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인연

미주지역 독립운동 통합에 

온몸을 던진 한시대·박영숙 부부

아름다운 인연

글 김형목(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일찍이 하와이로 건너간 한시대는 사업가로서 성공을 거두면서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대한인국민회와 재미한족연합위원회 활동을 통해 재미 한인사회를 통합하였으며, 평생을 임시정부 후원 및 외교·선전 사업에 주력하였다. 그와 부부의 연을 맺은 박영숙 또한 신한부인회 서기를 시작으로 대한여자애국단 딜라노 지부 재무를 맡는 등 광복을 위한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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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숙·한시대

한시대, 아버지를 따라 민족의식에 눈뜨다

한시대는 1889년 9월 황해도 해주에서 아버지 한준상과 어머니 문성선 사이에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한준상은 국민회 창립 직후 새크라멘토지방회 총무로 활동하고,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에 앞장선 인물이었다. 한시대는 1903년 부모를 따라 하와이로 건너갔다. 그는 호놀룰루 한인기숙학교에 입학한 후 밀스(Mills)학교로 전학하였다. 밀스학교는 1892년 중국인을 위해 호놀룰루 시내에 설립된 학교였으나 당시 재학생 중에는 한인 학생들이 많았다. 그는 일찍이 하와이로 이주하여 하와이 호놀룰루 한인기숙학교를 다니던 박영숙과 인연을 맺고 약혼하였다. 1913년 7월 두 사람은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고, 한시대는 로웰고등학교 4학년에 편입 후 그해 12월 졸업하였다.


사업가로 성공하여 민족운동을 지원하다

이후 박영숙과 결혼한 그는 멘티카에서 사탕무농장을 경영하였다. 농장 규모는 150에이커로, 당시 멘티카에서 농사를 짓던 한인들 가운데 두 번째로 넓은 땅이었다. 사탕무농장을 시작으로 다뉴바와 딜라노에서 포도와 채소 농장을 경영하여 마침내 한가(韓家)회사를 일구어냈다. 그는 멘티카에서 아버지를 도와 대한인국민회 멘티카지방회를 설립하며 민족운동에 첫 발을 내딛었다. 아버지는 초대 회장, 그는 법무원에 선임되어 부자가 함께 활동하였고, 이는 온 가족이 민족운동에 투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생활근거지를 다뉴바로 옮겨 농장 경영과 함께 노동주선인으로 생활하였다. 

이 시기 대한인국민회 다뉴바지방회는 통상회를 개최하고 한시대를 회장으로 선임하였다. 이듬해 한시대는 다뉴바지방회 회장 이순기와 함께 다뉴바의 대의원으로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대의원회에 참석하여 한인사회 발전책을 제안하였다. 한편, 대한인국민회의 재정 모금활동은 제1차 세계대전 종결 직후부터 시작되었으나 3·1운동 이후 본격화되었고, 107,792달러 61센트에 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1918년 당시 농장이나 철도 노동 등의 임금 수준은 월 30∼60달러에 불과했고, 대한인국민회 1년 예산이 1만 달러였던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거금이었다. 참여자도 1,652명으로 이는 미주한인 절반가량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이뿐만 아니라 독립의연금을 모금할 때 한시대는 온 가족과 함께 참여하였다. 아버지 20달러, 어머니 20달러, 한시대 550.85달러, 부인 박영순 20달러, 큰아들 15달러, 둘째 아들 15달러, 동생 25달러 등 총 665.85달러였다. 또한 구미위원부의 외교활동을 돕기 위해 김호·사병순과 함께 1,750달러를 전달하였으며, 워싱턴회의를 대비한 외교활동비를 모금할 때도 특별외교비를 지원하였다.한시대는 다뉴바에서 국민대표회기성회를 결성할 때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적극 지지하였다. 당시 미주 한인사회에서는 국민대표회 소집 문제를 둘러싸고 찬반양론이 일어났다. 다뉴바 한인들은 국민대표회 개최를 지지하였고, 이때 한시대는 부인 박영순과 그의 부모와 함께 참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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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가주 딜라노의 한시대 농장

민족교육에 힘을 기울이다

통합운동에서 한시대가 수행한 가장 의미 있는 일은 하와이의 대한인국민회와 동지회를 결집한 해외한족대회 개최였다. 이는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결집하여 통일된 독립운동을 전개하자는 취지였다. 주요 내용은 독립 전선의 통일, 임시정부 봉대, 외교운동을 위한 주미외교위원부 설치, 미국 국방공작의 원조, 독립금으로 재정통일,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설치 등이었다. 이로써 미주한인사회는 하와이와 북미의 모든 한인 단체들이 통일된 독립운동을 추진할 수 있었다.

