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형목(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홍범도는 단양 이씨와 인연을 맺고 미래를 약속했다. 이씨는 일제의 고문에 시달려 눈감는 순간까지도 남편의 의병활동을 지원했으며, 홀로 두 아들을 책임졌다. 홍범도가 일본군과 전투에서 여러 번 승리를 거둘 수 있던 배경에는 이씨의 숭고하며 위대한 희생이 있었다.

1921년 극동피압박민족대회 당시 홍범도(ХОН НЕМ-до는 홍범도의 러시아 이름)
우여곡절을 겪은 청년 홍범도
홍범도는 1868년 8월 평안남도 평양 보통문 안에 있는 문열사에서 가난한 농부 홍윤식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남양, 호는 여천(汝千)이다. 영양실조에 걸린 어머니는 그가 태어나자마자 사망했고, 젖동냥하던 아버지마저 그의 나이 9세 무렵 세상을 등졌다. 가난의 대물림으로 꼴머슴과 떠돌이 생활의 연속이었다. 불우한 생활에서 벗어나고자 나팔수로 입대했으나, 이마저도 만만치 않아 다른 길을 찾았다. 물론 군에서 배운 군사훈련과 사격술은 훗날 독립전사로서 발돋움하는 든든한 밑거름이 되었다. 이후 황해도 수안 제지공장에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갔지만, 임금 문제로 주인과 갈등이 겪고 다시 유랑생활을 시작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금강산 신계사에서 승려가 된 홍범도는 그곳에서 이순신 장군과 승려의병장 서산대사·사명대사의 삶을 배우며 항일의식을 일깨웠다. 이때 첫 번째 부인 단양 이씨를 만나 인연을 맺었지만, 두 사람은 뜻하지 않게 헤어졌다. 이후 홍범도는 광산노동자로 일했으며, 북청에 정착하여 소작농과 산포수로서 값진 수입을 올렸다. 이씨와 첫아들 양순을 7년 만에 만난 홍범도는 가족과 함께 생활하며 평온함과 안정감을 찾았고, 이 무렵 둘째 아들 용환이 태어났다.

홍범도
게릴라 전법으로 수십 차례 승리를 거두다
러일전쟁이 발발할 즈음, 항일투쟁 물결 또한 크게 일었다. 홍범도는 포수조직인 엽인계(獵人契)를 이끄는 포연대장(捕捐隊長)으로 추대되었다. 포연대장은 관리들과 교섭하여 포획물의 양을 정하고 이를 세금으로 납부하는 직책이었다. 홍범도는 관청에서 포수에게 부과하는 가혹한 세금의 부담을 덜기 위해 분투하였다. 지방관리들은 그를 위협하고 매수하려 했지만 끝내 세금을 낮추는 데 성공하였고, 이를 통해 동료들의 신망을 얻었다. 1907년에 일제는 군대해산 이후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공포하였다. 일제의 국경수비대는 백두산 일대 포수들의 무기를 회수하거나 활동을 방해하는 데 혈안이었다. 그해 11월 홍범도는 태양욱·차도선 등과 함께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포수들을 집결시켰다. 이들은 후치령을 근거지로 일본군을 공격하고 우편마차를 탈취하였다. 일본군을 유인하여 섬멸하거나 군용화물차를 습격하는 등 갑산·혜산진·삼수·북청 일대를 교란하였다. 의병 1,000여 명을 모아 군량도감 등 부대의 진용을 갖추고 격문과 포고문을 돌리면서 게릴라 전법으로 수십 차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일제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했으나 맞대응이 어려워지자 회유와 귀순공작에 열을 올렸다.

홍범도부대가 사용한 수류탄과 탄환
비극적인 상황에도 멈추지 않은 항일투쟁
차도선이 귀순공작에 넘어가고, 태양욱이 함정에 걸려 체포당하자 일제는 끊임없이 홍범도의 귀순공작을 벌였다. 1908년에 들어 일본군 북청수비구 사령부는 홍범도 귀순공작의 한 방법으로 그의 가족을 잡아들였다. 일제는 이씨에게 귀순을 강요하고 남편에게 귀순을 권유하는 편지를 쓰라고 압박하였다. 그녀는 일제의 요구에 침묵으로 일관하며 응하지 않다가 모진 고문에 시달려 끝내 사망하고 말았다. 첫째 양순은 아버지를 따라 전투에 참여했다가 전사하였고, 둘째 용환은 살인범으로 몰려 고문을 받은 뒤 폐병으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러한 비극적인 상황에도 홍범도는 흔들리지 않고 반일투쟁의 고삐를 놓지 않았다. 당시 그가 고심한 문제는 원활한 탄약 공급이었다. 무기가 턱없이 부족했던 의병들은 강력한 일본군의 공격에 견디지 못하고 흩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는 청나라와 러시아의 탄약 지원 교섭에 나서기 위해 동지들과 압록강을 건너 중국 동북지역과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을 찾았다. 일제는 삼수·갑산 일대에서 의병활동이 사라지자 밀정을 풀어 그의 행방을 쫓았다. 그를 체포하려는 일제수비대가 연해주 일대에 파견되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연해주에서 군비를 마련할 수 없다고 판단한 홍범도는 고국으로 돌아왔고, 동지들을 함께 북청·갑산·혜산 일대에서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경술국치 직전에 홍범도는 창바이현 일대에 근거지를 두고 둔전을 일구며 군량미를 공급하였다. 또한 연해주·만주 그리고 국내 의병진과 연계를 모색하였지만, 탄약 고갈로 의병활동이 거의 불가능해지자 의병부대를 해산하였다. 이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 정착한 후 노동회(勞動會)를 조직하고 군자금을 비축하며 때를 기다렸다. 이때부터 독립군을 창건할 때까지 국경 일대에서 게릴라전이 10여 년 동안 전개되었다.

