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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서 ‘중앙’으로 확산된

광주학생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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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류시현(광주교육대학교 교수)



일제에 대항하는 저항을 민족운동 혹은 독립운동이라고 일컫는다. 3·1운동(1919년), 6·10만세운동(1926년), 광주학생독립운동(1929년)은 3대 민족운동으로 평가되고 있다. 다른 두 민족운동이 중앙(서울)에서 시작해서 지방으로 확산된 것과 달리, 광주학생독립운동은 광주에서 시작되어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되었다. 아울러 두 운동이 전국단위의 ‘민족’이 참여한 것에 비해, 광주학생독립운동은 ‘학생’ 중심으로 이루어진 점에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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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내에서 시위를 벌이는 학생들 모습(1929)

사건의 발단이 된 나주역 ‘충돌’

광주학생독립운동은 1929년 10월 말 나주역에서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의 ‘충돌’이 계기가 되었다. 광주에서 나주로 통학하는 학생들의 하교 길인 나주역 개찰구에서 광주중학교에 다니는 일본인 학생이 광주여고보 박기옥 등 여학생을 밀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박기옥의 사촌동생이자 광주고보 2학년생인 박준채가 이들과 언쟁하고 격투를 벌였다. 나주역의 일본인 경찰이 이에 개입해서 일본인 학생의 편을 들고 박준채의 따귀를 때렸다. 이 사건 직후 국내 언론이 강조한 일본인 남학생이 조선인 여학생을 대상으로 한 ‘희롱적 언동’과 일본인 경찰의 민족적 차별 등의 요소는 광주학생시위로 전개·확산되는 데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 반면 일제는 나주역 사건을 사소한 ‘말다툼’으로 축소하거나 일본 경찰의 폭행을 ‘낭설’이라고 규정함으로써 민족적 차별에 관한 공분 확산을 차단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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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광주여고보 박기옥(오른쪽), 광주고보 박준채, 당시 나주역 모습

두 차례 광주학생시위가 일어나다

일제강점기 ‘한국인 학생’이라는 신분·계층은 다양한 의미의 존재였다. 일제 권력은 식민지 한국인 학생을 식민권력에 대항했기 때문에 감시·통제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했으며, 다른 한편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는 정도의 경제적 여유를 지닌 학부형의 사회 신분 때문에 탄압의 강도를 높일 수 없었다. 또한 민족운동진영에서도 ‘학생’은 새로운 ‘주역’으로 기대감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보호되고 지도받아야 할 존재로 규정되었다. 반면 당대 학생들은 스스로 독립·해방과 같은 민족적 과제 해결의 주체로 성장했다. 한편 광주는 전라남도의 교육 중심지였다. 한국인 중등교육기관으로 광주고등보통학교·광주농업학교·전남사범학교·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가 있었으며, 일본인 중등 교육기관으로 광주중학교가 있었다. 이러한 중등 교육기관이 공존하고 있는 곳은 전국에서도 서울을 제외하고, 광주와 대구·부산·평양·신의주 정도였다. 광주지역 학생들은 일본인 학생을 보호하고, 한국인 학생에게 물리적 폭력을 행사한 일본 경찰의 차별적 대처뿐만 아니라 한국인 여학생에 관한 일본인 남자 중학생의 희롱이라는 사안에 함께 분노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도화선 역할을 담당했던 광주학생시위는 1929년 11월 3일과 12일에 걸쳐 두 차례 일어났다. 11월 3일 1차 광주학생시위의 추이를 살펴보면, 그날 오전 광주시내에서 일본인 중학생과 광주고보생의 물리적 충돌이 일어났다. 이후 광주중학교 기숙사생 백 수십여 명이 현장에 왔고, 광주고보 기숙사에 살고 있는 학생들과 대치하다가 경찰, 학교 직원, 소방서원의 제지로 각각 학교로 되돌아갔다. 이날 오전에 있었던 대립은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시위운동의 모습은 아니었다. 우발적인 충돌에서 조직적인 시위로의 전환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이날 오후 광주고보생의 모임에서 즉시 광주중학교를 ‘습격’할 것인가 아니면 광주 시내에서 일반시민을 대상으로  시위행진을 진행할 것인가 여부가 논의되면서 광주학생시위의 본격적인 모습이 갖춰졌다. 

