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오늘 세계의 그날

제2차 세계대전과

친일파 전성시대

INPUT SUBJECT


글 강응천 기획집단 문사철 대표, 역사저술가


제2차 세계대전과

친일파 전성시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모두 우리가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 동안 일어났다. 연합국의 승리로 끝난 제1차 세계대전은 우리 민족에게 독립의 희망을 안겨주었다. 3·1운동은 그런 흐름 속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일본이 추축국의 일원으로 참전한 제2차 세계대전은 우리 민족에게도 암울한 그림자를 던졌다. 일본은 총동원령을 내리고 한민족 말살정책을 펼쳤다. 지식인들은 대거 친일의 대열에 합류했다. 한국인이 과연 하나의 민족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절체절명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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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감싸고도는 불온한 공기


1940년 스웨덴 연구원 캘린더가 온실효과를 가져오는 온실가스의 성질을 밝혀냈다. 온실효과란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 등이 마치 온실의 비닐이나 유리처럼 지구 표면의 온도를 높이는 현상을 말한다. 온실가스는 지구로 들어오는 짧은 파장의 가시광선과 적외선을 통과시키고, 지구로부터 복사되는 긴 파장의 적외선을 흡수한다. 이렇게 흡수돼 지구 밖으로 달아나지 못한 적외선이 지구 전체에 온실효과를 일으킨다. 산업화로 인해 이산화탄소뿐 아니라 메탄, 염화불화탄소(프레온) 등이 배출되면서 생태계가 파괴되고 인류의 생존이 위협받을 수 있다는 위기감이 지구를 감싸고돌기 시작했다.

바로 그런 시기에 독일, 일본, 이탈리아 등 파시스트 국가들은 세계를 향한 침략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에스파냐 내전에 개입해 인민전선을 붕괴시켰고, 일본은 중국으로 쳐들어갔다. 미국, 영국, 프랑스는 그들의 총구가 자신들이 아닌 소련으로 향하도록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독일은 1939년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전 세계를 경악시켰다. 영국과 프랑스의 독일에 대한 유화정책은 파탄을 맞았다. 파시즘에 반대해 온 유럽의 좌익 세력도 큰 충격에 빠졌다. 소련의 중립을 이끌어낸 독일은 마음먹고 서쪽으로 진격할 조건을 마련했다. 세계는 이전보다 더 큰 세계대전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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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이 유대인에 대한 학살을 자행했던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이것이 세계대전이다


1939년 독일은 전차부대와 공군을 동원한 전격전 전술로 단숨에 체코와 폴란드를 점령했다. 독일은 점령지 곳곳에 수용소를 짓고 폴란드인과 유대인을 수용한 뒤 집단 학살을 자행해 유럽을 공포에 몰아넣었다. 히틀러의 나치스는 ‘열등한 폴란드인과 유대인이 독일의 순수한 혈통을 더럽히고 있으므로 멸종시켜야 한다’는 대중 선동을 펼쳤다.

독일군의 전격전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1940년 4월 덴마크와 노르웨이는 의표를 찌른 전격전의 희생양이 됐다. 이때부터 독일의 목표는 영국을 포함한 유럽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5월에는 프랑스가 믿어 의심치 않던 마지노 방어선조차 돌파당했고, 이 틈을 노린 이탈리아의 공격으로 남부 지역을 내주고 말았다. 결국 프랑스는 1940년 6월 14일 수도 파리마저 함락당해 독일군 앞에 무릎을 꿇었다. 독일은 프랑스 본국의 약 2/3를 점령하고 남부의 나머지 지역을 비시의 페탱 정부에 맡겼다. 비시 정권은 제3공화국 헌법을 폐지하고 파쇼적인 신헌법을 공포했다. 탈출한 드골은 런던에서 대독일 항전을 위한 자유프랑스위원회를 결성했다. 독일은 이어 영국 본토 상륙작전을 선언하고 제공권을 장악하기 위한 공습을 영국 곳곳에 가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고 판단해 참전을 선언했다. 1941년 3월이었다. 이로써 이미 아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중일전쟁과 소련·핀란드전쟁을 묶어 전 세계를 무대로 하는 세계대전이 현실로 다가왔다. 전쟁의 원인 가운데 하나는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들이 패전국인 독일과 이탈리아에 대해 지나치게 가혹한 제재를 가한 것이었다. 독일은 모든 식민지를 빼앗기고 과중한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특히 1929년 대공황이 유럽을 덮치자 실업자가 넘쳐나게 된 독일의 불만은 극에 달해 있었다.

