로경찰서 폭파를 결심했을 때, 김점순은 거사에 필요한 무기를 준비해 주는 등 아들을 적극적으로 격려하며 독립운동을 후원해 주었다.

김상옥 묘 앞에서 통곡하는 김점순 여사 신문 기사

김상옥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공판(1923년 3월 15일)
시대를 앞선 지혜로운 어머니
400여 명에 이르는 일경과 지붕 위를 오르내리는 총격전이 오가고, 김상옥은 결국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남은 한 발의 총알을 자신에게 겨누었다. 34살이라는 짧은 생을 살다 간 김상옥은 광복 후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묻혔다. 1924년 4월 8일자 신문 기사에 실린 ‘죽으려 왜 왔더냐/ 묘전(墓前)에서 통곡하는 김상옥의 친모’라는 제목의 기사는 화제가 되었다. 일제는 ‘범죄 선동’이라는 이유로 이 기사를 삭제해 버렸다.
이제 우리는 마로니에 공원에 우뚝 선 김상옥의 동상을 보며 또 다른 얼굴을 떠올려야 한다. 바로 가난하고 힘든 살림 가운데서 아들의 독립운동을 적극 후원하며 자신 역시 애국지사이자 항일 독립운동가로서 삶을 마감한 어머니 김점순 여사의 삶이다.
오늘의 모성애를 비추어 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해야 할 고위층 어머니들이 아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으려 온갖 뇌물이며 지저분한 잔꾀를 부린다거나, 자식의 잘못된 ‘갑질’을 눈감으려 했다는 부끄러운 기사를 접할 때가 심심치 않다. “낮에는 대장간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학을 하는데 시간이 급하여 방에도 못 들어가고 마루에서 한 숟갈 떠먹고 갈 때 그저 ‘체할라 체할라’ 하던 때가 엊그제인데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되었습니까?”라며 자식에 대한 애틋함을 고백한 바 있는 김점순 여사와 다분히 비교되는 모습이다.
주권을 잃은 조국에서 아들의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불안한 상황 가운데 보여준 김점순 여사의 삶은, 풍족하게 지내면서도 병역기피와 고위층의 횡포가 만연한 현대사회를 부끄럽게 만든다. 김점순 여사는 자신의 목숨뿐 아니라 아들의 목숨마저 나라에 바치면서도 무력감에 빠지지 않고 늘 굳세었다. 강한 어머니의 ‘참사랑’을 실천하며 독립운동가로서 평생을 살다 간 높은 정신에 절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둘]
글 신현배 역사칼럼니스트
일제강점기 농민들은 흉년에 흙을 파먹고 살았다?
일제강점기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계정리 마을에서 있었던 일이다. 보릿고개가 되어 양식이 똑 떨어진 마을 사람들은 할 수 없이 솔잎을 쪄서 말린 뒤 가루를 내어 떡을 만들어 먹는가 하면, 마 뿌리나 칡뿌리를 캐서 그것으로 가루를 내 국수를 만들어 먹으며 연명했다.

