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숨결
가을이 깊은 어느 날
볕 좋은 밀양 여행

글·사진 임운석 여행작가
가을이 깊은 어느 날
볕 좋은 밀양 여행
나날이 깊어간다. 아니 깊어간다는 표현보다 밀려난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것은 가을이다. 가을의 끝자락인 11월은 다시 올 수 없는 2019년의 마지막 가을이다. 그래서일까. 남은 시간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얼마 남지 않았지만 가을의 끝을 잡고 싶은 마음에 찾은 곳이 있다. 볕이 빈틈없이 빼곡히 내리쬐는 밀양(密陽)이다.

늦가을의 몸부림, 밀양의 추색
밀양은 교통의 요충지다. 경상남도 동북지역에 위치해 대구·울산·부산광역시와 창원시에서 1시간이면 밀양에 닿는다. 오랜 역사와 전통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예나 지금이나 경상도 제일의 당일치기 여행지로 손꼽힌다. 요즘은 서울에서도 당일치기 여행이 가능하다. 2시간 남짓한 시간이면 KTX가 서울과 밀양을 연결해준다.
밀양에서 가장 먼저 찾은 곳 위양지. 계절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는 곳이다. 원래 이름은 양량지(陽良池)였는데 어느 틈엔가 위양지(位良池)로 둔갑했다. ‘양민을 위한 연못’이란 뜻이다. 밀양에는 김제 벽골제, 제천 의림지와 함께 삼한시대 3대 농업 저수지 중 하나인 수산제가 있다. 그만큼 고대부터 농업이 발달했다. 위양지 역시 농사를 위해 조성된 저수지로써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양지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봄날의 눈꽃’이라 불리는 이팝나무꽃 때문이다. 싱그러운 새순 위에 소담스럽게 내려앉은 새하얀 꽃잎이 겨울 눈꽃처럼 아름답다. 이팝나무꽃은 5월이 절정이다. 그때가 되면 때를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들로 위양지가 몸살을 앓기도 한다. 그다음 순서를 꼽으라면 만추다.
위양지를 에두른 산책로에는 왕버드나무와 소나무가 울창하다. 왕버드나무의 단풍은 노랗거나 붉은 색으로 물든다. 사철 푸른 소나무와 조화롭다. 봄날의 싱그러움과 다른, 가을의 완숙미가 느껴진다. 숙고의 계절에 딱 어울리는 풍광이다.
위양지의 풍경을 완성하는 것은 완재정이다. 1900년에 안동 권씨 문중이 지은 정자인데 위양지 가운데 자리한 섬 한가운데 자리를 틀고 앉아있다. 지금은 섬에 다리가 놓여 누구나 쉽게 완재정을 돌아볼 수 있지만 옛날에는 배를 타야만 했다. 빼어난 풍광을 오롯이 혼자서 독차지하다가 이제는 여러 사람과 공유하게 된 셈이다. 이 또한 위양지의 이름(양민을 위한 연못)과 그럴싸하게 어울린다. 완재정에서 보는 풍광은 위양지 둘레에서 보는 것과 사뭇 다르다. 계절의 한가운데 서 있는 느낌이랄까. 주변을 돌아보니 위양지는 농사만 짓기엔 아깝다. 농사보다는 시절을 즐기는 풍류가 어울려 보인다.
위양지를 찾을 때 거울처럼 잔잔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늦가을 11월의 위양지에는 바람이 주인행세를 한다.

완재정을 향해 자란 왕버드나무

밀양을 빛나게 하는 삼랑진의 특별한 곳
밀양에는 유난히 너덜지대가 많다. 대표적인 곳이 만어산 암괴류(천연기념물 제528호)다. 만어산은 산 중턱에 자리한 사찰의 이름 만어사에서 이름을 따왔다. 만어사는 울퉁불퉁 제멋대로 생겨먹은 돌덩이들을 물고기로 여겨 ‘만 마리의 물고기(萬漁)’라는 뜻이다.
주차장에서 몇 걸음을 옮기는데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산기슭에서 골짜기를 따라 산꼭대기까지 크고 작은 돌들이 누가 쏟아 놓은 것처럼 널브러져 있다. 마치 산사태가 난 듯 아주 위협적이다. 규모는 폭이 약 100m, 길이가 약 500m라고 한다. 돌의 모습은 흡사 연어 떼가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장면처럼 보인다. 만어(萬漁)라고 부르는 이유를 짐작하겠다. 도대체 이 많은 돌은 어디서 왔을까? 보는 이마다 궁금증에 고개를 갸웃거린다.
믿기 어려운 현상에는 언제나 전설이 따라붙기 마련. 그 유래도 다양하다. 『동국여지승람』과 『택리지』에는 동해 용왕의 아들 이야기가 전해온다. 옛날 옛적 동해 용왕의 아들이 자신이 단명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살 방법을 수소문하던 중에 낙동강 건너 무척산에 신통한 스님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한걸음에 찾아 지혜를 구하자, 스님은 ‘가다가 멈추는 곳이 인연이 있는 곳’이라며 알쏭달쏭한 말을 해줬다.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용왕의 아들이 길을 떠나자 그 뒤를 수많은 물고기 떼가 뒤따랐다. 얼마를 갔을까, 그들이 멈춘 곳은 만어사가 있는 만어산 기슭이었다. 그 뒤에 용왕의 아들은 미륵바위로 변했고, 그를 따르던 수많은 물고기 떼는 크고 작은 돌이 됐다고 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 하는 전설이다.

