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

일제의 침략에 대항한 정미의병 의병장 

김상태·신태식·김동신

이달의 독립운동가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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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침략에 맞서 정미의병을 일으키다

1907년 일제가 헤이그특사 파견을 빌미로 강제로 광무황제를 퇴위시키고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시키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해산 군인들이 의병에 참여하면서 전략과 전술이 향상되고, 의병부대 사이에 연합이 모색되어 이인영을 중심으로 결성된 13도 창의군이 서울진공작전을 추진하였다. 각지에서 이어진 의병 항쟁은 일제의 강경진압, 특히 ‘남한대토벌작전’ 이후 국내에서 사실상 활동이 불가능해졌다. 하지만 일부 의병들은 국외로 이주하여 독립군으로 활동하며 일제에 대한 저항을 지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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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Petit Journal』에 실린 해산군인과 일본군과의 전투장면(1907.8.4.)(좌), 구한말 의병부대 (1907.8.)(우) 


김상태, 경북을 중심으로 이강년과 함께 활약하다

김상태는 1862년 충청북도 단양에서 태어났다. 1895년 을미사변, 단발령에 항거하여 경상북도 문경에서 이강년 의병부대의 중군장으로 을미의병에 참여하였다. 1907년 광무황제의 강제 퇴위와 대한제국 군대 해산에 맞서 의병 재기를 준비하며 중군장으로서 이강년과 함께 의병을 이끌었다. 1908년 이강년 의병장이 체포·순국하자 김상태는 의병의 전열을 정비하고 일본군과 항전을 이어나갔다. 700~900여 명의 의병을 이끌던 그는 1911년 일제에 붙잡혀 사형을 언도받고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는 김상태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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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오작대도(束伍作隊圖)(좌), 의병항쟁을 전개하다 일제에 붙잡혀 옥고를 치른 김상태(우)


신태식, 의병에 참여하고 독립군 자금 모금운동을 전개하다 

신태식은 1864년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났다. 1985년 을미의병에 합세하여 밀정 처단 활동 등을 하였다. 1907년 정미의병이 봉기하자 도대장으로 문경에서 이강년, 평해에서 신돌석 의병부대와 연합을 추진하고, 제천·원주·홍천 등지에서 일본군과 맞서 승리를 거두었다. 1909년 다친 몸으로 일본군과 교전하던 중 총상을 입고 붙잡혀 10여 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0년 비밀결사인 의용단을 결성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서로군정서를 지원하였다. 1922년 일제에 의용단 조직이 발각되어 1년간 옥고를 치렀지만 1932년 병으로 서거하기 전까지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는 신태식의 공훈을 기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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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가


김동신, 충청도·경상도·전라도를 넘나들며 활동하다

김동신은 1871년경 전라북도 장수에서 태어났다. 의원(醫員)으로 생활하던 중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1906년 민종식·최익현이 이끄는 의병부대에 참여하고자 뜻을 밝혔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의병부대가 와해되자 1907년 내장산 일대에서 의병을 규합하였다. 삼남의병대장으로 칭하며 충청·경상·전라도로 활동을 넓혔고 1,000여 명이 넘는 부대를 이끌며 일제에 맞서 승리를 거듭하였다. 그러다가 잠시 고향에 머물던 중 일제에 붙잡혀 종신형을 선고 받고 1910년까지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김동신의 공훈을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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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경상·전라지역에서 의병을 이끈 김동신(좌), 김동신 간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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