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 살피다

크게 보고, 자세히 듣고, 널리 말하다

크게 보고, 자세히 듣고, 널리 말하다

글 심용환 역사N교육연구소 소장


크게 보고, 자세히 듣고, 널리 말하다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는 근대 문물의 유입으로 생활에 많은 변화가 있었던 기간이다. 1876년 강화도조약을 통한 개항 이후 본격적으로 바다 건너 다양한 문화가 밀려 들어왔으니 말이다. 그중에는 독립운동사에 있어 새로운 눈·코·입의 역할을 해준 대중매체도 있었다.

           


        

근대 문물로 인한 대중매체의 발달

고종이 커피를 즐겨 마시던 모습이나 손탁호텔에서 각국의 공사들과 조선의 관료가 어울리는 모습은 모두 근대 문물의 영향을 받은 까닭이었다.

근대 문물의 수용은 광범위한 문화적 변화를 일으켰는데, 무엇보다 대중매체의 발달을 촉진하였다. 전화기와 신문을 비롯한 매체가 이 시기 우리 사회에 정착한 가운데 독립운동사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36년 <동아일보>가 베를린올림픽 마라톤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의 사진을 보도할 때 일장기를 삭제했던 ‘일장기 말소 사건’과 1940년대 태평양전쟁 당시 미주 교포들을 중심으로 라디오 단파방송을 통해 독립운동을 고조시켰던 ‘단파방송 수신 사건’ 등이 바로 이러한 예에 속하는 사례다. 근대 문물이 대중매체의 발전을 가져오고, 대중매체는 독립운동을 촉진시키는 매개체로 작용하는 순간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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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탁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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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 사건(<동아일보> 1936년 8월 25일자)

김구를 살린 전화기

1896년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전화기가 개통되었던 해다. 경운궁(현 덕수궁)에 설치된 이 전화기의 이름은 텔레폰(Telephone)을 음역한 ‘덕률풍(德律風)’으로, 정확한 명령을 내리거나 행정 집행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명성황후의 무덤인 홍릉에 전화기를 설치하여 안부 전화를 걸었다는 일화까지 있다. 실제로 고종 사후에는 순종이 고종의 능에 전화기를 설치하여 문후 인사를 올렸다고도 한다.

전화기를 둘러싼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는 『백범일지』에 담겨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김구는 치하포에서 일본인 쓰치다를 처단하고 그로 인해 사형선고까지 받은 상황이었다. 이 사실을 승정원의 승지가 듣고 고종에게 보고하자, 어전회의 이후 사형 집행을 중지하라는 전화를 걸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물론 이 내용은 전화기가 설치된 시기와 약간 어긋나기 때문에 오해라는 주장도 있지만, 무엇보다 전화기가 조선 민중의 삶에 직접 들어오기 시작했음을 방증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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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당시 자석식 벽걸이 전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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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에서 사용했던 전화 교환기와 교환수

일제강점기 가장 활동적이었던 대중매체, 신문

한말 대중매체로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은 신문이다. 기차와 신문의 시대였던 그때, 여론을 전달하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 바로 신문이었기 때문이다. 한국 최초의 근대 신문은 <한성순보>로, 일본에 수신사로 파견됐던 박영효가 민중 계몽을 위해서는 신문이 필요하다며 고종을 설득해 1883년 발간되었다. 국가에서 발행하는 관보로서 순한문으로 쓴 <한성순보>는 갑신정변으로 안타깝게 1년 만에 발행을 중단했다가, 이후 <한성주보>로 재발행이 되기도 했다. 순보(旬報)라 하면 10일에 한 번, 주보(週報)라 하면 7일에 한 번씩 발행함을 의미한다.

1896년 창간된 <독립신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신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독립협회의 기관지 정도로 기억하지만, 시기적으로 따지면 협회 결성보다 신문의 발행이 조금 이르다. 순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은 요즘 기준으로 A4용지 두 장 정도의 분량이었는데, 최초로 띄어쓰기를 시도하고 본격적으로 신문 광고를 싣기도 했다. 친일신문인 <한성신문>과 경쟁하면서 다양한 의제를 제시하였고, 순한글로 실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읽으면서도 여러 정치·사회적 의제들을 두고 분분히 토론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이 만들어졌다. 발행부수는 최대 3,000부 정도로, 당시 경제상황과 신문을 돌려보는 문화를 고려한다면 그보다 몇 배는 더 많은 사람들이 <독립신문>을 읽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온갖 미디어가 일반화된 오늘날과는 사뭇 다르다.

