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사적지

한인애국단의 난징 특무활동 전개 현장

독립운동 사적지<BR />

정리 편집실

 

상하이에서 조직된 한인애국단

한인애국단은 1930년대 초 중국 상하이에서 결성되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외적으로 침체와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임시정부는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특무활동을 전개했고, 이를 통해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한인애국단은 김구가 이끌었고, 간부는 김석(金晳)·안공근(安恭根)·이수봉(李秀峰) 등이 맡았으며, 단원으로는 윤봉길(尹奉吉)·이봉창(李奉昌)·최흥식(崔興植)·유상근(柳相根)·이덕주(李德柱)·유진만(兪鎭萬)·김의한(金毅漢) 등이 참여했다. 임시정부는 일제의 거물 정치인이나 관료를 처단해 일제에 큰 충격을 줌으로써 대외침략을 중단시키는 효과를 노렸다. 김구는 일왕을 처단하기 위해 1931년 12월 16일 이봉창 대원을 극비리에 도쿄로 잠입시켜 일왕 히로히토에게 수류탄을 던지는 의거를 감행하였다. 이밖에 1932년 4월에 윤봉길의 상하이 홍커우 공원 의거, 이덕주·유진만의 조선총독 처단 시도, 최흥식·유상근의 일본 고관 처단 시도가 이어졌다. 한인애국단의 존재에 위협을 느낀 일제는 임시정부 요인 및 한인애국단원 체포에 혈안이 됐다. 결국 항저우로 이동해 임시정부판공처를 설치한 김구는 의열투쟁보다는 군대 양성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한인애국단원의 일부를 난징군관학교에 입학시키는 등 군사력 확보에 매진하였다.


난징에서 추진한 다양한 특무활동

김구는 난징에 정착한 후에 중앙육군군관학교(中央陸軍軍官學校) 뤄양분교(洛陽分校)에 한인특별반(韓人特別班)을 설립하여 군사간부를 양성했고, 이들을 중심으로 특수활동을 전개하는 ‘특무기구’를 조직하였다. 난징지역에서 활동했던 한인애국단원은 안공근과 안경근 등 6인으로 유엽가(柳葉街) 56호에 거주하였다. 이곳에는 중앙육군군관학교 입학 준비생 7명도 함께 기거했다. 한인애국단은 1934년 9월 거점을 목장영(木匠營) 고안리(高安里) 1호로 옮겼다. 고안리 1호는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3층 건물이었고, 임대료는 한달에 35원을 지불하였다. 1층은 학생들을 위한 장소였고, 2층은 양동오(梁東五)와 이마석(李摩石), 3층에 노태연(盧泰然)이 거주했다. 1934년 12월 말 한인애국단은 고안리 1호에서 특무활동 전개를 목적으로 하는 ‘결사’를 조직했다. 한국특무대독립군(韓國特務隊獨立軍)이 바로 그것이다. 한인특별반 입교생을 중심으로 조직된 한국특무대독립군은 군사적 성격을 갖는 일종의 특무활동을 위한 기구였다. 단원은 한인애국단 간부들을 중심으로 한인특별반 입교생들이 주요 구성원이었다. 1935년 10월 3명의 대원이 일경에 체포되는 과정에서 조직이 탄로되었고 결국 1936년 1월 해산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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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장영 일대

난징 한국특무대독립군 본부 터(목장영)

한인애국단 및 한국특무대독립군이 거주했던 장소이다. 현재 난징에서는 고안리라는 지명이 사용되지 않는다. 당시 지도를 통해 고안리 1호를 확인했으나, 새로운 건물이 신축되어 있어 명확한 장소 비정이 어렵다. 빌라 단지로 변모된 블록 전체를 비정할 필요성이 있다.


주소 중국 난징시 진화구 목장영소구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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