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 편집실
의병 항쟁에서 활약한 신태식
신태식(申泰植, 1864-1932)은 1895년 단발령을 계기로 의병을 일으켰다. 이후 1907년 8월 3일 단양에서 의병 수백 명을 모집하여 도대장에 취임하고, 울진·평해·영양·영덕·영월·제천·원주·홍천·철원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그의 휘하 장졸로서는 도선봉에 김세영·좌선봉에 강창근·중군에 유제칠·참모에 엄해윤·영솔에 조수안·별포에 김운선 등이 있었다. 작전 전개에서 이강년 의병부대와 합세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1908년 9월 홍주 전투에서 물러나 횡성으로 퇴각할 때 적탄에 맞아 어깨에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양주 산안 전투에 참전하여 일본군을 사로잡아 총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12월 14일 영평 전투에서 왼쪽 다리에 총상을 입고 일본군에게 붙잡혔다. 그는 1909년 2월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나, 상고하여 10년으로 감형되었다.

갈평전투지 전경(좌), 갈평전투지 경모각(우)
이강년의병 갈평전투지
1907년 9월 이강년이 이끄는 의병부대가 전투를 벌인 곳이다. 이 전투에서 신태식 부대와 이인영 부대가 이강년의 주력 부대와 연합하여 큰 승전을 이뤄냈다. 이곳에는 현재 1967년에 세운 기념비와 1973년에 세운 경모각이 있다.
주소
경북 문경시 문경읍 갈평리 산 127-2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 조직
1918년 1월에 출옥한 신태식은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을 조직하여 군자금 모집활동을 펼쳤다.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은 1920년 3월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이다. 1919년 5월 서간도의 무장항일운동단체는 서로군정서를 결성하였다. 서로군정서의 재정은 한인의 헌금으로 유지되었는데, 경상도 지방에서 재정 후원을 위한 비밀결사로서 조직된 것이 조선독립후원의용단이었다. 신태식은 경상북도 단장을 맡아 동지 규합 및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벌였으나 이듬해 기밀이 드러나 붙잡히고 말았다. 신태식은 1922년 12월 대구감옥에 수감되었다가 1923년 12월 징역 1년을 언도받았다. 1924년 6월 출옥 후에도 항일투쟁을 펼치다 1932년 69세로 서거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신태식 생가 전경(좌), 신태식 생가 정면(우)
신태식 생가
「신태식 판결문」과 「이응수 등 판결문」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신태식의 집은 일제에 의해 일부 소실되었고, 홍수 피해 등으로 사라졌던 것을 새롭게 복원하였다. 오늘날 경상북도기념물 제153호로 지정되었다.
주소
경북 문경시 가은읍 섬안길 7-2 (민지리 1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