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산책

알제리의 정신적 지주  압델 카데르 

세계 산책

글 임기대(부산외국어대학교 아프리카연구센터장)

 

1830년부터 1962년까지 프랑스 식민지배에 대항한 알제리 국민 모두가 독립영웅이라 할 수 있지만, 그중 국민을 하나로 묶으며 오늘날 알제리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이가 있다. 알제리의 정신적 지주라 일컫는 압델 카데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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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 수도 알제에 세워진 압델 카데르 기마상

식민지배에 대항한 알제리

북아프리카에 자리한 알제리는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132년(1830~1962) 동안 받은 국가이다. 당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모로코, 튀니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가혹한 식민지배를 받았다. 독립 과정 또한 치열했다. 프랑스를 상대로 한 ‘알제리 독립전쟁’(1954~1962)에는 국민 대다수가 참여하여 알제리의 민족성과 단결성을 보여주었다. 8년간 걸친 전쟁에서 수많은 알제리인이 희생되었지만, 이 전쟁으로 알제리는 비로소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였다. 

프랑스의 침략에 대한 알제리의 항쟁은 ‘알제리 전쟁’이 처음이 아니었다. 항쟁의 역사는 1830년 프랑스가 알제리를 처음 침공했을 때부터 수십 년 동안 지속되었다. 당시 식민지배에 대항한 대다수의 국민 모두를 독립영웅이라 할 수 있지만, 그중 알제리의 정체성 확립에 중요한 역할을 한 압델 카데르(1808~1883)는 현재까지도 알제리의 ‘정신적 지주’로 칭송받는다. 그는 전통 이슬람 교육과 근대 이슬람 국가 건설의 중요성을 역설했으며, 최후까지 프랑스에 맞서면서도 유럽에 이슬람을 전파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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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델 카데르의 초상화(위)와 동상(아래)

압델 카데르 그는 누구인가

압델 카데르는 알제리 서부 마스카라(Mascara) 근처의 작은 마을에서 출생했다. 이 지역은 이베리아반도에서 유입된 안달루시아 문화의 흔적이 많은 곳이다. 이곳의 대도시 틀렘센과 오랑 등지에서 성장한 그는 아버지로부터 독실한 이슬람식 교육(종교, 철학, 신학)을 받았다. 압델 카데르에게 독서와 함께 천짜기를 가르친 어머니 랄라 조라 또한 지도자의 덕목으로 솔선수범을 강조하며, ‘종교적 인간은 사치가 없고, 늘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고 내세웠다. 그녀의 교육관은 오늘날 알제리 여성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827년 압델 카데르는 오스만 터키 지배하에 있던 알제리를 잠시 벗어나 아버지와 메카 순례를 떠났고, 그때 방문한 이집트에서 알제리의 근대화를 꿈꿨다. 하지만 프랑스는 ‘알제리 총독과 프랑스 외교관 사이의 마찰’을 빌미로 1830년 알제리 침공을 시작했다. 그는 아버지가 오랑시의 항전 지도자로 나서는 것을 보며 24세 젊은 나이에 에미르(Emir, 군사령관)에 추대되었다. 주요 부족들이 그의 신앙심과 전투 역량, 통솔력을 인정하고 따랐기 때문이다. 초기 식민 과정에서 프랑스의 약탈과 파괴는 걷잡을 수 없이 잔인했다. 이에 대항할 알제리의 인력과 무기는 한없이 부족했고, 압델 카데르는 최고의 전법으로 ‘매복’과 ‘게릴라전’을 모색하여 실행했다. 그의 활약으로 프랑스는 1836년 휴전을 제안했고, 압델 카데르는 알제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땅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1842년 당시 프랑스 본국에서 온 새 총독은 ‘아랍인은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고 천명했고, ‘그렇지 않을 경우 알제리를 초토화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를 위해 프랑스는 알제리인을 정규군 등에 징집했고, 프랑스군의 앞잡이로 활용했다. 프랑스가 공언한 무자비한 탄압 작전이 먹혀들었으며, 그 결과 프랑스가 처음 침공했을 당시 300만 명이었던 알제리 인구는 1872년 200만 명으로 줄었다. 민간인 희생자는 물론 전사자, 전염병, 기근 등이 상황을 악화시켰고, 압델 카데르는 결국 패장이 되었다. 프랑스는 프랑스군의 앞잡이를 활용하여 알제리인을 강제로 체포했고, 이에 따라 저항이 거셌던 카빌리 지역의 알제리인들 마저 프랑스에 투항하고 말았다.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던 압델 카데르 또한 1847년 12월 23일 프랑스에 항복했다. 3명의 부인과 자녀들, 일부 부하 97명과 함께 프랑스의 포(Pau) 지방에 수감된 압델 카데르는 이후 르와르(Loire) 지역의 앙부와즈성으로 옮겨졌다. 이후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로 옮겨진 그는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알제리 독립전쟁’에 미친 영향

1830년부터 식민지배를 받은 알제리인들은 프랑스의 수탈로 더욱 궁핍하고 비참한 생활을 이어갔다. 1867년~1868년의 대기근으로 민중의 삶은 더 처참해졌고, 카빌리에서 봉기까지 발생했다. 오랑에서도 같은 식의 저항이 이어졌다. 하지만 독립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정치운동으로 방향을 틀면서 1926년 ‘북아프리카의 별’이라는 단체가 알제리 최초의 민족운동 조직체로 탄생했다. 이 단체는 압델 카데르의 손자 하즈 알리 압델 카데르를 중심으로 활동했고, 압델 카데르의 정신을 이어받고자 했다. ‘북아프리카의 별’은 프랑스 파리에서 결성되었다. 알제리 엘리트와 파리 이민 노동자가 하나가 되어 투쟁한 민족운동이었으며, 알제리 독립뿐만 아니라 북아프리카의 통일을 염두에 둔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들은 압델 카데르의 이슬람운동이 민족운동과 함께 할 수 있음을 주장했고, 마침내 8년간의 ‘알제리 독립전쟁’으로 이어지는 지렛대 역할을 했다.       
1962년 독립 후 알제리 정부는 압델 카데르의 유해를 시리아에서 알제리로 이장했다. 그는 단순히 반(反)프랑스 독립운동을 이끈 인물이 아니라 독립국가 알제리인의 자부심이자 상징이 되었다. 현재 수도 알제의 번화가에는 압델 카데르의 기마상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과거 프랑스의 식민지배 당시 프랑스 장군 동상이 있었던 장소이다. 알제리의 아픈 상처를 간직한 이곳에 세워진 그의 기마상은 알제리의 상징이자 곧 자부심이다.


알제리의 영원한 심장

독립 이후에도 알제리는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다. 1989년, 사회주의에서 다당제와 자본주의를 도입했다. 하지만 유가하락과 경제파탄, 사회주의 세력에 대한 분노는 1990년대 이슬람주의자들이 득세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이때 새롭게 출범한 부테플리카(1937~2021) 대통령 또한 부패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알제리인의 저항에 직면했다. 독립전쟁 세대들과 부패 정치인에 분노한 국민들은 ‘히락’(Hirak), 즉 ‘민중시위’를 2019년부터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남녀노소가 참여한 ‘히락’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잠시 주춤하고 있지만, 여전히 ‘알제리 국민이 어떻게 싸워 이룬 독립인지’를 묻고 있다. 압델 카데르의 후예, 아프리카에서 가장 자존심이 강한 국가, 이슬람과 자유를 독립정신으로 이어온 알제리의 심장에는 늘 압델 카데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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