독일은 영국에 대한 공습전인 브리튼전투에서 영국 공군을 제압하는 것이 여의치 않자, 일단 영국 상륙 작전을 미루고 전선을 동쪽으로 돌려 소련을 침공했다.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자본주의 국가와 사회주의 국가가 벌이는 최초의 전면전으로까지 확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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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불타고 있는 미국 전함

  



진주만을 기억하라!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이 하와이 진주만의 미국 해군 기지를 선전포고 없이 기습 공격했다. 일본 전투기와 폭격기 350대는 오전 7시 55분 기습 공격을 펼쳐 미국의 순양함 3척과 구축함 3척 등 다수의 함정과 180대가 넘는 항공기를 파괴하고 3,0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또 같은 날 타이완 기지의 일본 폭격기들은 필리핀에 있는 클라크와 이바 군용 비행장을 공격해 수많은 미군 항공기를 파손시켰다. 일본은 동시에 인도네시아, 미얀마 등 동남아시아로 진격, 전선을 확대해 세계를 상대로 전쟁에 돌입했다.

뜻밖의 기습을 당한 미국은 처음에는 적잖이 당황했지만, 신속히 전열을 정비하고 반격에 나섰다. 미국 의회는 8일 신속하게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루스벨트 미 대통령은 “진주만을 기억하라!”며 미국인의 애국심을 고취했다. 일본이 미국을 기습한 이유에 대한 가장 유력한 설은 중일전쟁의 장기화와 미국, 영국 등의 개입에 대한 돌파구를 찾기 위해 전면전을 감행했다는 것이다.

일본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단기간에 승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4년이 지나도록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전쟁을 계속 수행하기 위해서는 석유, 고무 같은 천연자원 확보를 위해 인도차이나반도를 점령하는 것이 불가피해졌다. 또한 미국이 고철과 석유의 일본 수출을 전면 금지하고, 영국도 일본의 세력 확장에 제동을 걸자 이들과 전면전을 선택하는 것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는 것이다. 일본은 진주만을 공격하면서 이 전쟁을 아시아 대 미국과 유럽의 구도로 몰아가려 했다. 여기에는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워 스스로 아시아의 맹주가 되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 그러나 이는 일본이 점령지에서 인적, 물적 수탈을 원활히 하기 위한 속임수일 뿐이었다.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전면전을 벌인 일본이 승리하려면, 유럽 전선에서 독일이 소련을 무너뜨리고 영국과 미국에 총공세를 펴야 할 터였다. 바야흐로 세계대전은 유럽과 아시아 태평양을 하나의 전선으로 묶어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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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난파가 쓴 친일의 글(『매일신보』, 1940.07.07.)

  



한민족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지 6일째 되던 날, 서울 부민관에서 임전보국전선대회라는 것이 열렸다. 대회에는 1,000여 명이 참가해 “황국신민으로서 황도 정신을 선양하고, 사상 통일을 기한다”며 친일 활동을 다짐했다. 이 대회의 단장은 3·1운동의 민족 대표 33인 중 한 명인 최린, 고문은 『독립신문』 사장을 지낸 윤치호 등이었다.

친일 신드롬은 문화계도 강타했다. 회화봉공(繪畵奉公), 화필보국(畵筆報國)을 내세우며 일본 군국주의를 찬양하고 국방 기금을 마련하는 전람회도 개최됐다. 이런 미술계의 움직임에는 조선미술가협회의 창설을 주도하고 〈금비녀 헌납도〉를 그린 김은호가 앞장섰다. 음악가들도 일제의 침략 전쟁을 미화하는 노래를 만들었다. 〈정의의 개가〉를 작곡한 홍난파와 〈후지산을 바라보며〉의 곡을 쓴 현제명이 대표적이다. 특히 홍난파는 1940년 7월 7일 『매일신보』에 “우리의 모든 힘과 기량을 기울여서 황국신민으로서 음악 보국 운동에 용왕매진(勇往邁進)할 것을 마음속에 스스로 기약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라는 친일의 글을 실었다.

