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인연

독립전장에서 꽃피운 사랑

한국광복군 신순호·박영준 부부

아름다운 인연<BR />

글 김형목(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박찬익의 아들 박영준과 신건식의 딸 신순호는 아버지에 이어 독립운동에 나섰다. 이들은 한국광복군으로서 항일전선에 투신하며 사랑을 키워갔다. 두 사람의 결혼식에는 백범 김구가 주례를 맡았고, 민필호·조완구·김원봉·김성숙 등 각 당 대표들이 축사를 맡았다. 독립운동가들이 나라 잃은 설움도 잠시 잊고 하나가 되어 기뻐했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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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호·박영준의 결혼식 사진

박영준, 아버지 박찬익의 권유로 독립운동에 나서다

박영준은 1915년 11월 1일 중국 룽징에서 독립유공자 박찬익의 4남 2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박찬익은 관립상공학교와 수원농림학교 재학 중 국권회복을 위한 모임을 주도하다가 퇴학당한 후 대한제국기 최대비밀결사인 신민회에서 활동하였다. 이때 대종교에 입교한 후 중국 동북지역으로 망명하여 서일 등과 중광단을 조직하여 항일무장세력을 결성했다. 이들은 중국과 교섭하여 총 300정과 수류탄 150발 등을 확보함으로써 무장단체로 정비할 수 있었다.   

박찬익의 원만한 대인관계와 탁월한 외교적 감각은 훗날 임시정부의 외교정책을 이끄는 든든한 밑거름이었다. 독립군 양성의 요람지인 신흥무관학교에서도 중국어와 한국 역사를 가르치며 민족의식과 항일의식 고취에 열정을 불태웠다. 대한독립의군부 창설과 대한독립선언서 발표에도 참가하는 등 중국 동북지역 항일운동을 이끄는 선각자로서 위치할 수 있었다.              

상하이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수립에 참여하여 임시정부 후원회 의원과 임시의정원 의원 등을 맡았다. 신규식이 서거한 이후로 외무부 외사국장과 외무차장으로 임시정부의 ‘외교창구’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또한 중국과 외교 협상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들의 석방에도 적극적이었다. 이봉창과 윤봉길 의거 이후 안공근과 엄항섭 등과 함께 대중국 외교교섭을 진두지휘하였다. 김구와 장제스의 회담 성사는 물론 한국인 청년들의 중국 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을 수 있는 밑그림을 마련한 주인공이 바로 박찬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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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군관학교 졸업생(1941, 아래 줄 가운데 박영준)

한국광복군으로 항일전선에 투신하다

박찬익이 독립운동에 전념한 탓에 박영준은 아버지의 얼굴을 거의 보지 못한 채 자랐다. 1930년경 상하이로 가서 아버지를 만난 그는 민족문제를 함께 고민하며 항일의식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때 박영준은 아버지 권유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일제의 동향을 분석한 보고서나 서신 전달 등이 그가 맡은 첫 번째 임무였다. 본격적인 독립운동은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가담하면서 시작되었다. 항일연극과 강연·음악공연·전단 배포 등을 펼치며 반전의식과 항일의식 고취 및 초모공작에도 적극적이었다. 한편 임시정부의 인재양성 계획에 따라 중국중앙군관학교 특별훈련반에 입교하여 1941년 12월 졸업하기도 했다. 중앙군관학교에 재학 중이었던 1940년 9월 충칭에서 한국광복군 전례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그는 광복군 제3지대에 배속되어 지대장인 김학규의 부관으로 주어진 임무에 충실하였다. 대원들과 함께 일본군에 강제로 징집되었던 한국인 병사들을 초모하는데 진력을 기울였다. 다수 학병·지원병·징집병을 포섭하여 이들을 충칭 총사령부로 보내어 한국광복군에 배치시켰다.         

1942년 4월부터는 상위(上尉)를 맡아 충칭에 있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서무과에서 근무하였다. 이후 임시정부 한인청년회 문화부장과 총사령부 서무과장 등을 맡았다. 이때 독립운동가 신건식의 딸인 신순호와 만나 열애 끝에 결혼했다. 그녀의 적극적인 성격과 부상을 당한 자신의 병수발에 크게 감동을 받았다. 1944년 6월에는 이시영 재무장으로부터 위임장을 받고 임시정부 재무부 이재과장(理財科長)으로서 능력을 발휘하였다. 1945년 3월부터는 광복군 제3지대 제1구대장 겸 제3지대 훈련총대장으로 활약했다. 8월에는 개봉 지구로 파견되어 다양한 군사활동과 첩보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중국 동북지역으로 가서 주화대표단 동북 총판사처 외무주임으로 근무하면서 한인 권익옹호를 위한 자위대를 조직하였다. 광복 후에도 한국인을 보호하며 이들이 조국으로 무사히 귀환할 수 있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948년에야 귀국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러한 배경에서 말미암았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국군 소령으로 임관되어 장교로서 참전하였고, 초대 정훈감을 지냈다. 이후 한국전력사장에 임명된 후 군직을 퇴직하여 광복군 동지회장·서울증권사장·백범기념사업회장을 역임하다가 2000년 3월 27일 경기도 성남시에서 영면하였다. 그의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로를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신순호, 아버지 신건식의 영향으로 독립운동과 마주하다

신순호는 1922년 1월 22일 충청북도 청주군 가덕면(현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인차리에서 독립유공자 아버지 신건식과 어머니 오건해 사이에서 외동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신건식은 상하이 독립운동 기반을 마련한 형 신규식을 따라 상하이로 망명하여 항저우 의약전문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의학교에서 수학은 후일 그가 중국군 의무장교로 활동하는 기반이 되었다.       

