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독립운동가의 초상

학생, 독립투쟁의
주역으로 나서다

학생, 독립투쟁의<BR />주역으로 나서다

글 김정인 춘천교육대학교 교수


학생, 독립투쟁의 주역으로 나서다


  


학생운동은 민족 차별에 분노한 학생이 거리로 나선 3·1운동에서 처음 등장했다. 3·1운동 이후 학생들은 독서회와 같은 비밀결사를 만들어 활동하고 학교 문제와 민족 문제 해결을 요구하며 동맹휴학의 시대를 열었다. 1926년에는 순종의 인산일을 맞아 6·10만세운동을 일으켰다. 3·1운동과 6·10만세운동의 주역으로, 1920년대 내내 전국 곳곳에서 동맹휴학을 벌였던 학생운동은 1929년 광주학생운동으로 정점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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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운동의 동기가 된 두 여학생 (이광춘, 박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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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정문을 지키고 선 경찰 (『동아일보』, 1929.12.28.)



민족 차별에 분노하고 저항하다


전국적 학생시위로 번져간 광주학생운동의 발단은 민족차별이었다. 1929년 10월 30일 나주에서 광주로 통학하는 기차 안에서 일본인 남학생이 한국인 여학생의 갈래머리를 잡아당기며 성희롱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 간에 시비가 일어나자 경찰은 일방적으로 한국인 학생의 뺨을 때렸다. 다음날 기차 안에서 한국인 학생들은 일본인 학생에게 사과를 요구했다. 일본인 학생이 거절하면서 다시 싸움이 일어났다. 이번에도 일본인 차장과 승객이 한국인 학생에게 모욕을 주었다.

며칠 후인 11월 3일 메이지 천황의 탄생을 기념한다는 천장절 기념식과 함께 전남 지역 누에고치 생산 6만 석 돌파를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광주지역 학생들이 동원되었다. 그런데 일본인 학생들이 거리를 활보하며 한국인 학생들에게 행패를 부렸다. 이로 인해 시내 곳곳에서 충돌이 일어났다. 광주역에서는 수십 명이 다치는 일이 발생했다. 한국인 학생들은 광주고등보통학교 체육관에서 긴급학생총회를 개최하고 각목과 곤봉으로 무장한 채 일본인 학생들이 다니는 광주중학교로 행진했다. 경찰이 이를 막고 해산시켰다.

조선총독부의 대응은 차별적이고 강경했다. 광주의 모든 학교에 휴교령을 내렸고 70여 명에 이르는 한국인 학생들을 긴급 체포했다. 조선총독부의 일방적인 처사에 한국인들은 크게 분노했다. 병원에 입원한 학생들까지 강제 연행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론이 들끓었다. 전국 각지로부터 연대의 움직임이 일었다. 서울의 사회단체들은 진상 조사를 위해 광주에 조사원을 파견했다. 신간회는 허헌, 황상규, 김병로 등의 지도부를 파견하여 진상을 조사했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박일과 권유근, 중앙청년동맹에서는 부건, 조선학생회에서는 이한성 등을 파견했다. 권유근, 박일, 부건은 함께 11월 6일 광주로 내려가 조선일보 광주지국, 광주일보를 방문하고 다음날인 11월 7일 조선공산청년회 전남책임자이자 전남청년연맹 위원장인 장석천과 조선청년총동맹 집행위원이자 광주청년동맹 간부인 강영석을 만났다. 이 만남에서는 서울의 중등학교 학생들이 연합시위운동을 일으켜 광주학생운동을 전국화하자는데 합의를 이뤘다. 이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강영석은 권유근과 함께 그날 밤 서울로 상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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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운동 당시 교내에 게시된 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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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운동 당시 경찰과 대치 중인 학생들

(『중외일보』, 1930.01.08.)



광주에서 서울로


광주에 남은 장석천은 학생비밀결사인 독서회를 지도하던 독서회중앙부 책임비서인 장재성과 함께 학생 석방을 요구하는 제2의 시위를 준비하는 투쟁본부를 꾸렸다. 시위 날짜는 광주 장날이자 다시 학교 문을 여는 11월 12일로 정했다.

11월 12일 광주고등보통학교에서는 독서 회원들이 나서 구속 학생 석방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서자고 선동했다. 학생들은 시위 대오를 꾸려 각목과 곤봉으로 무장한 채 교문 밖으로 나왔다. 이들이 향한 곳은 광주형무소였다. “구속학생 석방하라”는 구호를 외치고 “학생 대중아, 궐기하자”, “조선 민중아, 궐기하자” 등이 쓰인 전단지를 배포했다. 광주농업학교생 200여 명도 동참했다. 전남사범학교와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교문에서 제지당해 동참하지 못했다. 광주형무소 앞에서 대기하던 경찰은 학생들을 포위하고 체포에 들어갔다. 이날 장재성을 비롯한 투쟁본부 간부 대부분이 체포되었다. 이날 시위는 조선총독부의 보도 통제로 당장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신간회를 비롯한 서울의 운동단체들이 2차 시위 소식을 전해들은 건 며칠 후였다. 11월 16일 광주를 탈출하여 서울로 잠입한 장석천이 신간회 본부를 방문하여 광주 상황을 알렸다. 그는 조선청년동맹과도 접촉했다. 조선청년동맹과 조선학생전위동맹은 격문을 준비했고, 12월 초 서울 시내 학교에 배포되었다. 비밀결사인 독서회들은 맹휴운동도 준비했다.

