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기수(前 한국외국어대학교 스칸디나비아어과 강사)
욘 시구르손은 20세기 초 아이슬란드가 덴마크로부터 자결권과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앞장서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현재 아이슬란드는 욘 시구르손의 탄생일인 6월 17일을 건국기념일로 지정하고 있을 만큼, 아이슬란드인에게 그는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자유와 독립을 억압하는 일체의 것들에 반대했던 그의 정신이 오늘날의 아이슬란드인 삶 속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욘 시구르손(1811.6 .17.~1879.12.7.)
북대서양의 외딴섬 아이슬란드와 지배국 덴마크
북대서양 한 가운데, 그린란드와 유럽 사이에 위치한 섬나라 아이슬란드는 대한민국과 비슷한 면적(약 10만㎢)에 인구는 약 37만 명 정도인 작은 나라이다. 800년대 중반 이후 바이킹으로 불렸던 북유럽 출신 주민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개척되기 시작하였고, 잠시 독립적인 상태로 지내다 노르웨이를 거쳐 14세기 후반부터는 덴마크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러나 두 나라 사이가 너무 멀고 덴마크 입장에서는 아이슬란드가 큰 이익을 주지도 못했기에 아이슬란드는 나름의 자치권한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를 대표하는 것이 930년경 시작되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민주적 의회로 평가되는 알팅(Althing 또는 Alþingi)으로, 이는 아이슬란드인들의 자부심이라 할 만하였다.그러나 17세기 중반 이후 덴마크 왕이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면서 아이슬란드의 자치가 점차 약화되고, 두 나라 사이의 교역을 덴마크가 독점하면서 아이슬란드의 불만이 점차 쌓여갔다. 아울러 화산섬 아이슬란드의 잦은 천재지변은 그나마도 취약한 생존환경을 더욱 힘들게 했는데, 일례로 1783년 라키산(Laki)의 화산 폭발로 목초지 대부분이 소실되고 가축의 80%와 주민의 20%가 희생되는 대참사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여기에 1800년 덴마크 왕이 알팅의 기능까지 완전히 정지시키면서, 아이슬란드인들의 정체성 자체에도 심각한 위기가 닥치고 만다. 지배국 덴마크 역시 나폴레옹 전쟁(1803~1815)에서 나폴레옹의 편에 섰던 것에 대한 과실로 인해 이전까지 지배하고 있던 노르웨이의 지배권을 스웨덴에 넘겨주게 되는 심각한 실패(1814)와 영향력 상실에 직면해 있었다.독립운동의 파도에 올라선 아이슬란드와 욘 시구르손
이렇듯 아이슬란드 내부의 어려운 현실과 지배국 덴마크의 쇠락에 더해 유럽 전역에서 프랑스대혁명 이후 크게 성장하던 민족주의 운동은 당연히 많은 아이슬란드인들에게 덴마크와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할 필요성을 제기하게 된다. 즉 덴마크 국내는 물론 아이슬란드에서도 기존 세력관계에 대한 불만과 그에 대한 개혁을 열망하는 목소리가 힘을 얻게 되었다. 이에 1830년대부터 아이슬란드의 자치권 확대와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학자와 언론인 등 지식인 계층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20세기 초까지 아이슬란드가 덴마크로부터 자결권과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쏟은 전체적 노력을 ‘아이슬란드 독립운동(Sjalfstæðisbaratta Islendinga)’이라 말한다. 이중 가장 주목할 만한 사람이 바로 ‘현대 아이슬란드의 아버지’로 평가되는 욘 시구르손이다. 아이슬란드 서부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욘 시구르손은 1833년 덴마크로 넘어가 수도 코펜하겐 대학에서 역사학과 문헌학을 공부하였다. 대학 졸업 전부터 그는 아이슬란드 역사 및 다양한 영웅담과 전설에 관한 귀중한 필사본 연구소에서 근무하면서 자연스레 관련 분야 최고의 전문가로 성장하게 된다. 이후에도 덴마크와 스웨덴 등지에서도 다양한 연구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학술지 발간을 통해 아이슬란드 고유의 역사와 정체성, 자치, 각종 행정 처리에 관한 견해를 지속해서 피력하게 된다. 자연스레 코펜하겐에 있던 그의 집은 덴마크에 거주하던 아이슬란드인들의 중심지로 기능하기도 하였다.우리 모두는 거부한다!
