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터전

뉴욕 신한회의 결성과

독립청원 외교활동

INPUT SUBJECT


글 홍선표 나라역사연구소 소장


뉴욕 신한회의 결성과

독립청원 외교활동


1910년대 재미 한인의 군사·외교운동5



제1차 세계대전 종결 직후 뉴욕 한인들은 국제정세의 변화에 주목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재미한인사회의 중심지인 미국 서부의 캘리포니아에 비해 뉴욕에는 주변 인근 지역을 다 포함해도 30~40명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한인 수가 적었지만, 뉴욕 한인들은 소약국민동맹회의는 물론 미국 의회와 정부를 상대로 활발한 독립청원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미국 동부에서 일어난 이 같은 외교활동은 2·8운동과 3·1운동의 서막을 여는 역사적인 불씨가 되었다.




신한회의 결성


뉴욕 한인들은 제1차 세계대전 종결 직전부터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여러 방안을 모색했다. 1917년 10월 뉴욕에서 결성된 소약국민동맹회가 대전 종결 직후 제2차 대회를 개최할 것이라는 점과 그 뒤를 이어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개최될 것이라는 점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김헌식은 대전 종결이 선포된 다음날인 1918년 11월 12일 북미지방총회장 이대위에게 가장 먼저 소약국민동맹회의에 한인 대표자를 파견할 것을 제안했다. 그의 제안을 받은 이대위는 외교는 중앙총회가 나설 일임을 내세워 불응하고 중앙총회장 안창호에게 한인 대표자 파견 문제를 위임했다.
대한인국민회측에서 별 호응이 없자 김헌식과 신성구 등 18명의 뉴욕 한인들은 독자 활동에 나섰다. 한국 독립을 호소하고 추진할 방편으로 1918년 11월 중순경 신한회(The New Korea Association)를 결성한 것이다. 신한회의 조직은 회장 신성구, 서기 조병옥, 외무원 김헌식·이원익으로 구성되었다.



신한회의 독립청원 외교


신한회는 결성 때부터 독립운동을 위한 의연금 모금활동에 착수하였다. 그해 12월까지 모금한 금액은 약 900달러였다. 이는 한인들의 수를 감안할 때 결코 적지 않은 금액으로 뉴욕 한인들의 뜨거운 열성을 잘 보여준다.
신한회는 11월 30일 특별회를 개최하고 만장일치로 12개 항의 독립청원서를 채택하였다. 청원서의 주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의 국토가 일본에 강압적으로 병합되어 한국인이 피정복의 인종으로 전락된 것은 부당하고 불법적이다. 둘째, 탐욕 때문에 약한 이웃 나라를 파멸시키는 제국주의는 연합국의 승리로 파괴되었다. 셋째, 미국 정부와 국민 그리고 전쟁에 승리한 연합국은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약소민족에 대한 민족자결의 대원칙을 지지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강한 이웃 나라인 일본에 의해 축적된 상처와 부정함에 대해 분노를 표현하며, 한국의 현 상황과 한국인의 분노에 대해 짧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준비해 이를 미국의 대통령과 상·하원 외교위원회, 그리고 파리강화회의 미국 대표단에게 제출한다.


신한회를 대표한 신성구와 김헌식은 독립청원서를 12월 2일 자 공문에 첨부해 12월 3일 미국 상원 외교위원장 로지(Henry C. Lodge)를 찾아가 전달하려 했다. 그런데 로지는 국무부에 제출해 줄 것과 외교위원회 위원 대부분이 이런 문건을 받아줄 수 없을 것이라는 구실을 들어 접수를 거절했다. 두 사람은 다시 미 국무부를 찾아갔으나 여기서도 거절당하자 파리에서 강화회의 미국대표단을 이끌고 있는 국무장관 랜싱(Robert Lansing)에게 문건을 우송했다.



독립청원 외교활동에 대한 미국 언론의 보도와 확산


미국 의회와 정부를 상대로 신한회가 한국 독립을 호소한 청원서를 전달했다는 사실은 1918년 12월 4일 자 연합통신을 통해 즉각 전 세계로 보도되었다. 보도 내용은 “한국은 미국 정부를 향하여 한미조약에 의거, 한국의 독립을 보호하며 일본의 통치권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하는 청원서를 제출”했다는 것이었다. 『워싱턴 타임스』는 12월 6일 자 기사 “Want Demand Made for Independence of Korea”에서 재미 한인들이 일본 지배하의 한국을 독립시키기 위해 윌슨 대통령과 미 상원 외교위원회에 호소했다고 전했다. 그리고 1882년의 한미조약을 상기할 때 미국은 도덕적으로 한국의 독립 주권을 보호할 모든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는 한국인의 주장을 실었다. 한편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되는 일본인 신문 『일미보』는 12월 5일 자 기사에서 한국인의 독립청원활동은 경거망동한 짓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신한회의 독립청원 외교활동이 미국 내 각 언론에서 보도되자 『신한민보』 편집자 홍언은 1918년 12월 12일 자 논설에서 “일미보의 ‘한국 독립 제창’을 비평한 것을 논박함”이란 글을 실었다. 그는 이번 “재미 한인의 독립 제창이 워싱턴 연합통신의 전보로부터 세계를 진동”하고 “마른하늘에 벽력이 떨어졌다” 할 만큼 놀라운 사건으로 간주했다. 그런 후 『일미보』에 대해 2회에 걸쳐 세세하게 반박하면서 이번 신한회의 외교활동은 “8년간 받아온 천고의 대 치욕을 씻으려고 일본에 대하여 선전서(선전포고서)를 걸어놓은 것”과 같다고 높이 평가했다.
신한회의 독립청원 외교활동은 태평양을 건너 일본 내 영자 신문과 일본인 신문에도 보도되었다. 먼저 『The Japan Advertiser』는 1918년 12월 15일 자 “Koreans Agitate for Independence”에서 재미 한인들이 미국 의회와 정부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한 사실을 처음으로 알렸다. 이어서 1919년 1월 18일 자에 “Korean Independence”란 제목으로 미국 내 한인 단체가 민족자결의 원칙을 한국인에게도 적용해달라는 결의안을 채택해 윌슨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 미국 대표단, 그리고 미 의회 외교위원회까지 발송했다고 보도했다. 여기서 한인 단체라 함은 신한회를 의미한다. 일본 신문에서 보도된 신한회의 외교활동 소식은 그 직후 추가된 이승만·정한경의 파리행 추진활동 소식과 함께 재일 유학생의 2·8독립선언, 나아가 국내 3·1운동 준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신한회는 미국 의회와 정부를 상대로 한 외교활동 외에 1918년 12월 제2차 소약국민동맹회의 때 대한인국민회의 대표단과 별도로 한인 대표를 파견했다. 신한회의 한인 대표는 외무원 김헌식이었는데 그는 소약국민동맹회의에서 선출한 7인의 집행위원 중 한 사람으로 뽑힐 정도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후 신한회는 회원 일부가 기존 대한인국민회로 입회하면서 조직이 와해되자 1919년 말경 대한인독립단(단장 김헌식, The Korean Independence League)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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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식, 신성구, 이원익 이름으로 작성된 신한회 공문(1918.1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