‘격양된 분위기’와 조직적 시위운동의 주장 사이의 대립에서 독서회 회원들의 활동이 주목된다. 이들의 강한 조직력과 실천력이 발휘된 순간이었다. 독서회 회원들은 시위운동을 적극 주장했으며, 또한 시내 중심지에서의 시위에 선두로 참가함으로써 ‘격양된 분위기’를 조직적인 시위로 전환시켰다. 이 과정에서 전남사범학교 학생과 광주여고보의 일부 학생들이 1929년 11월 12일 2차 시위 대열에 참가했다. 조직과 학생운동의 결합이었다. 학생들의 배후에는 장재성, 장석천 등 사회단체 참여 인물이 있었다. 이들을 통해 광주학생시위의 확산과 서울 지역과 연대가 모색되었다. 1차 시위와 달리 2차 시위는 학생뿐만 아니라 시민을 대상으로 전개되었다. 2차 시위에서는 4종의 격문이 제작·배포되었는데, 학생들에게 “용감히 싸워라 학생대중이여! … 우리들의 승리는 오직 우리들의 단결과 희생적 투쟁에 있다!”라며 단결을 강조하였다. 반면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한 격문에서는 “검거자의 석방” 주장과 함께 “언론·집회·결사·출판의 자유를 획득하자”는 등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의 성격이 강하게 표명되었다. 이렇듯 11월 12일의 2차 광주학생시위는 이후 전개될 전국단위의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전형적인 패턴이 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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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독립운동 관련 기사(『중외일보』, 1929.11.5.)

광주에서 전국적 학생독립운동으로 확산

1929년 11월의 광주학생시위는 1930년 3월까지 전국적으로 일어난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전체 성격과 지향점이 형성되었다. 반면 일제는 한국인에 대해서 강제탄압과 언론통제에 영향을 끼쳤다. 언론이 통제된 상황에서 광주학생에 동조하는 시위는 1929년 11월 19일 처음으로 일어났다. 이러한 과정에서 학생이라는 연대의식이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 목포상업학교 독서회원은 진상조사를 위해 광주로 왔고, 장재성은 이들에게 연대 투쟁을 부탁했다. 목포공립상업학교는 11월 19일 시위를 시작으로 같은 학생 신분이라는 공감대를 이루며 점차 광주학생시위는 전국 단위의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확대되어 갔다. 일제의 광주지역 학생 탄압의 강도가 높아지면서, 공분은 확산되었다. 1929년 12월에 들어가면서 광주학생시위는 연대의식 속에서 전국적인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확대되었다. 같은 달 서울 등의 주요 도시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1930년 1월부터 3월까지 이어진 광주학생독립운동에는 북으로는 함북 회령, 남으로는 전남 제주까지 전국 280여 개 학교가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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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 뿌려진「격문」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의의

광주학생독립운동은 1929년 10월 말 나주역 사건에서 시작되어 같은 해 11월 광주지역에서 2차례의 학생·시민 시위를 거쳐 1930년 3월까지 전개된 일제에 저항한 민족운동이었다. 광주에서 시작되었지만, 학생들의 요구 사항은 광주만의 현상이 아니었다. ‘식민지 교육 철폐’라는 정치적 요구가 이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 한편 광주라는 공간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출발점에서 그 역할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1929년 11월 3일과 11일의 2차례의 광주학생시위는 민족적 과제를 운동의 방향으로 설정함으로써 추후 전개될 광주학생독립운동의 기본적인 모델을 제시했다. 또한 광주학생독립운동이란 전국적인 시위과정에서 항상 ‘광주 구속학생의 탈환과 석방’의 내용이 빠지지 않았던 것은 연대의식의 발로였다. 광주학생시위와 광주학생독립운동은 3·1운동과 6·10만세운동의 연장선상에 그 역사적 의미가 부여되었다. 당시 민족운동진영에서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을 통해 3·1운동과 같은 민족적 연대의 경험을 재현하고자 기대했다. 실제로 광주학생독립운동의 경험은 1930년대와 1940년대 학생운동으로 이어졌다. 특히 전시체제기에 비밀결사운동으로 계승되었다. 그리고 광복 후 학생들의 정치적 참여 의식은 4·19혁명 등으로 이어져 한국 민주주의 발전의 중요한 한 축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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