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소병국(한국외국어대학교 말레이·인도네시아어과 교수)
네덜란드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인도네시아는 1945년 8월 17일 마침내 독립을 이루어냈다. 그 중심에는 인도네시아의 ‘독립의 아버지’라 불리는 수까르노가 있다. 그는 인도네시아의 통합을 도모하고 식민 당국과 협력하지 않으며, 대중운동을 통해 독립을 달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수까르노(Sukarno, 1901~1970)
인도네시아국민당을 출범해 투쟁을 이끌다
1901년 탄생한 수까르노는 1916년 마자꺼르따의 유럽식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수라바야에서 유럽식 중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스마운·무쏘 등 당시 저명한 정치인들과 접촉하면서 사회주의와 반식민주의 이념의 영향을 받았다. 1921년 반둥공과대학 입학 후 다우어스 데커르·찝또 망운꾸수모와 함께 일종의 정치 토론 모임인 반둥스터디클럽을 결성했다. 1926년 반둥공과대학에서 공학사 학위를 취득한 직후부터 반식민지 운동에 가담했다.
1928년 5월 수까르노의 주도로 반둥에서 인도네시아국민당(이하 PNI)이 출범했다. PNI는 인도네시아 통합을 도모하고 식민 당국과 협력하지 않으며, 대중운동을 통해 인도네시아 민족주의를 고양해 독립을 달성하는 것을 투쟁의 목표로 정했다. 이러한 기류는 같은 해 10월 28일 개최된 제3차 인도네시아 청년회의에서 역사적인 숨빠 뻐무다(Sumpa Pemuda, ‘하나의 국가, 인도네시아 국가; 하나의 민족, 인도네시아 민족; 하나의 언어, 인도네시아어’란 슬로건을 채택한 청년의 맹세) 선언으로 이어졌다.
이 선언과 더불어 1929년 말까지 PNI의 당원이 급속히 증가해 그 수가 1만 명에 달하자, 이에 놀란 식민 당국은 수까르노를 비롯해 PNI 지도자 8명을 체포했다. 지도력 공백이 생긴 PNI는 1931년 4월 해산되었다. 그해 12월 석방된 수까르노는 1932년 8월 해산된 PNI 회원들이 새롭게 결성한 인도네시아당(Partindo)의 당수가 되었다. 이후 반식민지 투쟁을 위한 조직 재건에 힘을 쏟은 그는 1933년 8월 다시 체포되어 동부 인도네시아 플로레스섬의 감옥으로 끌려갔다. 이처럼 식민 정부의 강력한 탄압으로 1934년 말까지 수까르노를 비롯한 반식민주의 지도자들 대부분이 구금되었다. 그 결과 태평양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반식민주의 민족주의 운동은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는 수까르노(1945.8.17.)
수까르노의 독립 선언
태평양전쟁의 전운이 동남아시아 전역을 덮친 가운데 일본은 1942년 3월 8일까지 인도네시아 군도를 점령했다. 이로써 자바전쟁(1825∼1830) 이후 100여 년 동안 지속된 네덜란드의 식민지배가 일시에 종식되었다. 한편 일제하에서 인도네시아의 독립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1943년 초부터 전세가 일본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자, 일본 군정은 각종 기유군(의용군) 조직을 만들어 대중동원에 힘을 쏟았다. 전쟁이 끝날 무렵, 그들의 수는 자바에서 3만 7000명, 발리에서 1600명, 그리고 수마뜨라에서 2만 명에 달했다. 이 집단들은 전쟁 직후 1945년 11월 수디르만 장군의 휘하에 창립되어 인도네시아 독립 쟁취에 크게 기여한 인도네시아국군(TNI)의 근간이 되었다.
