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숨결
이맘때 걷고 싶은 길
문경새재길

글·사진 임운석 여행작가
이맘때 걷고 싶은 길
문경새재길
문경새재는 영주 ‘죽령’, 영동 ‘추풍령’과 함께 조선시대 3대 고갯길로 꼽힌다. 당시 문경새재는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가장 빠른 길이었다. 입신양명을 꿈꾸는 선비, 봇짐을 메고 다녔던 보부상 등 수많은 나그네가 이 길을 오갔다. 오늘날 문경새재는 걷기 좋은 흙길로 다시 태어나 한국인들이 꼭 가봐야 할 ‘한국관광 100선’에 선정됐다.

제1관문 앞 너른 들에 핀 토끼풀
문경새재 웬 고개인가?
예부터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을 영남대로라 했다. 한양과 부산 동래를 잇는 약 380km의 이 길에는 높고 낮은 고개가 여럿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높은 고개가 문경새재였다. ‘새재’라는 이름은 ‘고개를 넘으려면 새조차 한번 쉬었다 가야 할 만큼 높고 험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 다른 뜻으로 ‘새로운 고개’, ‘하늘재와 이화령 사이(새, 間)의 고개(岾)’라는 뜻도 있다. 어느 것이 옳고 그르냐를 따지는 일은 무의미해 보인다. 중요한 것은 조령산과 주흘산 사이에 있는 문경새재가 가장 험준하고 높은 고개였다는 점이다.
영남에서 한양까지 가는 길이 문경새재만 있는 게 아니다. 죽령과 추풍령이 더 있었다. 그런데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가던 선비들은 유독 문경새재만을 고집했다고한다. 죽령을 넘으면 과거에서 죽죽 미끄러지고,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과거에서 떨어진다는 속설 때문이었다. 과거시험을 봐야 했던 선비 입장에서는 설령 속설이라 하더라도 따르고 싶었을 것이다. 게다가 문경새재의 문경(聞慶)은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으니, 입신양명을 꿈꾸던 선비들에게 문경새재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 코스였다.
역사와 함께한 문경새재
문경새재는 군사적으로 활용도가 매우 높았다. 임진왜란이 있기 전 새재에 성을 쌓아 방비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하지만 그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은 높고 험준한 문경새재를 힘겹게 넘어야 했다. 하지만 조선 관군의 저항은 없었다. 영남대로에서 별다른 전투 없이 비교적 수월하게 통과한 왜군은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있던 신립 장군을 만나 격전을 치른다. 전투에서 승리를 거머쥔 왜군은 한양까지 거침없이 진격해 올라갔다. 이후 충주에서 봉기한 의병장 신충원이 문경새재 제2관문 지점을 차단하고 기습 공격하기도 했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이 있다. 하지만 소를 잃고서라도 외양간을 제대로 고친다면 훗날 똑같은 실수는 범하지 않을 터. 임진왜란에서 왜군에게 호되게 당한 조선은 제2관문인 조곡관(1594년, 선조 27년)을 가장 먼저 세운다. 뒤를 이어 1708년 숙종 34년에 제3관문인 조령관과 제1관문인 주흘관이 차례로 세워졌다.
산업화가 한창이던 1970년대, 영남과 충주를 잇는 국도를 개발하면서 문경새재가 없어질 위기에 놓였다. 때마침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국도건설계획을 확인하기 위해 문경새재를 찾았는데 ‘새재 길은 훼손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이로써 문경새재는 한해에 100만 명 이상이 다녀가는 자연 친화적인 걷기 좋은 길로 남을 수 있었다.

