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한국독립운동사 관점에서 바라본 태평양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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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회의(1921.11.12.~1922.2.6.)

제1차 세계대전 후 1921년 11월 12일부터 1922년 2월 6일까지 열국(列國) 간 해군 군비 축소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현안을 논의하기 위해 미국에서 ‘워싱턴 회의’가 개최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한 당대의 한국인들은 이 회의를  ‘태평양회의’라고 불렀다. 이를 계기로 전통적 대륙 국가관을 탈피하여 새롭게 ‘태평양’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회의에 초대받지 못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태평양회의를 민족자결주의에 근거한 외교독립운동의 마지막 기회로 인식하였다. 이를 위해 홍진을 중심으로 대태평양회의외교후원회, 안창호를 중심으로 외교연구회를 조직하여 자금 모금을 하는 등 한국문제가 회의 의제로 선정되도록 다각적으로 노력하였다.  국내에서는 사회지도급 인사들이 연명으로 날인하여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서」를 대표단에 보내 활동을 뒷받침했고, 반도고학생친목회를 중심으로 임시정부를 후원하는 등 세계 평화와 한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많은 노력들이 이어졌다.    

이러한 간절한 바람에도 미국정부는 한국대표단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의제에서 한국문제는 완전히 제외되고 말았다. 파리강화회의에 이어 태평양회의에서도 성과를 얻지 못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자책하였지만, 좌절하지는 않았다. 비록 외교를 통한 독립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일제를 상대로 다양한 독립운동을 지속하였다. 그 결과 1945년 마침내 꿈에 그리던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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