건식은 1939년 10월 개원한 제31회 의정원 회의에서 충청도의원으로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양묵·손일민과 상임위원에 당선되어 이듬해 이동녕의 국장 복상위원회가 서무·의식·공사 3개조로 편성되었을 때 최동오 등과 서무조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41년과 1942년 10월 개최된 33회·34회 의정원 회의에도 충청도의원으로 참석하였다.        

신순호는 4세 때 어머니와 함께 상하이로 망명하여 아버지와 처음 만났다. 근대교육을 받으며 국제정세 등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고, 집안 분위기와 주위 환경으로 자연스럽게 독립운동과 마주하게 되었다.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입대하여 한중 연대에 의한 항일운동에 나섰다. 또한 한국광복군 창립에 오광심·김정숙·조순옥과 함께 여성독립군으로 참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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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호·박영준의 결혼증서

전쟁 속에서 사랑을 꽃피우다

신순호와 박영준의 인연은 시작부터 특별하였다. 박영준이 아버지를 찾아 상하이로 건너갔을 당시 기거하던 곳이 신순호의 아버지 신건식 집이었다. 한편, 윤봉길의 상하이의거 직후 임시정부는 전시 상황에 따라 여러 지역을 거쳐 마침내 충칭에 도착하였는데, ‘만리장정’을 헤쳐온 임시정부 가족들은 토교에서 ‘한층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8년여에 걸친 오랜 이동생활에서 벗어난 임시정부는 정착 후 정부의 조직과 체제를 재정비하였다. 한국광복군 창설이 추진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광복군 창설을 위해 중국 동북지역(만주) 독립군 출신 군사 간부들과 중국의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에 복무하던 한인청년들을 소집하여 총사령부를 구성하였다.        

1940년 9월 17일 충칭의 가릉빈관에서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전례식이 거행되었다. 총사령부에는 여성대원들도 있었다. 신순호를 포함하여 오광심·김정숙·지복영·조순옥·민영주 등은 창설요원이었다. 여성광복군은 한인들을 대상으로 병력을 모집하는 초모활동과 광복군의 활동상을 대내외에 알리는데 앞장섰다. 국내·외 동포들의 참여와 지원을 촉구하는 선전활동에 주력했다. 신순호는 광복군 총사령부 심리작전연구실에 배속되어 방송 원고를 작성하거나 충칭의 국제방송국에서 방송을 통한 선전활동을 맡았다. 이 시기 신순호와 박영준은 연인으로 발전하여 사랑을 꽃피웠다.             

1943년 12월 12일 충칭 오사야항 임시정부 강당에는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임시정부의 요인들과 많은 동포 등이 모였다. 외무부장인 조소앙의 사회로 결혼식은 시작되었다. 백범 김구는 주례를 맡고, 민필호·조완구·김원봉·김성숙 등 각 당 대표들은 축사를 맡았다. 단상에 오른 박찬익은 떨리는 음성으로 “가정을 가져서 다섯이나 되는 자식을 두었지만 자식 놈의 결혼식에 참석해 보기는 오늘이 처음이고 또 마지막이 됩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박영준은 만주에 두고 온 어머니와 형제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조국을 떠나 머나먼 땅에서 힘겹게 살아가던 두 독립운동가의 결혼식은 잔악한 통치에 맞서 저항했던 독립운동가들에게 커다란 희망이었다. 박영준은 훗날 자서전에서 자신의 결혼식 날을 “나라 잃은 설움도 잠시 잊고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되어 기뻐했던 순간”이라고 회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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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화대표단 귀국기념사진(위 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신순호)

광복 후 동포들의 귀국을 위해 힘쓰다

신순호는 박영준과 부부이자 동지로서 독립운동을 이어가다 광복을 맞이하였다. 하지만 곧바로 귀국할 수 없었다. 한인동포의 귀국 문제를 중국과 외교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남편과 아버지 신건식·시아버지 박찬익이 난징에 설치한 주화대표단의 임무를 맡았기 때문이었다. 신순호는 이들과 함께 난징에서 독립운동의 마지막 단계였던 교민의 귀국 문제를 성실하게 처리한 후 1948년 4월에서야 귀국할 수 있었다.       

그는 귀국 후 남편을 따라 이곳저곳에서 생활하다가 2009년 7월 30일에 경기도 성남시에서 영면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로를 기려 1977년 건국포장에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하였다. 유해는 남편 박영준과 함께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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