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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만세운동의 세 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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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성민(전 국민대학교 전임연구교수)



6·10만세운동은 크게 세 갈래로 나뉘어 전개되었다. 첫째는 조선공산당계열의 만세시위 계획, 둘째는 조선학생과학연구회 학생을 중심으로 전개한 만세시위, 셋째는 민족주의 성향의 ‘통동계’가 추진한 만세시위다. 이와 같은 만세시위는 3·1운동 이후 침체된 민족운동에 새로운 활기를 안겨주었고, 민족독립운동사의 꺼지지 않는 횃불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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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산당계열 만세시위 격문 인쇄지, 감고당 민창식 집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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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원(좌) / 민창식(우)

조선공산당계열의 시위 계획

조선공산당계열의 시위 계획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는 성립 직후인 1926년 2월경 중국 국민당 방식과 같은 한국 민족혁명 세력의 통합조직을 구상하고 있었다. 당시 중국에서는 국민당이 만주 군벌들을 토벌하기 위해 중국공산당과 손을 잡은 ‘국공합작’이 진행 중이었다. 이러한 중국 내 정세는 민족운동계에도 좌우 연합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 위해 임시상해부는 국내 조선공산당을 통해 동년 3월 천도교 측과의 민족협동전선을 모색하기도 했다. 조선공산당 측은 이를 보다 힘있게 추진하기 위해 메이데이(5월1일)를 기해 국내에서 대중시위운동을 계획하였다. 이때 순종이 승하하자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와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권오설은 메이데이 기념시위 계획을 철회하고 순종 인산일에 대중적 시위를 일으키는 방향으로 운동방침을 수정하였다. 이의 실행을 맡은 고려공산청년회는 ‘6·10투쟁위원회’라는 지도부를 설치하고 대중시위를 전민족적 운동으로 발전시키고자 사회주의, 민족주의, 종교계, 청년계, 학생계의 혁명적 인사들을 망라한 전민족적 지도기관으로 ‘대한독립당’ 조직을 구상하였다. 이를 위해 조선공산당은 천도교 진영 및 조선노농총동맹 등과 교섭을 추진하였다.        

한편 천도교 구파는 최린 등의 천도교 신파를 중심으로 자치론이 고개를 들자 이를 비판하면서 사회주의 세력까지 포함하여 일제에 비타협적인 세력을 망라한 민족적 조직을 구상하였다. 이의 일환으로 1926년 3월 초에는 2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인 강달영과 민족협동전선을 협의하기도 하였다. 그 때문에 6·10만세운동 추진과정에서 천도교 구파와 조선공산당은 자연스럽게 결합될 수 있었다. 이들은 6·10만세운동의 지도 기관으로 각 항일운동 세력의 협동전선체인 ‘대한독립당’을 결성하고, 이 명의로 격고문을 작성 배포하면서 만세시위운동을 추진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에 따라 권오설은 당시 천도교청년동맹 간부로서 노농총동맹의 상무위원이던 박래원과 역할을 분담하여 격문 원고와 자금은 자신이 책임지고, 박래원은 격문 인쇄와 지방 연락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박래원은 노농총동맹과 인쇄직공조합에 관여하던 민창식 등과 함께 만세운동에 사용할 격고문 외 4종의 격문 5만여 매를 인쇄한 뒤 이를 천도교 총부 구내에 숨겨놓았다. 그러나 격고문이 발각되어 천도교 구파와 고려공산청년회 추진인사들이 체포됨에 따라 이러한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천도교는 전국적 조직기반을 보유하고 있었으므로 격문을 지방의 58개 도시에 배부하고 전국을 철도선에 의해 4개 지역으로 나누어 각기 책임자를 파견하여 만세운동을 확산시킬 계획이었다. 이러한 활동은 주로 천도교 구파의 천도교청년동맹을 통해 추진되었다. 그러나 상하이에서 보내기로 했던 거사자금이 도착하지 않아 기다리던 중 계획이 발각되어 실천에 옮기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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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학생과학연구회 간부들 (왼쪽부터 박두종, 박하균, 이천진, 이선호, 이병립)