고색창연한 영남루에 올라
밀양에 왔다면 반드시 찾는 곳이 영남루다. 흔히들 ‘영남루는 밀양 여행의 알파, 오메가’라 부른다. 시내에 자리해 교통이 편리한 데다 야경이 빼어나 마지막 여행지로도 손색이 없다.
영남루는 밀양강을 잇댄 절벽에 자리한다. 강 건너편에서 본 풍광은 밀양 제일이다. 짙푸른 대나무가 선비의 지조를 자랑하듯 울창하고, 오른편에는 울긋불긋한 단풍이 계절의 끝을 향해 밀양강과 함께 유수한다. 물길은 삼랑진에 이르러 낙동강으로 흘러들겠지만 홍엽의 단풍은 바람결에 나뒹굴며 겨울을 맞을 것이다.
영남루에 오르는 길, 후문 쪽에 작곡가 박시춘 선생의 옛집이 복원돼 있다. 선생은 <신라의 달밤>, <이별의 부산정거장>, <굳세어라 금순아> 등 엄청난 곡을 남겼는데 모두 3,000곡이 넘는다. 선생의 대표작들이 골목 어귀 분위기를 구슬프게도 활기차게도 한다.
후문으로 들면 영남루가 한눈에 들어온다.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조선 3대 누각’으로 불릴 만한 풍모다. 정면 5칸, 측면 4칸에 2층에는 팔작지붕을 얹어 기품을 더했다. 본루인 영남루를 중심으로 양옆에 날개를 펼치듯 동서로 부속 건물을 두어 전체 규모를 키웠다. 동편 건물은 능파당이고 서편 건물은 침류각이다. 그중 침류각은 본루와 높이를 다르게 해 지붕이 계단처럼 이어진다. 입체감과 율동감을 살린 디자인이다. 기둥은 높고 그 간격은 매우 넓다. 한 아름이 넘는 기둥이 모두 56개에 달한다. 기둥은 붉게 채색되어 있지만 오랜 역사를 보여주듯 색이 바랬다. 더군다나 밑부분은 나뭇결이 그대로 드러났다. 긴 세월을 소리 없이 보여주고 있다.


아랑을 애도하는 아랑각
능파당을 통해 영남루에 오른다. 면적이 워낙 넓어 누각 가운데까지 빛이 들지 못한다. 사방이 탁 트여 있어 바람이 쉼 없이 오간다. 영남루가 한여름에 피서지로 인기 있는 이유다. 주변 경관을 살피고 나니 시선이 대형 편액에 꽂힌다. 밀양강 쪽에 걸린 영남루(嶺南樓)는 1843년 이현석이 7세 때, 영남제일루(嶺南第一樓)는 이현석의 형 이증석이 11세 때 썼다. 이들은 영남루를 중수한 밀양 부사 이인재의 첫째와 둘째 아들이다. 어리광을 부릴 나이에 좌중을 압도할만한 힘찬 글을 썼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영남루 바깥 북쪽 처마에도 세 개의 대형 편액이 나란히 걸려 있다.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있는 ‘영남루(嶺南樓)’ 글씨는 당대 명필 송하 조윤형의 글씨고, 좌측 큰 고을이란 뜻의 ‘강좌웅부(江左雄府)’와 영남지방의 아름다운 누각이란 뜻의 ‘교남명루(嶠南名樓)’ 글씨는 이유원이 쓴 것이다. 글씨에서 기백과 절제미가 느껴진다. 2층 마루에서 볼만한 것은 편액뿐만이 아니다. 천장에 그려놓은 고색창연한 그림들이 민속화를 보는 듯 화려해 눈을 쉽게 뗄 수 없다.
영남루는 원래 신라 5대 사찰 중 하나였던 영남사의 종각이 있던 범루였다. 고려 때 와서 절은 소실되고 범루만 남은 것을 공민왕 14년(1365)에 새로 지어 영남루라 이름을 지었다. 조선 시대 들어와서도 소실과 중수를 반복하다가 헌종 10년(1844)에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했다.
영남루 후문을 나서 강 쪽으로 내려가면 아랑각이 나온다. 조선 명종(1534~1567) 때 밀양부사의 외동딸이었던 아랑은 열여덟 살 때 유모의 꾐에 빠져 영남루로 달구경 나왔다가 구실아치에게 봉변을 당하게 되자 밀양강에 투신했다. 이후 아랑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하며 시신을 발견한 대밭에 아랑각을 세웠다.
내려온 길을 되짚어 올라가면 밀양읍성으로 이어진 솔숲길이 나온다. 밀양읍성은 밀양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으로 전망이 장쾌하다. 성곽 높은 곳에 자리한 무봉대가 전망대 역할을 한다.
바람을 맞으며 풍경을 내려다본다. 밀양의 명소를 밟았던 하루를 되돌아보니 그 시간들이 참 느슨했다. 그래서 더 유유자적할 수 있었다. 볕 좋은 날 밀양을 찾은 것은 행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