욘 시구르손은 그간의 연구 및 정치활동의 경험을 통해 아이슬란드의 오랜 영토와 사람, 언어에 기초한 자유로웠던 시절의 회복과 국가 건설이라는 방향을 정립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생각이 아이슬란드 민족주의의 토대를 이룬다. 아이슬란드의 자결권 증진 및 새로운 입법 요구가 지속되자 덴마크 왕이 아이슬란드 관련 현안 자문위원으로 욘 시구르손을 선임하게 되면서, 욘 시구르손은 자신의 견해를 현실 정치에 본격적으로 반영하기 시작한다. 그가 이끄는 민족주의와 독립운동 과정에서 아이슬란드의 자부심 알팅이 1843년 복원되었으며, 1851년 아이슬란드의 자결권을 제한하고자 하는 덴마크 의회의 입법도 실패로 돌아간다. 이때 그는 아이슬란드인을 대표하여 해당 시도에 대해 “우리(아이슬란드인) 모두는 거부한다!”고 선언하여 향후 아이슬란드 독립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노력이 축적되어 1854년에는 아이슬란드 교역의 자유, 나아가 1874년에는 아이슬란드가 예산 집행과 헌법을 제정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는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이러한 성과와 영향력으로 많은 아이슬란드인들은 그를 ‘(알팅의) 의장 욘’ 또는 ‘지도자 욘’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이런 정치적 측면에서의 활동 못지않게 그는 현재까지도 고대 북유럽 영웅담과 신화, 어학, 아이슬란드 역사, 법률, 고문서 등과 관련해 가장 왕성한 학문적 활동을 한 아이슬란드 학자로 평가될 정도 학자 본연의 활동에도 충실했던 사람이었다. 한편으로 아이슬란드인에 대한 차별 철폐, 농업과 어업기술의 현대화에도 크게 기여하면서 그는 아이슬란드 자치와 독립의 상징적 인물로 더욱 각인될 수 있었다. 즉 일생에 걸쳐 소박하고 청렴하였으며, 사람을 아끼는 한편 본인의 본래 직업(학자)에도 충실했던 인간적 면모 또한 이 사람을 아이슬란드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자로 꼽기에 충분한 이유라 할 것이다.
완성된 아이슬란드의 독립
욘 시구르손은 1879년 사망하여 생전에 아이슬란드 독립을 목격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의 사후에도 아이슬란드 독립운동은 지속되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 12월 아이슬란드는 연합국 형태로 덴마크 왕이 다스리는 독립된 주권 국가(외교와 국방은 덴마크가 처리)로 드디어 독립을 쟁취하게 된다. 독일이 덴마크를 점령하고 있던 제2차 세계대전 말기 1944년 6월 덴마크 왕과의 관계도 완전히 단절하고 공화국으로 완전한 독립을 이룬다.
비록 욘 시구르손의 생전 공식적 독립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자신들의 역사와 사람, 언어에 대한 사랑에 기초한 민족적(국민적) 각성과 공감대 형성을 통해 평화적 방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며, 향후 주변국과의 안정적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아이슬란드와 같은 소국이 독립을 쟁취하는 데 있어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라는 그의 사상은 이후의 아이슬란드 독립운동 과정에서도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아울러 현재 아이슬란드의 건국기념일이 욘 시구르손의 탄생일인 6월 17일에 기념될 뿐만 아니라 아이슬란드 지폐(500 ISK)와 각종 우표에도 그의 초상이 새겨진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욘 시구르손은 자유와 독립을 억압하는 일체의 것들에 단호히 반대하는 그의 정신과 함께 오늘날까지 자주독립국 아이슬란드인들의 삶 속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6월 17일 아이슬란드 국회 욘 시구르손 동상 앞에서 거행되는 건국기념일 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