1944년 9월 7일 일본 수상은 “전쟁 패배 위기에 직면해 인도네시아 독립운동지도자들의 협력을 얻기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독립이 임박했다.”고 공개 선언했다. 이에 따라 1945년 3월 인도네시아독립준비위원회(이하 BPUPKI)를 설립되었고, 5월 말 그 첫 번째 회합이 수까르노를 포함해 62명의 독립운동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자까르따에서 열렸다. 열띤 토론 끝에 자바의 무슬림들과 이외 인도네시아 군도에 거주하는 비무슬림들과의 국민통합을 고려해 이슬람 국가가 아닌 세속 국가를 세우기로 합의했을 뿐만 아니라, 대통령 중심제와 단일 공화국을 근간으로 하는 인도네시아 최초의 헌법인 ‘45년 헌법(UUD 45)’을 입안했다. 그해 8월 6일 수까르노를 의장으로 한 독립 준비 실무위원회가 자까르따에서 발족했다. 그러던 중 8월 15일 일본이 갑작스럽게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연합군의 재진주가 임박한 가운데 독립운동지도자들은 독립 선포에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일본의 후원 하에 진행되던 독립 계획과 선포를 연합군이 부정할까봐 우려했기 때문이다. 수까르노는 일단의 급진적인 청년의 제의를 전격적으로 수용해 8월 17일 자신의 집 앞에서 “인도네시아 국민은 이 선언서로써 인도네시아 독립을 선언한다.”는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 이로써 수까르노 대통령이 이끄는 공화국 정부는 독립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걸어야 했다.
혁명을 통해 독립을 쟁취한 수까르노
전후 인도네시아의 재식민지화를 노리는 네덜란드의 복귀가 임박하자, 공화국 정부의 지도자들은 국가의 미래를 위한 대책 마련을 시작했다. 몇몇 지도자들은 전쟁 중에 독립을 위해 일본과 협력한 수까르노의 전력을 문제 삼았다. 결국 샤흐리르를 수상으로 한 새로운 내각이 구성되었다. 이는 인도네시아공화국이 투쟁보다는 협상을 위해 친네덜란드 인사를 전면에 내세웠음을 의미했다. 대통령이었던 수까르노는 독립이라는 대의를 위해 뒤로 물러나는 쉽지 않은 결단을 내렸다.
협상과 교전이 반복된 가운데 인도네시아공화국 세력이 수세에 몰렸고, 냉전 중에 공화국 지도자들의 사회주의 성향을 의심한 서방 세계의 지지도 미온적인 가운데, 1948년 세계적으로 공산주의 약진이 선명해졌다. 내전 중인 중국에서 공산당군이 국민당군을 압도하기 시작한 데다 소련의 베를린 봉쇄 등이 서구 자유주의 진영을 긴장케 했다. 그러는 동안 외교적으로 인도네시아 혁명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48년 8월 인도네시아공산당(이하 PKI)을 초창기에 이끌다가 1927년 미낭까바우 봉기 후 소련으로 망명했던 무쏘가 모스크바의 지령을 받고 인도네시아로 돌아왔다. 그의 주도하에 9월 18일 PKI 지지자들이 동부 자바의 마디운을 점령하고 인도네시아사회주의공화국을 선포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혁명의 일선에 다시 선 수까르노는 공산주의자들을 강하게 비난하면서, 실리왕 사단을 마디운으로 급파해 치열한 전투 끝에 PKI 반란을 진압했다. 소위 ‘마디운 쿠데타’ 진압을 기점으로 미국을 포함한 자유주의 진영은 수까르노의 이념적 성향에 대한 의심을 거두고 인도네시아 혁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기 시작했다.
1948년 12월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공화국 정부의 전복을 위해 대대적인 군사행동을 감행했고, 순식간에 인도네시아공화국 수도인 욕야까르따를 점령했다. 이 무렵 국제사회 분위기가 인도네시아공화국 정부에게 우호적이었고, 유엔은 정전과 1950년 7월 1일까지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보장할 것을 네덜란드에 강력하게 요구했다. 더욱이 미국은 네덜란드에 대한 원조를 연기하고, 마셜플랜에서 네덜란드를 제외하겠다고 압박했다. 결국 1949년 8월 23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원탁회의를 따라, 12월 27일 수까르노와 하따를 각각 초대 대통령과 부통령으로 한 인도네시아연방공화국이 출범했다.
인도네시아의 혁명은 무장투쟁과 냉전의 와중에 외교적 노력의 결합으로 가능했다. 세계의 공산화를 우려하던 미국의 반식민주의는 반공산주의와 강하게 결합되었고, 이것이 마디운 쿠데타를 계기로 인도네시아 혁명에 촉진제 구실을 했다. 하지만 우호적인 외부 환경이 조성되었다 해도 인도네시아 내부에 혁명을 이끌 동력이 부재했다면 그 효과가 미진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수까르노가 이끄는 인도네시아공화국 정부를 중심으로 한 모든 혁명세력의 결집과 외교적 노력의 결합이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나라 인도네시아를 탄생케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