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일제 강제동원 피해,

오직 사과·배상만이 해결책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BR />

글 이계형(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국가적 차원에서도, 개인적 차원에서도 일제 조선인 강제동원(징용·징병 등)에 따른 피해 문제는 여전히 미해결 과제로 남았다. 이번 호에는 광복 이후 현재까지 이루어진 일제 강제동원 피해 배상 소송 과정을 짚어보며, 역사적 의미와 함께 현주소를 살피고자 한다.


광복 직후 이뤄진 피해보상요구 운동

식민지 조선에서 강제동원이 이뤄진 것은 중일전쟁이 장기화되면서다. 일제는 군수물자와 노동력을 국가 차원에서 통제·동원하기 위해 1938년 4월 1일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했다. 이를 근거로 1939년 7월 7일 ‘국민징용령’을 제정하여 이를 조선 등 식민지에 자행했다. 그 뒤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징용 적용 범위를 확대해갔다. 대상은 만 16~40세 청년이었으며,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사할린·태평양 군도 등으로 동원하였다. 끌려간 청년들은 탄광·군수공장·비행장·건설공사장 등에서 1일 12시간 이상 노역해야 했고, 끝내 많은 이들이 희생되기도 했다. 광복 직후 한국정부 수립 이전에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일본을 상대로 직접적인 보상 요구 운동을 벌였다. 또한 희생자 유족들 중심의 동인회, 태평양동지회 등 단체를 조직하여 국회에 ‘대일강제노무자 미제임금 채무이행 요구’를 촉구하는 한편, 미군정청의 전쟁피해조사에 협력하여 피해신고 등의 형태로 피해보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냉전 격화와 한국전쟁 발발, 반공이 우선시되는 상황 속에서 또 다른 희생과 피해가 발생하면서 그러한 움직임은 점점 힘을 잃어갔다.


‘현실 타협’한 한일 청구권 협정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이 이루어졌지만, 두 나라 사이의 과거사 문제와 한국정부의 대일청구권 또는 대일민간청구권 문제를 덮은 채 체결되었다. 양국은 ‘청구권’의 의미를 대일협상 과정에서 몇 단계에 걸쳐 변질시켜 ‘청구권’의 합당성을 애매하게 처리하였고, 이를 자의적으로 해석할 여지만 남기고 말았다. 박정희 정권은 일본정부가 처음부터 안건 상정을 거부한 국가청구권을 유보하는 대신에 민간청구권을 중심으로 일본과 타협한 것이다. 이는 월권이자 위법으로 헌법을 짓밟는 행위였다. 일본 재판부는 이를 근거로 민간청구권 소송을 기각하였다.1966년 2월 19일 한국정부는 ‘민간청구권은 청구권 자금 중에서 보상한다’는 법을 제정하고, 1975년 7월부터 1977년 6월까지 군인·군속·피징용 사망자 유족 8,552명을 대상으로 1인당 30만 원씩 총액 25억 6,560만 원을 지급했다. 그러나 신청 절차가 까다로워 증거 불충분 및 자료 미비 등으로 신고를 거부당하거나 보상에서 제외된 대상자가 적지 않았다. 피해자들은 신체적·정신적 후유증에 시달리면서 사회적인 편견과 빈곤 속에서 살아가야 했다. 1980년대 말 정치적인 민주화를 이룩하고 냉전체제가 붕괴하면서 피해자들은 피해에 대한 치유와 배상을 큰 목소리로 요구하게 되었고, 1990년 10월 희생자와 유가족 22명이 일본 도쿄지방법원을 상대로 공식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 1991년 1월에는 한국을 방문한 일본총리에게 공식 사과와 피해 배상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인 사람이 할복자살을 기도하기도 하였다. 