초기 <독립신문>은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다. 정동파 내각, 즉 친미·친러 내각은 <독립신문>을 이끌던 서재필에게 중추원 고문직과 농상공부 고문직을 겸직케 했다. 농상공부(農商工部)는 신문을 담당하는 부서였다. 또한 1896년 1월에는 신문 창간비 4,400원을 보조했으며 신문사 사옥으로 정부 소유 건물을 제공하기도 했다. 농상공부는 <독립신문>을 관보와 동일한 2종 우편물로 지정하여 운송비를 할인해주었고, 또한 학부와 내부는 산하 학교의 생도들과 지방관들에게 구독을 지시하기도 했다. 궁궐 내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부는 관리들의 <한성신보> 구독을 중지시키고 <독립신문> 기자들의 취재활동을 보장해줌으로써 발전을 지원하였다. 정부와 민족지도자 중심의 민족운동이 신문과 결합하여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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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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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순보> 창간호(1883년 10월 3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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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투쟁 수단

1919년 3·1운동 이후 결성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역시 <독립신문>을 발행하였다. 독립협회의 그것과 이름은 같지만 전혀 다른, 문자 그대로 기관지로서 역할을 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프랑스 조계지에서 활동했는데, 프랑스는 폭탄을 제조하거나 물리적 테러 등 과격한 행동에 대해서만 제한했을 뿐 독립운동가들에게 활동 대부분의 자율성을 보장해주었다. 당시 가장 중요한 투쟁 수단 중 하나는 단연 신문이었다. <독립신문>은 1923년 관동대학살에 대해 소상히 보도하여 끔찍했던 학살의 참상을 알렸다. 이처럼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주요 도구가 되기도 하였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방략과 비전을 알리는 데 활용했다. 일제는 프랑스와 수차례 교섭에 나서는 등 <독립신문>을 폐간하기 위한 시도를 계속했다. 하지만 프랑스 조계국은 ‘한인들이 인쇄기를 중국인에게 매각하였으므로 압수할 수 없다’며 일제의 요구를 거절해 위기를 무난히 넘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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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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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가 발행한 <독립신문>

여성 독립운동가의 주된 활약이 돋보이다

신문을 통한 독립활동은 1940년대 충칭(重慶) 임시정부에서도 계속된다. 특히 이 시기에는 여성광복군이 이 업무를 담당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다음은 광복군 제3지대에서 활동했던 지복영의 회고 내용이다.

임시정부 헌법이 빈부와 신분의 귀천을 구별하지 않고 특히 남녀평등을 강조한 데 자극받아 미력이나마 일조를 하고 싶어서였지요. 당시 여군에 대한 대접도 좋아 월급도 중국 돈 5원으로 남자들과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국내에서 활동했던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대개 지식인이었는데, 특히 충칭까지 찾아온 인물 상당수는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임시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중에는 독립운동가 집안 출신 또한 많았으니, 김정숙·김효숙은 신민회 일원이자 <독립신문>을 운영했던 김붕준의 딸들이었다.

한국광복군은 독립운동을 알리고 광복군 모집을 위한 선전 활동으로 기관지 『광복』을 발간하였다. 이때 원고와 번역 작업에 매진했던 인물이 지복영·오광심·조순옥이다. 일본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해 편지를 쓰고 비행기로 살포하고 방송을 하는 등 선전활동을 담당하였다.

광복군은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고 우리 여성도 광복군이 되는 것이니 우리 여성들이 참가하지 아니하면, 마치 사람으로 말하자면 절름발이가 되고, 수레로 말하면 외바퀴 수레가 되어 필경은 전진하지 못하고 쓰러지게 됨으로 우리의 혁명을 위하여, 광복군의 전도를 위하여, 우리 여성 자신의 권리와 임무를 위하여 광복군 대열에 용감히 참가하라. - 한국여성동지들에게 일언(一言)을 드림 中 -

이들은 『광복』 창간호에서 ‘한국여성동지들에게 일언(一言)을 드림’, ‘한국여성동지들아 활약하자’ 등을 게재하여 한국 여성들의 광복군 참여를 강하게 호소하였다. 이처럼 일제강점기 대중매체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주된 활동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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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복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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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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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복군 기관지 『광복』


신문·잡지·라디오·전화 등 대중매체의 등장은 한국독립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비록 의지와 다르게 유입된 신문물이었으나, 오히려 이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는 계기가 되었다.

           


         

심용환

성균관대학교 사범대학에서 역사교육학을 전공했다. 현재 팟캐스트 <진짜 역사 가짜 역사>를 통해 재미있고 올바른 역사 이야기를 전파하고 있으며, CBS와 공동으로 <심용환의 근현대사 똑바로 보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헌법의 상상력』, 『심용환의 역사토크』, 『단박에 한국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