문단에서는 1939년에 이광수, 최재서, 박영희 등이 조선문인협회를 결성해 내선일체(‘일본과 조선은 하나’라는 뜻)를 표방하며 친일 문학 활동을 전개했다. 이광수는 1938년 한국인이 스스로 일본인과 같은 성으로 바꾸는 창씨개명을 해 민족의 지위를 올리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모윤숙, 노천명 등 여류 문인도 조선임전보국단에 가입해 공출, 헌금 등 전쟁 협력 활동을 펼쳤다. 교육계의 대표적인 친일 인사 김활란 이화여전 교장은 1938년 애국여자단을 만들어 친일 활동을 벌였다.

민족지를 표방한 언론들도 친일 행각에 나섰다. 1938년 일제가 조선지원병령을 공포하자, 『조선일보』는 이 법령이 “내선일체의 정신으로 종래 조선 민중이 국민으로서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던 병역 의무의 제일 단계를 실시케 하는 것”이라면서 “황국신민으로 그 누가 감격치 아니하며 그 누가 감사치 아니하랴”라고 흥분했다. 『동아일보』도 “황국신민으로서 감사하며 본분을 다하자”는 선동에 나섰다.

불교계는 1937년에 “조선 불교를 대동단결 시켜 국민정신 진흥 운동에 앞장세우자”는 모임을 갖고 일본군을 위문하는 등의 친일 행사를 벌였다. 천도교는 청년단이 앞장서고, 유교는 조선유림연합회를 결성해 친일 행각을 벌였다. 기독교계도 남장로선교회 등 일부는 신사참배를 거부했지만, 대부분은 일찍부터 신사참배에 참여했다.

친일파는 한일병합 이전부터 있었지만, 그 수가 늘어나면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1937년 중일전쟁 무렵의 일이다. 일제가 대륙 침략을 본격화하면서 인적·물적으로 한국인의 협조가 필요해지자 친일파를 적극적으로 양성하기 시작했고, 일부 한국인이 이에 호응해 민족을 팔아 자신의 이익을 챙겼다.

일제는 일선동조론(일본과 조선의 조상이 같다는 논리)을 내세워 한국인도 일본인과 똑같이 황국신민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내선일체 구호, 창씨개명 운동이 바로 황국신민화 정책의 일환이었다. 한국인을 지구상에서 없애고 일본인으로 흡수하겠다는 민족말살정책인데, 한국 최고의 지성인들이 그에 감사하며 동족을 전쟁 노예로 바쳤다. 한민족은 일제의 물리적 수탈 못지않게 무서운 친일파들의 지적, 문화적 변절에 의해 최악의 생존 위기를 맞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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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 친일 문학가 이광수

  



그래도 희망은 있다


전쟁과 식민 지배의 광풍은 로켓 개발, 우생학 등 과학기술의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과학기술이 이 같은 인류 파괴에 동원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1943년 네덜란드의 캄펜 병원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인공신장 이식 수술은 인류에게 한 줄기 빛을 선사했다. 네덜란드의 젊은 의사 콜프가 요독증 말기로 고생하는 스크리버를 위해 셀로판지로 만든 반투막을 사용해 수동 정화 장치를 마련해준 것이다. 이 수술의 성공은 몸 밖의 기구가 인간의 장기를 대신해 생명 활동을 연장시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같은 해 우크라이나 태생 미국 생화학자 왁스먼이 결핵 치료에 효과적인 항생물질 스트렙토마이신을 발견했다. 그동안 결핵균은 페니실린에도 끄떡없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방선균류인 스트렙토미케스 그리세우스로부터 추출한 스트렙토마이신에는 매우 민감하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스트렙토마이신은 페니실린 발견 이후 개발된 최초의 항균제로서, 결핵균뿐 아니라 장티푸스균 같은 세균도 없앨 수 있어 항균 치료에 많은 기여를 했다. 인류가 절멸할 것 같은 위기 속에서도 희망은 꺾이지 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