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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협동전선의 첫발

6·10만세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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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성민(전 국민대학교 전임연구교수)



1926년 순종의 승하를 계기로 일어난 6·10만세운동은 1919년 3·1운동, 1929년 광주학생운동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3대 민족운동으로 평가된다. 3·1운동을 겪은 일제의 철저한 탄압으로 만세시위가 크게 일어나지는 못하였지만, 국내외 민족운동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민족협동전선을 형성하여 국외 독립운동 활성화에 영향을 미쳤고, 신간회 설립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국내 학생독립운동에도 변화의 계기를 마련하는 등 독립운동사에 값진 열매를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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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의 인산(장례) 광경(1926.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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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설과 이선호


순종의 승하를 계기로 만세시위를 추진하다      

6·10만세운동은 1926년 6월 10일 순종(융희황제)의 인산(장례)을 계기로 서울을 중심으로 전개된 만세시위운동이었다. 순종은 1926년 4월 25일 승하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순종의 승하는 우리 민족에게 망국의 통한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전국적으로 망곡(望哭, 장례에 몸소 가지 못하고 그쪽을 향하여 슬피 욺)과 봉도(奉悼, 존경받는 인물의 업적과 공덕을 기리며 애도의 뜻을 나타냄) 등 추모의 물결이 일었다. 이러한 민족적 울분을 독립운동의 기회로 삼아 먼저 시위운동을 추진한 것은 사회주의계열의 인사들이었다. 

중국 상하이에 근거를 둔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의 김단야 등은 국내외의 독립운동 세력과 연계하여 3·1운동과 같은 ‘제2의 만세시위운동’을 추진했다. 국내에서는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와 연결된 고려공산청년회의 주도로 천도교, 조선노농총동맹과 학생 사상단체인 조선학생과학연구회 등이 시위운동에 참여했다. 이들은 만세시위운동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조직적 연대를 이루며 역할을 분담하였다. 만세시위 계획의 전체적인 구상은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에서 주도하였다. 국내에서는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인 권오설을 중심으로 ‘6·10투쟁특별위원회’라는 지도부가 만들어졌으며, 천도교는 유력한 조직기반을 바탕으로 격문 인쇄 및 지방 연락을 맡았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소속 학생들은 만세운동의 선봉을 맡기로 하였다. 당초 지도부인 ‘6·10투쟁특별위원회’는 서울뿐 아니라 전국 각처에서 만세운동을 벌인다는 계획을 세웠다. 서울에서는 학생들이 앞장서 일으키고, 지방에서는 망곡과 봉도에 참가하는 대중들을 결집해 만세운동을 벌인다는 구상이었다. 이에 따라 5월 말까지 만세운동에 사용할 ‘격고문’ 외 4종의 격문 5만여 매를 인쇄하는 등 준비를 갖추어 갔다. 그러나 불행히도 만세시위 계획은 거사 직전인 6월 6일 발각되고 말았다. 당시 격문의 인쇄를 천도교 측에서 맡았는데, 우연히 일경의 감시망에 걸려 천도교 총부에 감추어 두었던 격문이 발각된 것이다. 결국 천도교와 개벽사 등의 관련 인사 80여 명이 체포된 것을 비롯해 각 사회단체 인사 2백여 명이 일시에 체포되어 거사계획이 좌절될 위기에 처하였다.      

이렇듯 긴박한 상황에서도 학생들에 의해 만세운동 계획은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원래 만세운동 당일 사용할 격문을 지휘부와 천도교 측에서 제공키로 했었다. 그러나 사전 발각으로 차질을 빚자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학생들은 사직동에 자리한 이석훈의 하숙집과 연희전문학교 뒷동산에서 급히 격문 1만여 매를 인쇄하는 등 독자적으로 거사를 준비해갔다. 그리고 만세운동 하루 전에는 학생들이 일제의 검거망을 피해가며 각 학교와 지방에 격문과 전단을 배포할 수 있었다.            

한편 이와는 별도로 학생들만의 독자적인 만세시위 계획도 추진되었다. 중앙고보의 박용규, 이동환과 중동학교의 김재문, 황정환, 곽대형 등은 순종의 인산을 계기로 3·1운동 때와 같이 전민족적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였다. 이들이 거사를 준비하던 곳이 통동이어서 이들을 흔히 ‘통동계’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들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조선민족대표’ 명의의 격문을 작성하여 5천여 매를 인쇄하였다. 6월 8~9일 시내 각 학교와 전국 주요 학교에 격문을 발송하면서 인산 당일의 거사를 추진해갔다. 이 과정에서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이선호와 중앙고보의 동급생인 이동환, 박용규 등이 양측의 연락을 담당하면서 양측의 연대 투쟁이 가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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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의 인산(장례)을 보도한 기사, 『동아일보』 (1926.6.10.)(위) / 권오설과 6·10만세운동 관련 기사,『동아일보』(1926.6.19.)(아래)

일제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폭발한 만세시위

6월 10일 순종의 장례 행렬은 오전 8시 창덕궁에서 발인하여 시내를 거쳐 금곡 유릉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연도에는 순종의 마지막 길을 애도하기 위해 30여만 명에 달하는 인파가 운집했다. 7년 전 3·1운동에 놀랐던 일제는 연도에 기마경찰과 헌병, 사복경찰로 철통같은 경계와 감시를 펼쳤다. 오전 8시 반 종로 3가에서 국장 행렬이 통과한 뒤 중앙고보 학생 이선호의 선창으로 중앙고보 학생 30~40명이 “만세”를 외쳤다. 이를 신호탄으로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 ‘통동계’의 학생들은 시내 곳곳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학생들은 군중에게 격문을 배포하고 감춰두었던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을지로 부근에서 일어난 시위는 사범학교의 담을 무너트릴 정도로 격렬했다. 동대문 앞 시위현장에서는 일제 기마병의 말발굽에 치여 70~80여 명의 군중이 부상을 당하기도 하였다. 창신동 입구에서는 혈서로 쓴 ‘독립만세’가 적힌 태극기를 흔들며 홍종현이 단독으로 만세시위를 벌였다. 홍종현은 만세시위를 결행하기 위해 경북 의성에서 상경하여 태극기를 준비한 열혈의사였다.       