봉오동전투 현황도(1920.6.)
대승리를 이룬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은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 항일운동단체에도 커다란 영향력을 끼쳤다. 룽징·훈춘·창바이현 등지에서 대대적인 만세시위와 더불어 일제 식민통치기관을 습격하는 등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창바이현에서는 천도교도들이 일본헌병대를 습격하였다. 홍범도는 안도현 명월진에서 의병출신들과 한국청년 및 산포수 등을 모아서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을 창설하여 사령관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독립군을 이끌고 혜산진·갑산의 일본군을 습격하였다. 이어 백두산에 근거지를 두고 두만강 연안인 자성·강계·만포진·회령 등지에 있는 일본군과 경찰관서를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일본군은 대대병력으로 홍범도부대가 주둔하는 봉오동(현 투먼시 봉오동저수지 골짜기)을 전면 공격하였다. 당시 독립군은 400여 명, 일본군은 남양수비대 병력을 포함해 300여 명이었다. 1920년 6월 7일 네 시간에 걸친 치열한 전투 끝에 피가 냇물을 이루자 정적을 되찾았다. 홍범도부대는 일본군 157명을 사살하며 대승리를 거두었고, 독립군의 손실은 전사 4명, 중상 1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이 유명한 ‘봉오동전투’이다. 봉오동전투는 청산리전투의 승리를 알리는 서막에 불과하였다. 이후 변화되는 정세를 직감한 홍범도는 새로운 국면에 대처하기 위해 김좌진·안무·최진동 등 군사지도자들과 합동작전을 모색하였다. 1920년 북로군정서에서는 러시아로 사람을 보내 멘셰비키 당국과 교섭하여 기관총 등 다량의 무기를 구입하였다. 당시 홍범도는 직속부대원 300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마침내 1920년 10월 21일 백운평전투를 시작으로 청산리와 어랑촌 일대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독립군은 뛰어난 전술로 우수한 화기를 지닌 일본군을 농락하였다. 6일 동안의 혈전 끝에 일본군이 크게 패배하였다. 일본군의 피해는 연대장 1명, 대대장 2명을 포함, 전사자 1,254명이었다. 부상자까지 합하면 인명피해가 3천여 명에 달하였다. 독립군의 전사자는 200여 명이었다. 이것이 바로 ‘청산리전투’이다.

크즐오르다 홍범도 묘역 전경
비장군(飛將軍, 용맹한 장수)으로 불리다
승리의 기쁨도 잠시, 독립군은 일제의 공격을 피해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도시인 헤이허로 이동하였다. 당시 레닌의 적군은 한국독립군에게 협조적이었으나 일본군이 침공 및 항의를 하자 태도가 달라졌다. 볼셰비키는 일본군이 철수조건으로 한국독립군의 해산을 내걸자, 대한독립군단의 무장해제를 요구하였다. 적군은 강제로 독립군의 무장을 해제하였고, 반대하는 독립군을 공격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로써 모든 꿈이 산산조각이 나면서 내부 갈등이 유발되었지만, 홍범도는 중립을 지켰다. 이후 김좌진·지청천 등은 다시 중국 동북지역으로 되돌아갔고, 그는 러시아 연해주에 새로운 활동근거지를 마련하였다. 레닌을 직접 만나 지원을 요청했으며, 고려공산당에 가입하여 극동인민대표회의에 김규식·여운형 등과 함께 한국대표로 참석하기도 했다.
1937년 스탈린은 연해주 일대에 거주하는 한국인을 모두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홍범도는 그곳으로 이주하여 소비에트 정부로부터 연금을 받으며 재혼한 아내와 여생을 꾸려 나갔다. 그는 집단농장 관리와 극장의 경비를 맡으며 세월을 보냈다. 평생 별호를 짓지 않았으나 민중은 비장군(飛將軍, 용맹한 장수)으로 불렀다. 그는 1943년 10월 25일 중앙아시아의 크즐오르다에서 유명을 달리하였다. 그의 묘 앞에 동상을 세우고 그 아래 사적을 기록해두었고, 고려인 동포들은 그의 기일이나 설날이면 어김없이 묘소를 찾아 참배하는 등 독립정신을 높이 기렸다. 유해는 지난해 광복절을 맞아 국내로 봉환되었다. 정부는 홍범도에게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2021년 단양 이씨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