소송의 물꼬를 트다

1991년 8월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이 피해 사실을 증언하고 인간 존엄 회복과 일본정부의 책임을 추궁하면서 큰 변화가 일었다. 당시 일본정부는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하지 않았다’라는 입장으로 선회했지만, 소송 결과는 참담했다. 한국인들의 소송과 관련하여 1990년대 제기된 29건의 판결 중 승소한 것은 1심 판결 단 하나뿐이었다. 그것도 ‘위안부’ 원고들의 청구 중 일부만 받아들였다. 그 뒤 1999년 7월 미국 캘리포니아의회가 ‘제2차 세계대전 강제노동 피해자 또는 그 상속인’은 시효 규정의 적용을 받지 않고, 2010년 12월 31일까지 강제노동으로부터 ‘이익을 얻은 모든 자 또는 그 이익 승계자를 상대로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는 법률을 제정하면서 물꼬가 터졌다. 이를 근거로 피해자들은 미국에서 일본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2000년 5월에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부산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였다. 이를 기회로 소송이 활발하게 이뤄졌지만, 어떤 경우에는 1심 제소 후 3심 판결까지 무려 12년 11개월이 걸리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고령의 피해자들은 사망하는 경우가 다반사였지만, 그렇다고 승소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잇달아 패소 또 패소

2001년 3월 27일 일본 오사카 지방재판소는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징용기업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원고들의 청구를 기각했다. 지방재판소는 원고들이 노동자 모집을 보고 스스로 지원하였기에 강제연행이라 볼 수 없고, 피고 신일본제철의 노동자 모집은 ‘국민징용령’에 따른 것이라며 징용의 불법성을 부인했다. 또한 신일본제철 주식회사는 구 일본제철과 별개의 법인이므로 그에 대한 채무를 승계하지 않았고, 설사 승계했다고 하더라도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과 일본의 재산권조치법에 의해 채무가 소멸됐다고 판단했다. 이에 원고들이 불복하여 오사카 고등재판소에 항소했지만, 2002년 11월 19일 항소기각 판결을 선고받았고, 2003년 10월 9일 일본 최고재판소가 이를 기각하면서 원고패소판결이 확정되었다. 이후 피해자들은 앞선 청구이유로 2005년 2월 28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신일본제철이 구 일본제철과 법인격이 동일하다거나 구 일본제철이 채무를 승계했다고 볼 수 없다’는 일본 재판부의 입장을 받아들였다. 다만 ‘청구권이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인해 소멸했다고 볼 수는 없다’면서도 ‘위자료 청구권의 시효가 지났다’며 원고들의 청구를 기각했다. 2012년 5월 24일 대법원은 이 같은 판결을 파기·환송했다. 광복 60년이 지난 후에 이루어진 일본 측 회사에 대한 손해배상을 인정한 것은 과거 청산으로 가는 첫발을 의미했다. 이후 2018년 10월 30일 전원합의체 판결로 ‘신일본제철의 상고를 기각하고 원고들에게 각 위자료 1억 원을 지급하라’는 원심을 확정하였다. 이를 ‘대상판결’이라 한다. 이에 일본정부는 ‘대상판결이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과 국제법을 위반했다’고 비판하며 보복 조치의 일환으로 반도체 소재 품목의 한국 수출 규제를 발표하고, 한국을 일본의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였다. 이는 한국 내에서 일본산 제품 불매운동으로 번졌다. 


피해자들의 눈물, 언제 그칠 수 있을까

2021년 6월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와 유족 85명이 일본기업 16곳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서울중앙지법은 ‘일본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낼 수 없다’라며 대상판결과 배치되는 이례적인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1965년 한국정부가 일본의 자금지원을 대가로 대일청구권을 포기한 ‘청구권협정’의 문언과 체결 경위 등을 볼 때, 강제징용 피해자도 협정의 적용 대상이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재판부는 또 ‘자유민주주의라는 헌법적 가치를 공유하는 서방 세력의 대표 국가들 중 하나인 일본과의 관계가 훼손되고, 이는 결국 한미동맹으로 우리 안보와 직결된 미합중국과의 관계 훼손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라거나 ‘청구권협정으로 얻은 외화는 이른바 한강의 기적에 크게 기여했다‘라는 등의 일방적인 정치·외교적 가치 판단을 판결에 개입시킨 꼴이었다. 이는 사법부가 피해자들에게 좌절감을 안긴 판결이었다. 일제강점기 강제징용과 관련한 일본 측의 배상은 단순한 재정적 지원 보상이 아니다. 일제 군국주의의 과거 청산이며 일본의 진정한 사죄의 한 단면이다. 나라 없는 국민으로서 강제징용을 당해야만 했던 그들의 눈물을 닦아줘야 한다. 이는 국가가 당연히 해야 할 책무이다.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자들에 대한 배상은 일본으로부터 사과를 받아내는 또 다른 방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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