태평양전쟁 발발에 한시대는 중앙집행위원장의 이름으로 특별 포고를 발표했다. “미국은 반드시 일제를 이길 것이고, 이렇게 되면 한국 광복의 기회가 도래하므로 미주한인들은 미국을 돕는데 노력할 것”을 당부하였다. 1943년에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장과 집행부위원장으로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이끌었다. 한국독립문제가 국제 열강으로부터 주목을 받고 충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활발히 독립운동을 전개할 때 재미한인사회를 주도하였다. 동시에 신한민보사장으로 언론 발전에 이바지했다.

이승만과 주미외교위원부 개조를 둘러싼 논쟁이 일자 임시정부의 훈령에 따라 재미한인 전체대표대회를 개최하였다. 전체대표대회의 결과마저 무시되자 마침내 임시정부와 결별한 후 워싱턴사무소를 외교활동의 거점으로 삼고 독자노선을 추진하였다. 1945년 4월 샌프란시스코회의가 개최되자 한시대는 국제회의 대비를 위한 방안으로 해외한족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는 해외한족대표단 단장을 맡아 샌프란시스코회의에 대비한 선전외교활동을 추진했다. 이 단체는 임시정부대표단(단장 이승만)과 대립하여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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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한족연합위원회 기념사진(대한인국민총회 건물 앞,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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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회의에 대한 한국대표단의 성명서

박영숙, 시어머니와 함께 독립운동에 나서다

박영숙은 1891년 7월 20일 경기도 강화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하와이로 이주하여 호놀룰루 한인기숙학교를 다녔다. 유학을 목적으로 약혼자 한시대와 함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 직후 1914년 9월 한시대와 부부의 연을 맺은 그는 미국식으로 남편 성을 따라 한영숙(韓英淑, 韓英菽, Louisa P.Hahn)이 되었다. 그는 시어머니 문성선이 강원신·한성실 등과 신한부인회를 조직할 때 함께 참여해 서기로 선정되었다. 이어 다뉴바에서 신한부인회와 새크라멘토의 한인부인회 통합이 결정되었다. 북미지역 여성단체를 통합하여 대한여자애국단을 창설할 때는 신한부인회를 대표하여 합동 발기자로 참여했으며, 총부위원으로서 1924년까지 활동하였다. 또한 남편과 함께 대한인국민회 다뉴바지방회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미주지역 여성운동을 이끌다

박영숙은 안에서는 자녀 양육과 남편 내조에 힘썼고, 밖에서는 여성운동에 매진하였다. 대한인국민회 딜라노지방회가 조직되자, 9년 동안 남편과 함께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대한인국민회 창립기념식, 3·1기념식, 故 안도산 선생 추도식 등에서 노래와 사회 등을 맡아 행사와 기념식을 빛냈다. 또한 흥사단 단우로 입단하여 활발한 활동을 펼쳐 미주지역 여성들에게 자존감을 일깨웠다.그뿐만 아니라 대한인국민회 기관지 『신한민보』의 식자기계 의연 모집위원회 수전위원을 맡은 그는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딜라노지방 대한여자애국단 단원들과 함께 500달러를 임시정부로 보냈다. 이를 계기로 딜라노에 정식으로 대한여자애국단 지부를 조직하고 재무로 선정되어 1942년까지 활동하였다. 대한여자애국단 딜라노지부 단장으로서 주미외교위원부 개조를 위한 전체 대표회와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전체대표회에 대한여자애국단 대표로 참석했다. 

이처럼 3·1운동부터 광복 때까지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거나 여권 신장에 온몸을 던졌다. 그의 일생역정은 한시대 일가의 ‘대들보’로 평가해도 절대 과장이 아니다. 한영숙은 노년까지 딜라노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65년경 사망하였다. 정부는 미주지역 독립운동 통합을 이끌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공훈을 기려 한시대에게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2017년 한영숙에게 건국포장을 각각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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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대·박영숙의 가족 사진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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