마을 사람들의 주린 배를 채워준 하얀 흙
그렇게 끼니를 때우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허기가 져서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 노인이 말했다.
“솔잎이나 풀뿌리만 먹어서는 배가 고파 기운을 쓰지 못하오. 변비 증세도 심해지고 말이지. 옛 선조들은 심한 가뭄이 들면 하얀 진흙을 파서 좁쌀 가루를 섞어 떡을 만들어 먹었다네. 맛도 괜찮고 배도 불러 먹을 만하다네. 우리도 흙을 구해 먹는 게 어떻겠나?”
“좋습니다. 하얀 진흙은 우리 마을 뒷산에 있어요. 제가 지게를 지고 가서 잔뜩 퍼오겠습니다.”
한 젊은이가 자처해 진흙을 지게에 이고 오자, 마을 사람들은 노인이 알려준 대로 진흙에 좁쌀 가루를 섞어 떡을 만들어 먹었다. 그리하여 어려운 보릿고개를 잘 넘길 수 있었다.
한편 주재소 순사들은 계정리 마을 사람들이 흙을 먹는다는 소문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뭐라고? 사람이 흙을 먹어? 그러고도 살 수가 있나?”
“몸에 해로울 텐데. 일단 흙을 구해 무엇인지 알아내 보자.”
순사들은 사람들이 먹는다는 진흙을 구해 경기도 경찰부 위생과로 보내 성분 분석을 의뢰했다. 위생과에서는 전문가를 통해 진흙을 시험해 보고는 이렇게 알려왔다. “하얀 진흙은 경기도 양평뿐만 아니라 함경도와 전라도 등지에서도 나는 흙입니다. 규산 알미늄 성분이 들어 있어 먹어도 몸에 해롭지는 않습니다. 다만 영양가는 전혀 없고, 먹으면 배가 부를 뿐입니다.”
먹는 흙의 다양한 쓰임새
마을 노인이 말했듯 우리 선조들은 흉년이 닥치면 흙을 파먹었다.
‘함경도 화주(지금의 영흥)에는 황납 같은 진득진득한 흙이 있었다. 태종 때 심한 가뭄이 들었는데, 고을 사람들이 이 흙을 파내어 엿처럼 고아 먹었다. 그리하여 흉년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 이수광의 『지봉유설』 中 -
‘헌종 때 평안도에 대기근이 들어 평양의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어 갔다. 이때 평양 잡약산 아래에는 달지도 쓰지도 않은 흙이 있어, 평양 사람들이 몰려와 떡을 만들어 먹었다. 대기근 뒤에도 이 흙을 먹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잡약산 앞을 지나가던 역졸들은 배고파 기운이 없으면 이 흙을 파먹고 기운을 차려 잘도 달려갔다’
- 윤유의 『평양속지』 中 -
이처럼 조선시대에 흙을 먹었다는 기록은 여럿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놀라운 이야기는 영남지방에 대기근이 들었을 때의 일이다. 사람들이 쌀가루처럼 하얀 흙을 찾아내 떡을 만들어 먹었는데, 햅쌀이 나올 때가 되자 그 흙이 다 떨어졌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느님이 백성들을 구하려고 먹을 수 있는 흙을 내려주셨구나”라며 하느님에게 감사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지봉유설』에는 이런 내용도 실려 있다. 호랑이가 사냥꾼에게 독 묻은 화살을 맞으면 해독을 하기 위해 푸른 진흙을 먹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쥐도 독약이 섞인 음식을 먹으면 흙탕물을 찾아 마셔 금방 회복되었다고 나와 있다.
흙은 사람에게 약으로도 쓰였다. 허준의 『동의보감』에는 이러한 기록이 있다.
가마솥 밑에 있는 10년 묵은 황토를 ‘복룡간(伏龍肝)’이라고 부른다. 이 흙을 핥으면 코피가 멎고 혈변, 혈뇨가 그친다. 묵은 집 벽의 흙도 여러 가지 병에 잘 듣는다. 동쪽 벽의 흙은 설사에 잘 듣고, 서쪽 벽의 흙은 토하거나 딸꾹질을 할 때 잘 듣는다. 또한 진흙은 설사에 좋고, 붉은 흙은 귀신들린 병에 효과가 있다.
이밖에도 정신병에 걸린 사람에게는 조상 무덤의 썩은 흙을, 상사병에 걸린 사람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의 집 마당에 있는 흙을 먹이면 효과가 있다고 믿는 등 먹는 흙과 관련된 재미있는 기록들이 많다.
신현배
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은 역사칼럼니스트. 저서로는 역사 이야기 『엉뚱 별난 한국사』, 『엉뚱 별난 세계사』, 『2000년 서울 이야기』, 『세계사로 배우는 법 이야기』, 전통문화 이야기 『소중한 우리 문화 지식 여행』 시리즈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