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만든 사람

광주학생항일운동의

불씨가 되다

역사를 만든 사람

글 임영대 역사작가


광주학생항일운동의

불씨가 되다



  

박준채는 광주고등보통학교 2학년이던 1929년에 사촌누이 박기옥을 희롱하는 일본인 학생과 충돌하여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촉발한 주역이다. 이후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은행원을 거쳐 교육자가 되었다. 조선대학교 법대 교수, 학장, 여대 학장, 대학원장 등을 지내고, 5·18 민주항쟁 때에는 조선대 시국양심선언에 관여했다. 광주학생독립운동 동지회 이사, 광복회 회원 등을 역임하며 광주학생운동의 정신을 알리는 데 노력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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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채

1914.06.28.~2001.03.07.

전라남도 나주

건국훈장 애족장(1990)

 



장엄한 학생대중이여! 궐기하자! 굳세게 싸우라!


1929년 10월 30일, 광주에서 나주로 가는 통학 열차에서 일본인 중학생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여학생들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했다. 이에 박준채를 비롯한 조선인 남학생들이 항의하자 일본인 학생은 사과를 거부하고 ‘조센징(조선인)’이라는 모욕적인 언사를 내뱉었다. 상황은 곧바로 충돌로 치달았다.
이들의 싸움은 둘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았다. 이미 광주 학생들은 나라를 빼앗긴 서러움과 함께 조선을 비하하고 일본을 격상하는 교육과정, 조선인 학생에 대한 일본인 교사들의 습관화된 차별, 평소 조선과 조선인에 대한 멸시를 숨기지 않는 일본인 학생들을 향한 누적된 증오를 갖고 있었다. 이것이 박준채와 일본인 학생의 갈등을 계기로 일시에 터져 나왔다. 패싸움이 벌어졌다.
사태에 불을 지핀 건 공정하지 못한 해결 과정이었다. 싸움이 벌어진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일본 경찰은 조선인 학생들만 구타했다. 일단 양쪽 모두 연행을 했던 경찰은 일본 학생들을 몰래 석방하고 조선인 학생들만을 구속했다. 신문에는 조선인 학생들을 비난하는 기사가 실렸다. 평소 일본 당국의 차별대우에 분개하고 있던 학생들에게 이런 노골적인 차별 대우는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었다. 광주 시내 여러 학교가 잇달아 시위를 벌였고, 각급 사회단체들도 합세했다. 그리고 여기서 학생들에게 보내는 선언문이 나왔다.


장엄한 학생대중이여! 최후까지 우리들의 슬로건을 지지하라! 그리하여 궐기하자! 싸우자! 굳세게 싸우라!…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를 확립시켜라! 식민지 노예 교육제도를 철폐하라! 민족문화와 사회과학연구의 자유를 획득하자! 전국 학생대표 회의를 개최하라!



쓰러지지 않는 청년의 힘


일제 당국은 학생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관련자 수백 명을 체포하고, 시위에 참여한 학생을 모조리 무기정학 시켰다. 학교도 무기한 휴교 처분을 내려 학생들이 모이지 못하도록 했다. 신문에서도 해당 사건을 보도하지 못하게 했다. 그럼에도 학생들의 의기는 꺾이지 않았다. 일제의 탄압으로는 사람들이 직접 전하는 소식까지는 막지 못했고, 강제휴학과 방학으로도 전국에 있는 학생과 시민들이 힘을 합쳐 일어나는 것을 완전히 차단할 수 없었다.


피가 있는 조선 ○○적 학생제군! 용감하게 싸우자, 시위운동, 스트라이크. 전국학생사건에 대한 학교 당국 및 포악한 조선총독정치 폭로연설회 등 모든 수단과 방법으로써 자유와 정의를 위해 교내에서 투쟁하여 일본제국주의의 간성까지 육박하자.


광주 학생들과 힘을 합치기 위해 전국에서 벌어진 동조는 맹렬했다. 194개에 달하는 학교에서 시위 또는 동맹휴학이 일어났으며, 참가한 학생은 5만 4천여 명에 달했다. 참가한 학생들은 일제의 탄압을 받아 그중 582명이 퇴학당하고 2,330명이 무기정학을 당하였다. 체포된 학생 1,642명 중에는 최고 징역 5년의 실형을 받은 사례도 있었다.
이 거대한 운동에 불을 댕긴 장본인이었던 박준채는 시위 둘째 날인 11월 4일에 경찰에 체포되었고, 다행히 연소자라는 이유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아 한 달 뒤에 석방되었으나 재학하고 있던 광주고등보통학교에서는 퇴학당했다.
이후 박준채는 서울에 있는 양정고등보통학교(현재 목동에 있는 양정중고등학교)로 전학하여 학업을 이어나갔다. 이 학교는 1905년에 순헌황귀비 엄씨의 조카 엄준익이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민족사학으로, 왕실의 후원을 받는 민족학교였다. 그만큼 민족의식도 높았고, 3·1운동에서부터 광주학생운동, 조선어학회사건에 이르기까지 항일운동 대열에도 솔선하는 학교였다.
박준채와 직접 관련은 없지만, 양정고등보통학교는 민족의식을 드높이는 수단으로 체육활동에도 주력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우승을 이룬 손기정 선수가 이 학교 5학년이었고, 동메달을 수상한 남승룡 선수는 졸업생이었다.
박준채는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였으며, 귀국한 뒤에는 잠시 은행에서 일하다가 해방 이후 조선대학교 법대 교수, 학장, 여대 학장, 대학원장을 역임하며 1988년까지 30년 가까이 재직하였다.
사촌 누나 박기옥과 함께 일제강점기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주역으로 평가받았으며, 그 공을 인정받아 1962년에 대통령 표창, 1988년에 국민훈장 석류장,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이후 2001년 3월 7일에 노환으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