12월 5일 경성제이고보가 제일 먼저 맹휴에 들어갔다. 이어 12월 6일 중동학교, 12월 7일 경성제일고보 등 서울 시내 학교에서 잇달아 맹휴가 일어났다. 맹휴운동은 12월 9일의 연합시위로 발전했다. 이날 시위에는 경신학교를 선두로 보성고등보통학교, 중앙고등보통학교, 휘문고등보통학교, 남대문상업학교 등이 참여했다. 다음날에도 시위는 계속되었다. 12월 10일에는 휘문고보,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근화여학교, 협성실업학교, 기독교청년학관, 배재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시위에 나섰다. 11일에는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경성여자상업학교, 동덕여고보, 실천여학교, 정신여학교 등 여학교 학생들이 맹휴를 선언하자 학교 당국은 즉시 휴교를 단행했다. 이처럼 12월 13일까지 이어진 시위와 맹휴운동에는 30개 남녀 전문학교와 중등학교는 물론 각종학교, 보통학교 학생 1만 2천여 명이 참여했다. 1,400여 명이 체포되어 그중 45명이 구속되었고 조선총독부는 12월 13일에 조기방학을 단행했다. 하지만 광주에서 서울로 확산된 학생시위는 12월 중순까지 중등학교가 있던 개성, 동래, 원산, 춘천, 평양, 함흥 등으로 번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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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휴학을 보도하는 기사(『동아일보』, 1929)

  



여학생 시위, 다시 전국화를 촉발하다


서울에서는 1930년 1월 초순 학교별로 개학이 이루어졌다. 1월 9일경부터 서울에서는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다시 시위운동을 논의했다.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4학년생인 최복순은 1929년 12월 시위 당시 조기 방학으로 이화여고보가 시위운동을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김진현, 최윤숙과 함께 근우회 서무부장인 허정숙을 찾아가 이 문제를 상의했다. 이 자리에서는 3학기 개학일인 1월 15일에 서울 시내 여학교가 일제히 맹휴와 시위를 전개하기로 뜻을 모았다. 이화여고보 기숙사에 운동본부를 차리고 깃발과 격문을 제작하는 등 시위를 준비했다. 깃발에는 “학교는 경찰의 침입에 반대하라, 식민지교육정책을 전폐하라, 광주학생사건에 대해 분개하라, 학생 희생자를 석방하라, 일본의 야만정책에 반대하라, 각 학교의 퇴학자를 복교시켜라” 등의 격문을 적어 넣었다. 또한 “제국주의 타도 만세, 약소민족 해방 만세”가 쓰인 붉은 기도 준비되었다. 여학생들의 시위 준비 소식에 휘문고보를 비롯한 남학생들도 가담을 결정했다.

1월 15일 아침 9시 30분에서 10시경까지 거의 동시에 실천여학교를 필두로 근화여학교, 이화여고보, 배화여고보, 경성보육학교, 태화여학교, 동덕여자고보, 정신여학교, 경성여자미술학교, 휘문고보, 경신학교, 중동학교, 배재고보, 보성전문학교까지 14개 남녀학교가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다음날에는 전날 시위에 참가하지 않았던 숙명여고보, 경성여자상업학교, 진명여고보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시위는 나흘간 이어졌는데 18개 학교에서 7천 명의 학생이 참여했다.

1930년 1월 15일의 서울 학생시위는 ‘여학생연합시위’로 불릴 만큼 여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조선총독부의 조사에 따르면, 시위에 참가한 대부분 여학교에서 전교생이 참가했다. 경찰은 1929년 12월 1차 시위 당시 주동자들이 검거되고 경계가 엄중한 가운데 1월 15일 서울 한복판에서 다시 여학생 주도의 연합시위가 일어나자 단순한 학생운동이 아니라며 소요죄를 적용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1930년 1월 여학생이 주도한 연합시위로 다시 전국에서 학생시위가 일어나 3월까지 이어졌다. 특히 3월 1일을 전후해서는 3·1운동 11주년을 겸해 학생시위가 전국에서 일어났고 보통학교 학생들도 많이 참여했다.

1930년 봄까지 이어진 광주학생운동에는 북으로는 함북 회령, 남으로는 전남 제주까지 전국 13도에서 280여 개 학교가 참여했다. 참가학생은 연인원 5만 4천 명에 달했다. 당시 중등학교급 이상 학생은 8만 9천 명이었다. 광주학생운동으로 구속된 학생은 1,642명이었다. 시위 주동자 혹은 가담자로 퇴학당한 학생이 582명, 무기정학 당한 학생은 2,330명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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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운동 공판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