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서 답을 찾다
위인을 기른 어머니의 참교육

글 이성주 역사칼럼니스트
위인을 기른 어머니의 참교육
항일 독립운동을 말할 때 백범 김구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가 한국독립운동의 상징이자, 영원한 민족지도자라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위인이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누가 있었을까? 바로 어머니인 곽낙원(郭樂圓) 여사다.
무학(無學), 그러나 자식 교육에 헌신하다
“나는 네가 경기감사를 한 것보다 더 기쁘다.”
1896년 김구는 일본인 쓰치다(土田壤亮)를 처단한 혐의로 인천형무소에 수감됐다.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겠다는 일념 하나로 일본인을 죽인 그가 조선인으로서는 자랑스러웠겠지만, 부모로서는 걱정되었을 게 분명하다. 그러나 곽낙원은 오히려 벼슬을 한 것보다 더 기쁘다며 아들을 격려하고 힘을 실어주었다. 그만큼 그녀의 의연함은 남달랐다.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백범 출산 ▲1896년 아들 김구가 치하포 주막에서 일본인 처단. 옥바라지 시작. 김구 탈주 이후 남편 김순영과 함께 투옥 ▲김구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자 살림을 도맡아 독립운동가들을 뒷수발 함 ▲1926년 귀국 ▲김구가 이봉창?윤봉길 의거의 배후로 지목되자 1934년 다시 상하이로 건너감 ▲1939년 81세 일기로 세상을 떠남
곽낙원은 글을 배우지 못했다. 글을 배우지 못했기에 자식을 더더욱 엄하게 키웠는지도 모른다. 전형적인 엄모(嚴母)라고 해야 할까? 김구가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가차 없이 매를 들고 호되게 혼냈다. 남편 김순영의 병구완을 위해 밥을 짓는 가마솥까지 팔아야 했던 빈궁한 살림살이였지만, 아들 교육에는 아낌이 없었다. 남의 집 허드렛일까지 도맡아 하며 살뜰히 돈을 모았고, 벼루와 먹을 사 아들에게 쥐어주는 어머니였다.
일본의 침략 야욕이 점점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급기야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데에 이르자, 이에 분개한 김구는 일본인을 처단한 것을 시작으로 운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갔다. 이러한 와중에 곽낙원의 기개와 호탕함이 빛났다. 아들 때문에 옥고를 치러야 했지만, 아들을 다그치기보다 오히려 위로하고 의거(義擧)를 응원했다. 또한 이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아들과 함께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김구가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하자, 임시정부의 살림살이를 맡아 ‘독립운동가들의 어머니’로 생활한 것이다.
든든한 지원자이자 엄격한 선생님
예로부터 가정을 지키고 자녀를 가르침에 있어 부모들은 각각의 역할이 정해져 있었다. 엄부자모(嚴父慈母) 즉, 엄한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다. 그러나 곽낙원은 ‘엄한 어머니’였다. 실질적으로 가정을 이끌어야 했던 곽낙원은 평생 매섭게 회초리를 들었다. 그녀가 회초리를 거둔 것이 김구의 나이 예순이 다 될 무렵이었다. 그나마도 아들의 체면을 생각한 배려였다.
“군관학교를 운영하며 많은 청년들을 거느린다 하니 잘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말로 꾸짖고, 회초리를 쓰지 않겠다.”
이때가 언제였느냐 하면 이봉창·윤봉길의 의거로 일제가 김구에게 현상금 60만 원을 걸었을 때였다(지금으로 따지면 60억 원에 이르는 거금이다). 장성한 아들, 그것도 많은 독립운동가를 이끄는 지도자에게 회초리를 드는 노모(老母)의 모습이 상상이 가는가?
또 한 번은 곽낙원의 생일을 맞아 독립운동가들이 생일잔치를 준비하려던 일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알아서 먹고 싶은 걸 사먹겠다며 잔치보다는 돈을 달라고 요구했다. 해서 돈을 모아 주었더니, 다음날 음식이 아닌 권총 두 자루를 사와 김구와 동료들에게 건네는 것이었다. 이는 사소한 경조사를 챙길 때가 아니라 조국의 독립에 충실해야 한다는 따끔한 질책이었다. 이처럼 곽낙원은 아들의 든든한 지원자이자, 아들이 택한 길에 따르는 책임감을 상기시키는 엄격한 선생님이었다.
그녀가 아들의 앞길에 든든한 지원자가 된 것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마땅히 옳은 일’이기 때문도 있겠지만, 그 이전에 ‘아들이 선택한 길’이기에 믿고 응원했던 게 아닐까. 이른바 극성맞은 자녀 교육이 문제되고 있는 요즘이다. 자식의 앞날에 얼룩 한 점이라도 질까, 작은 실패라도 흠이 될까 전전긍긍한다. 자녀의 미래를 생각해 ‘꽃길’만 걷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이 과연 아이에게 좋은 일일까. 진정 자식을 위한다면 고되고 힘들지라도 세운 뜻이 분명한 이상 뒤에서 적극 응원하는 것이 올바른 교육방식일 것이다. 시대를 대표하는 이름, 김구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곽낙원의 교육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부모가 아이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다. 인생은 자기 자신이 설계해야 하고 그에 따른 책임 또한 스스로 질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 아이들이 자라 부모의 도움 없이도 당당히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바람직한 길이다.
이성주
시나리오 작가 겸 역사칼럼니스트.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글쓰기를 목표로 『조선의 민낯』, 『왕들의 부부싸움』과 같은 역사서를 출간한 바 있다. 최근에는 국제정치와 관련된 연구 및 집필에 열중하고 있다.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시리즈 1, 2, 3권을 출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