그러나 일반 군중은 일제 기마병과 군경의 삼엄한 경계로 인해 별다른 호응을 보이지 못하였다. 오후 2시경까지 9개 곳에서 계속된 이날의 만세운동은 대부분 학생들에 의해 전개되었다. 1,000여 명의 학생이 만세시위에 참가하였으며 현장에서 일경에 체포된 학생만 2백10여 명에 달했다. 연희전문학교 43명, 세브란스의전 8명, 중앙고보 58명, 보성전문학교 7명, 그밖에 중동학교, 양정고보, 배재고보, 송도고보 학생 등이었다. 이 중 53명이 검사국으로 넘겨져 11명이 주모자로 기소되었다.     

지방에서는 6월 10일 전북 고창에서 고창보통학교(초등학교) 학생들이 만세시위를 벌였으며, 인천 만국공원에서도 청년 수십 명의 시위가 있었다. 전국 곳곳에서 봉도식이 열렸고, 많은 이들이 통곡하는 망곡을 했다. 봉도를 금지하는 학교 당국에 항의하여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단행하는 경우도 많았다. 지방의 학생들이나 일반인들이 봉도와 망곡, 동맹휴학 등으로 일제에 항거 의지를 표시한 것이다.      

또한 인산 당일의 시위를 목격한 배재고보 학생 문창모를 중심으로 협성학교, 피어선 성경학원, 기독교청년학원 등 기독교계통 학생들이 제2차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였다. 인산 당일의 운동이 일반 민중의 호응을 크게 얻지 못한 것에 자극되어 대규모 만세시위운동을 추진한 것이다. 이들은 피어선 성경학원 기숙사에 모여 격문 수만 매를 인쇄하는 등 거사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행에 옮기지 못한 채 관련자들이 체포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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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한 경계와 감시를 펼친 일제 기마경찰들(좌) / 1926년 11월 2일 열린 6·10만세운동의 첫 공판,『동아일보』 (1926.9.28.)(우)

독립운동의 새로운 진로를 제시하다

6·10만세운동은 1919년 3·1운동, 1929년 광주학생운동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3대 민족운동으로 평가된다. 시위 규모 면에서는 3·1운동이나 광주학생운동에 비해 크지 않았으며, 주로 국장 당일의 짧은 기간 서울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외향상의 차이를 보인다. 이는 일제의 사전 경계가 극심했기 때문이었다. 3·1운동에 놀란 일제는 순종이 승하하자 전국 각처에서 1만여 명의 군대를 집결시켜 서울 시내를 포위하고 무장시위를 감행하는 등 비상경계 태세에 돌입하였다. 3·1운동의 진원지였던 탑골공원에는 중무장의 기관총 소대를 배치하며 공포감을 배가시켰다. 인산 당일에는 인도에 기마경찰, 헌병, 정사복 경관 등을 총검으로 무장시켜 물샐틈없는 경계를 펼쳤다. 그 때문에 일반 민중의 시위참여가 쉽지 않았다. 6·10만세운동은 이러한 일제의 경계와 감시망을 뚫고 일어난 만세시위운동이었다. 6·10만세운동은 3·1운동의 경험 위에서 일어난 것이었지만, 운동의 주체와 이념적인 측면에서 큰 차별성을 보인다. 3·1운동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종교이념을 초월하여 민족적 결합을 이루었다면, 6·10만세운동 때에는 사회, 정치적 이념을 초월하여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연합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연대함으로써 민족협동전선을 이룩해 갔던 것이다.       

6·10만세운동은 일제의 철저한 탄압으로 만세시위가 크게 일어나지는 못하였지만, 국내외 민족운동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6·10만세운동의 민족협동전선 형성은 중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계의 민족대당 결성운동을 활성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도산 안창호는 7월 16일 상하이에서 열린 연설회에서 6·10만세운동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민족적 통일기관을 조직하자고 역설하였다. 민족적 통일기관이란 주의와 이념을 초월하여 민족적 ‘대혁명당’을 조직하자는 것이었다. 7월 8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령 홍진은 시정방침의 3대 강령에서 ‘민족대당’의 조직을 천명하였다. 이후 중국 관내지역 곳곳에 ‘민족대당’ 결성을 준비하는 조직들이 생겨났다. 만주에서도 ‘민족유일당운동’이 일어나면서 독립군 단체의 통합을 촉진하였다. 이러한 좌·우익의 합작 움직임은 국내에서 1927년 2월 민족협동전선체인 신간회가 결성되는 데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6·10만세운동은 국내 학생독립운동에도 변화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6·10만세운동 이전까지 학생운동 조직은 지방으로 확산되지 못하고 서울에 한정되어 있었다. 6·10만세운동에서 학생이 독자적인 민족운동 주체로 부상하면서 이후 학생운동 조직이 지방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학생운동 조직이 전국 각처에서 결성되었으며 학생들의 동맹휴학도 식민지교육의 타파를 주장하는 등 민족적 성격을 강화해갔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적 민족운동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학생운동 역량의 성장 위에 가능했다. 6·10만세운동은 이후 학생운동의 질적 성장에 기반이 된 것이다. 이처럼 6·10만세운동은 그 자체의 규모보다도 이후 민족운동의 질적 변화에 큰 계기를 형성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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