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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 

장재성·장매성 남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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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류시현(광주교육대학교 교수)



특정 지역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에는 특정 인물의 활동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1894년 1월의 고부항쟁이 한 예이다. 조병갑의 학정이 그 원인이라고 하지만, 비슷한 탐관오리는 전국에 많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고부인가? ‘전봉준과 농민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전의 민란과 달리 고부항쟁은 지역의 경제적 문제를 서울의 정치적 문제로 확장해서 해결하고자 했고, 이러한 움직임은 동학농민운동으로 이어졌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 가운데는 장재성·장매성 남매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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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성·장매성 남매 사진

장재성과 독서회중앙회

장재성은 1908년, 장매성은 1911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회계공무원이었던 아버지 장원용과 어머니 최예언 사이에서 태어나 두 사람은 안정되고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 장재성은 운동도 잘해서 학교 야구팀의 주전 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1926년 11월 당시 광주고보 5학년이었던 장재성은 광주고보생·농고생과 함께 ‘성진회(醒進會)’라는 비밀조직을 만들었다. ‘성진’은 깨어서 나간다는 뜻으로, 식민지 청년으로서 현실을 각성하고 새로운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모임이었다. 이 비밀조직이 바로 광주학생독립운동이란 물줄기의 ‘저수지’였다. 성진회는 매월 2회 토요일에 정기집회를 열기로 하고 경비로는 매월 10전씩을 거두기로 했다. 총무는 왕재일, 회계는 장재성, 서기는 박인생이 맡았다. 하지만 성진회는 활동 5개월만인 1927년 3월 자진 해산했다. 

이후 성진회 회원들은 학교별로 독서회를 만드는 등의 활동에 들어갔다.1927년 초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났던 장재성은 1929년 6월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돌아온 장재성은 ‘조직적 단결을 통한 사회주의의 연구와 실행’을 위해 독서회중앙부를 결성했다. 회합은 일주일에 한 번씩 갖고, 각 학교별 조직을 서두르기로 했다. 광주 시내에는 ‘장재성 빵집’, ‘김기권의 문방구’가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독서회중앙부는 장재성이 책임비서를 맡았고 조사선전부, 조직교양부, 출판부, 재정부 등의 부서를 두었다. 각 학교별로도 독서회중앙부와 유사한 독서회를 결성해 중앙부와 연락이 통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광주고보, 광주농업학교, 전남사범학교에서 독서회가 결성되었다. 광주여고보에서는 장재성의 누이동생 장매성을 중심으로 한 독서회가 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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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진회 회원사진(좌), 장재성 빵집 기사(『중외일보』, 1930.1.15.)(우)

맹휴(동맹휴학)의 시대와 여학생의 비밀결사

민족적 독립운동인 3·1운동에서 특히 주목받은 것은 학생의 등장이었다. 학생들은 거리 시위뿐만 아니라 동맹휴학을 통해 일제에 저항했다. 1920년대 들어가면서 동맹휴학은 학생운동이 학교와 사회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는 일반적인 운동방식으로 자리잡아갔다. 학생운동이 학교당국을 대상으로 한 것을 넘어서 일제에 저항하는 데까지 나아간 것이다.1927년과 1928년에 걸쳐 전국 곳곳에서 동맹휴학이 일어날 때 전라남도 광주에서도 치열한 맹휴가 일어났다. 광주고보와 광주농업학교, 그리고 여학교인 광주여고보에서 맹휴가 잇달았다. 1928년 4월 광주여고보에서 일어났던 맹휴를 경험한 장매성 등의 여학생들은 사회과학을 공부할 필요성을 느꼈다. 같은 해 11월 광주여고보에서는 독서회가 조직되었는데, 소녀회라고 도 불렸다.장매성은 이 자리에서 한국인 여학생은 일제강점기에 남성, 자본가 계급,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3중의 압박’을 받는 존재이기에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참여한 여학생들은 이 말에 모두 찬성하면서 소녀회가 탄생한 것이다. 소녀회원들은 매월 10전씩의 회비를 내어 사회과학 잡지와 서적을 구입해 읽고 토론했다. 이들은 여성 해방, 민족 해방, 계급 해방을 지향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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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고보 맹휴 보도(『매일신보』, 1928.6.28.)(좌), 광주소녀회사건 보도(『매일신보』 1930.10.1.)(우)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이끌다

