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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고학생친목회를 중심으로 

임시정부를 후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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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성순(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 이후 개최되는 태평양회의를 한국독립운동을 위한 절호의 기회로 활용하고자 총력을 기울였다. 태평양회의에 한국독립을 청원하는 「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서」를 전달하거나, 임시정부 국내 운동거점 조직인 반도고학생친목회를 중심으로 태평양회의를 후원하는 등 많은 노력이 이뤄졌다. 반도고학생친목회를 중심으로 임시정부를 후원한 장형의 활약상을 조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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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형

대태평양회의외교후원회와 반도고학생친목회의 결성

임시정부의 태평양회의 대책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진 것은 경비 조달 문제였다. 파리강화회의 때 준비 부족으로 재정의 곤란을 겪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임시정부는 1921년 8월 13일 상하이에서 대태평양회의외교후원회(對太平洋會議外交後援會)를 발족시켰다. 재무차장 이유필(李裕弼)은 외교후원회가 설립되어 재정후원자가 벌써 수백 명에 이르렀다고 발표하였으나, 현실에서는 경비문제가 아직도 심각하다는 점을 토로하였다.  

같은 날 국내 서울에서는 장형(이명 장세담)을 총재로 하는 반도고학생친목회(半島苦學生親睦會)가 조직되었다. 장형은 신민회 활동 시기부터 양기탁·유동열·김구·이시영 같은 신민회 요인들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였고, 1910년대 초반에는 국내에서 망명하는 청년들을 신흥무관학교로 인도하는 특무공작을 수행했던 독립운동가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만주의 독립군 부대들이 등장했을 때도 이들에게도 군자금을 제공하였다. 그러던 중 상하이에서 대태평양회의외교후원회가 설립되던 같은 날짜에 국내에서 반도고학생친목회를 조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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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필(좌) / 반도고학생친목회 조직 사실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 (1921.8. 20.)(우)

상공진흥회가 조직한 반도고학생친목회

반도고학생친목회는 고학생 단체를 표방하였으나, 실제로는 상공진흥회라는 단체의 인물들이 특수한 목적을 위해서 별도로 조직한 임시 기구였다. 상공진흥회 본부회장 역시 장형이었다. 상공진흥회는 명칭상 경제인 모임을 표방하였으나, 그 구성 인물들은 거의 대부분 독립운동가·교육운동가·청년운동가·언론인 등 독립운동과 민족운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다. 장형은 반도고학생친목회를 별도로 조직한 후 총재직을 겸직하였다.         

특히 상공진흥회 인물들 중에는 임시정부와 각별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 본부회장 장형은 물론이었고, 선천지회의 이영찬은 임시정부에서 교통부를 설립했을 때 교통부위원으로 활동했던 인물이었다. 그밖에 상공진흥회에는 독립군자금을 모집하던 인물들도 여러 명 포진해 있었다. 상공진흥회는 연통제가 실시되던 당시에 국내 각지에 연락거점을 설치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태평양회의 후원 조직이 필요해짐에 따라서 별도로 조직한 단체가 반도고학생친목회였다. 고학생 단체를 표방한 것은 문화정치의 영향으로 청년단체의 설립과 활동이 비교적 용이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가 당시 국내 각계 인사들의 서명을 받아 한국독립을 청원하는 문서인 「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서」를 번역해서 워싱턴에 있는 태평양회의 주최 측에 전달하였을 때 반도고학생친목회 측에서는 총재 장세담·부회장 김시규·고문 김준의 이름으로 이 문서에 서명 날인하였다. 장형의 반도고학생친목회가 임시정부에서 추진하던 태평양회의 후원사업과 관련되어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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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홍(좌) / 『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서』 일부_하단에 반도고학생친목회 대표 장세담(장형의 이명)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우)

독립운동 자금 조달에 공헌한 장형과 여운홍

임시정부의 대태평양회의외교후원회에서는 태평양회의에 대한 국내에서 여론 환기와 소용 경비 마련을 위해서 서무간사 여운홍을 국내로 파견하였다. 여운홍이 국내로 들어와 함께 활동한 조직은 바로 반도고학생친목회였다. 여운홍은 이 단체의 고문과 연사로서 활동하면서 반도고학생친목회의 활동에 깊숙이 관여하였다. 반도고학생친목회는 전국 순회강연을 하면서 계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각 지방의 민족·언론운동, 종교단체 대표, 실업가 등을 만나는 별도의 시간을 가졌다. 이 모임에는 총재 장형과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파견된 여운홍이 항상 함께 하였다. 이 자리에서 장형과 여운홍은 자신들이 전국을 순회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강연회장에서 모집되는 동정금 외에 별도의 재정 지원을 요청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여운홍의 국내 파견 목적이 바로 태평양회의의 소용경비를 모집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장형은 임시정부가 1919년 말 안둥 이륭양행(怡隆洋行) 2층에 안동교통사무국을 설치한 이후에도 여기에서 활동하던 오동진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였다. 오동진은 안동교통사무국 세력의 근간인 대한청년단연합회를 이끌면서 교통국 업무를 수행하였다. 대한청년단연합회는 1920년 총무 김승만을 상하이로 파견하여 8,040원의 독립운동 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그리고 장형은 임시정부 재무부 참사 송병조에게도 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하였다. 임시정부는 1919년 11월 이륭양행에 재무부 파주소(派駐所, 일명 안동파주소)를 설치하여 송병조에게 안동파주소의 업무를 맡겼다. 업무는 주로 임시정부에 공급할 특별성금인 애국금과 공채금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당시 장형은 송병조를 통해서 임시정부 재무총장인 이시영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하였다. 이와 같이 임시정부에 대한 군자금 지원 활동을 꾸준히 지속해 왔던 장형은 반도고학생친목회를 조직하여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국내에 파견된 여운홍과 함께 태평양회의 원조 임무를 수행한 것이다. 그런 자금 조달 능력이 훗날 광복을 맞은 조국에서 김구가 장형을 건국실천원양성소의 이사장으로 선임했던 배경 중 하나가 되었으리라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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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회의(1921.11.12.~1922.2.6.)

태평양회의 참가 노력의 의미

결과적으로 태평양회의를 위한 임시정부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태평양회의에서 한국대표단은 회의에 출석하지 못했고, 한국문제의 상정 또한 실패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태평양지역에 대한 미국의 입지를 강화해주었고, 일본의 지위도 크게 상승시켜 서방 열강들로부터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공인받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큰 기대를 걸었던 태평양회의 참가 노력이 파행으로 끝남으로써 임시대통령 이승만의 입지는 완전히 위축되었고 임시정부의 기능도 사실상 무력화되었다. 이에 따라 반도고학생친목회 고문으로 활동하던 여운홍도 더 이상 상하이로 귀환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태평양회의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중국에서 이를 후원하던 중한협회의 활동이 사실상 중단되었던 것처럼, 국내에서 활동하던 반도고학생친목회도 자동 해소의 과정을 밟았다.       

태평양회의 결과 워싱턴체제(Washington Treaty System)라는 국제질서가 탄생하였다. 그러므로 동아시아·태평양 지역에 관한 한 태평양회의는 1919년의 파리강화회의보다도 훨씬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 체제는 1930년대 초반 일본의 만주침략과 국제연맹 탈퇴로 파국을 맞이했다. 일제는 더 나아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세계를 전쟁의 공포 속으로 몰아갔다. 한국인들은 비록 태평양회의를 통한 외교독립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일제를 상대로 한 다양한 독립운동을 지속하였다. 그 결과 1945년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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