조선학생과학연구회 학생들의 시위 추진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1925년 9월 창립되었다. 사회주의계열 학생들과 진보적 민족의식을 지닌 학생들이 참여하였다. 당초의 명칭은 ‘학생사회과학연구회’였으나 일제가 ‘사회과학’이라는 용어를 금지함에 따라 ‘조선학생과학연구회’라고 변경하였다. 당시 ‘사회과학’이라는 단어는 사회주의를 뜻하는 용어로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다. 따라서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사회주의의 연구와 보급을 목적으로 하는 학생사상단체‘를 의미했다. 강령으로 「과학연구와 과학사항의 보급을 기함, 조선학생의 사상통일과 상호단결을 도모함, 인간본위 교육의 실현과 조선학생의 당면한 문제의 해결을 기함」을 제시하였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서울 소재 중등 이상의 학교에 재학하는 학생들로 구성되었다. 6·10만세운동 당시 회원이 5백여 명에 달하였다. 사회주의를 연구하는 학생 사상단체였으나 회원들이 모두 사회주의자는 아니었다. 초기 간부진은 사회주의 단체에 가입한 학생과 민족주의적 성향의 학생이 혼재되어 있었다. 사회주의계열 학생들의 경우 제2차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인 권오설의 강력한 지도 아래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진보적 민족의식을 지닌 학생들은 민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회주의 사상 연구와 보급’에 공감하였고,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통해 사회의식을 제고해 갔다.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의 지도력이 일정하게 관철되고는 있었지만,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초기 조직은 조선공산당의 산하단체라기보다 민족, 계급문제에 관심있는 학생들의 연합체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순종이 승하하자 5월 3일 권오설이 이병립에게 인산 당일 가두 행렬에서의 만세 선창과 격문 살포를 지시하면서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만세시위계획이 본격화되었다. 이병립은 고려공산청년회의 간부이자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간부이기도 했다. 이병립 등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간부들은 5월 20일 각 학교 학생대표들을 소집하여 거사방법 등을 협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이병립, 이선호, 이천진, 박두종, 박하균 등이 준비 책임자로 선임되었다. 이후 학생 동원 등을 준비하던 중 6월 6일 고려공산청년회와 천도교 측의 격문이 발각되어 주요 인사들이 체포되자, 이들은 독자적으로 거사를 추진해갔다. 이병립의 주도하에 6월 8일부터 태극기 200여 매와 깃발을 만들고, 격문을 기초하여 인산인 전날 격문 1만여 매를 인쇄하였다. 이로써 6월 10일 인산 당일의 만세시위를 예정대로 단행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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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문(좌)과 ‘통동계’ 학생들이 만세시위 격문을 인쇄했다는 기사, 『동아일보』 (1927.3. 26.)(우)

‘통동계’ 학생들의 시위 추진

이른바 ‘통동계’는 6·10만세운동 추진세력 중에서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는 별도의 고등보통학교(지금의 고등학교) 학생들을 말한다. 중앙고보의 박용규, 이동환과 중동학교의 김재문, 황정환, 곽대형 등의 학생들로서 뚜렷한 조직체를 만들지 않은 상태에서 독자적으로 만세시위를 계획, 준비하여 거사에 참여하였다. 지방에서 서울에 유학한 학생들로서 평소에 교우관계가 있었던 이들은 하숙집 등을 거점으로 거사를 추진하였다. 이들의 하숙집이 통동에 있어서 흔히 ‘통동계’ 학생들로 불린다. 이중 박용규는 조선학생과학연구회 회원이기도 했다. 조직적 기반을 바탕으로 결집한 세력은 아니었으나, 밀접한 인적교류와 고양된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만세운동을 계획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서울의 각 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동지 규합에 나섰다. 일주일 만에 50여 명의 동지를 규합하여 5월 23일 축구시합을 위장하여 모임을 가졌다. 이때 이동환은 총독부를 비롯한 일제기관과 일본인 집단거주지인 충정로 일대 폭파 등의 강력한 투쟁방법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는 일동의 동의를 얻지 못한 채 해산하고 말았다.         

이후 주도 학생 5명은 다시 논의를 거듭하여 인산일을 기해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뜻을 모았다. 생활비와 학자금으로 거사 물품을 구입한 후 5월 29일 통동 김재문의 하숙집에서 격문을 작성하였다. 5월 31일까지 박용규의 하숙에서 ‘조선민중아! 우리의 철천지 원수는 자본제국주의 일본이다. 2천만 동포야!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자! 만세, 만세, 조선독립 만세!’라는 격문 5천여 매를 인쇄하였다. 각자 1천여 매의 격문을 맡아 동지들에게 배포하는 한편 6월 8일과 9일에는 시내 각 학교와 전국 주요 학교에 발송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이선호와 중앙고보 동급생인 박용규, 이동환 등이 양측에서 연락을 담당하면서 연대투쟁이 가능하게 되었다. ‘통동계’ 학생들의 만세시위는 학생이 주체가 되어 자체적으로 대중적인 만세시위운동을 추진하여 성공시켰다는 점에서 학생운동의 또 다른 성장을 보여준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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