11월 3일 시내에서 일본 학생들과 격투를 벌인 뒤 흥분해있는 학생들에게 장재성은 “우리의 투쟁 대상은 일본 중학생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다”라고 말했다. 광주학생시위가 학생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임을 천명한 그의 주장은 광주학생들의 시위 참여에 강력한 추동력이 되었다. 장재성은 독서회중앙부의 조직을 통해 학생을 동원하고 격문을 배포하였다. 또한 장석천 등과 함께 학생투쟁지도본부를 결성하고 광주학생을 지도하는 책임을 맡았다. 또한 서울에서 내려온 신간회를 비롯한 사회운동 단체에게 연대와 지원을 요청했다.

11월 12일 시위가 준비되었다. 장매성은 흥학관의 등사판으로 수천 장의 격문을 인쇄하는 일을 맡았다. 흥학관은 당시 광주지역 사회단체와 사상단체의 사무실이 자리한 건물이었다. 이 인쇄물들은 11월 12일 시위날에 배포되었다. 이날 장재성을 비롯한 투쟁본부 간부 대부분이 체포되었다. 한편 광주여고보 학생들은 교문에서 제지당해 11월 12일 시위에는 동참하지 못했다. 광주여고보 학생들은 이틀 후인 11월 14일에 본격적인 시위를 전개했다. 아침부터 교내에서 시위를 벌이고 오후 7시 경에는 교정에서 독립가를 합창하며 만세를 외치고 사감실에 투석을 해 유리창을 파괴했다. 

1930년 1월에는 시위에 참여했던 학생들이 석방되기 전까지 시험에 응하지 말자고 한 백지동맹에 나섰다.1930년 1월 15일 서울에서 여학생연합시위가 일어난 날, 광주에서는 광주여고보 학생 12명이 경찰에 검거되었다. 광주여고보 당국은 백지동맹사건과 학생 12명 검거 사건이 일어나자 강경 대응했다. 곧바로 백지동맹 관련자 및 소녀회 관련자에게 무기정학을 처분하거나 퇴학을 종용했다. 소녀회 관련자 11명은 검거된 지 무려 9개월 만인 1930년 9월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재판이 시작되었다. 검사는 장매성에게 징역 2년을 구형했다. 재판 당시 장매성은 늑막염을 앓고 있었는데, 보석이 허락되지 않았다.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장재성은 1931년 6월에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장매성은 같은 해 10월 6일 열린 1심 공판에서 검사의 구형대로 징역 2년의 실형을 받았다. 장매성은 1년 2개월 14일의 옥고를 치르고 1932년 1월 22일에 가출옥했고, 장재성은 1934년 4월 만기 출옥했다. 장재성은 출옥 후 일본으로 가서 니혼대학(日本大學) 상경과를 졸업했다. 1936년 6월에는 재동경조선인유학생연합회 결성에 참가하여 활동했다. 귀국 후 광주학생독립운동 참가자들과 함께 비밀리에 조직을 모색하던 중 1938년 2월 재차 검거되었다. 한편 장매성은 1938년에 광주고보생으로서 독서회 사건으로 검거되었던 정석규와 결혼했다.

장재성은 광복 직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광주지부 위원, 전남지부 조직부장을 역임했다. 1945년 12월에는 광주청년동맹을 조직하고 의장이 되었다.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에 전남 대표로 참석했으며, 같은 해 3월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 전남지부 결성준비회의 총무부에서 활동했다. 1948년 검거되어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광주형무소에서 수감생활 중 6·25전쟁이 일어났고, 이때 처형당해 43세의 삶을 마감했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소녀회 관계자인 장매성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반면 장재성은 광복 이후의 활동과 행적 때문에 국가공훈자로 선정되지 못하고 있다. 역사에서 ‘도화선’의 역할을 하는 인물이 있다. 고부항쟁과 동학농민운동에 ‘전봉준과 농민들’이 있었듯이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장재성과 장매성 남매 및 많은 한국인 학생들’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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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성(아래 줄 왼쪽)·장매성(위 줄 가운데) 가족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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