문경새재의 인기를 반영하듯 큼직하게 지어진 옛길박물관

옛길박물관의 실내전시관

문경새재 제1관문으로 향하는 길목, 봄날의 푸름이 가득하다
누구나 걷고 싶은 문경새재 과거길
험준한 문경새재 고갯길은 이제 누구나 찾고 싶고, 걷고 싶은 아름다운 옛길로 인기가 높다. 길 이름은 ‘문경새재 과거길’이다. 제1관문 주흘관을 출발해 제3관문 조령관을 보고 되돌아오는 6.3km 구간이다.
은행나무 가로수 길을 따라 걸어가면 잔디마당 한가운데 옛길박물관이 있다. 기와를 이은 한옥 풍의 건축물인데 규모가 상당하다. 1~2층 전시실에는 옛길을 테마로 각종 자료와 유물을 전시해 놓았다. 쉽게 볼 수 없는 옛길 관련 자료들이므로 시간을 충분히 내어 돌아봐도 좋은 곳이다.
박물관을 뒤로하고 곧은길을 따라 걷는다. ‘문경새재 과거길’이라 쓰인 표지석 앞에 이른다. 표지석은 길의 역사와 유명세를 고스란히 표현해 주듯 늠름하다. 그 뒤로 독수리가 날개를 펼친 듯한 모양의 성곽과 주흘관이 자리한다. 웅장한 규모에서 위용이 느껴진다. 크기가 일정한 화강암을 벽돌을 쌓듯 차곡차곡 쌓아 올린 모습에서 견고함이 엿보인다.
주흘관은 문경새재 3개의 관문 중 옛 모습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다. 관문 뒤편 현판에는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이라 적혀 있다. 2·3관문과 다른 점이라면 개울물을 흘려보내는 수구문(水口門)과 적의 침입을 방어할 목적으로 성 주위에 물로 둘러싼 해자(垓字)가 있다는 것이다.
성안에 발을 들이자 아늑한 느낌이 감돈다. 안전이 확보됐다는 확신일 것이다. 또한 단단하게 다져진 황톳길에서 느껴지는 자연의 숨결 덕분이다. 길을 걸으며 흙의 질감을 느끼고 싶은 사람들은 신발까지 벗어들고 맨발로 걷는다. 발 씻는 곳이 마련돼 있으니 가능한 일이다. 길은 대여섯 명이 나란히 걸어도 될 만큼 널찍하고 완만하다. 몸도 마음도 편안하게 느릿느릿 걷기에 좋다. 대신 아기자기한 옛길의 정취를 느낄 수 없어 못내 아쉽다.

KBS촬영장은 조선시대가 배경인 사극촬영에 주로 사용된다


조선 후기에 세워진 국내 유일의
순수한글 비석
볼거리 풍성, 걷는 재미 쏠쏠
문경새재 과거길 한편에는 KBS 사극 촬영장이 있다. 드라마 <태조 왕건>을 촬영하기 위해 지었다가 새로운 드라마를 촬영할 때마다 거듭 시설을 보완해오면서 <대왕 세종>, <천추태후> 등 수많은 사극 드라마를 탄생시켰다. 광화문, 근정전, 사대부 가옥 등 조선시대 건물이 주류를 이룬다.
사극 촬영장을 나서서 2관문으로 향한다. 시나브로 다가오는 계절의 변화는 숲길에서 더욱 잘 느껴진다. 이전까지 곧았던 길은 똬리를 틀 듯 구불구불 이어지고 길섶에는 소나무, 굴참나무, 전나무, 층층나무 등 다양한 종류의 나무들이 푸르디푸르다. 이어서 나지막한 경사길이 계속된다. 경사진 길 아래에는 계곡물이 흐른다. 길이 굽으면 계곡도 굽고 길이 곧으면 계곡도 곧은 물길을 내어준다. 산새가 숲길에서 노래하면 물길에서는 시냇물 소리가 새소리에 맞춰 리듬을 더한다.
신록에 흠뻑 취해 발걸음을 옮겨 도착한 곳은 조령원 터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출장 중인 관리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곳이다. 문경새재에는 조령원을 포함해 동화원, 신혜원까지 3곳의 원이 설치·운영되었다고 한다. 지난 1977년 문경시가 조령원 터를 두 차례에 걸쳐 발굴조사 한 결과 와편, 토기편, 어망추, 철채 화살촉, 마구류 등 원 터임을 입증할만한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다. 과거 문경새재를 오가던 나그네에게는 절대 없어서는 안 될 곳이었지만 오늘날의 모습은 휑하니 터만 남아 쓸쓸하기 그지없다.
조령원 터 가까운 곳에 옛길로 접어드는 길이 있다. 숲속으로 이어진 길은 지금까지와 다른 옛길의 정취가 오롯이 남아 있다. 길 맛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은 일부러 옛길만 좇는다고 한다. 투박하고 거친 옛길을 원한다면 잠시 옆길로 새는 것도 좋겠다.
타박타박 길을 걷노라니 어느덧 교귀정에 닿는다. 산속 숲길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규모가 큰 정자다. 교귀정은 조선시대 전임 관찰사가 후임 관찰사에게 관인과 병부를 인수인계하는 교인식이 열렸던 곳이다.
숲속에 ‘산불됴심’이라 적힌 비석이 눈에 띈다. 맞춤법이 틀린 게 아니라 한글 창제 이래 구한말까지 세워진 비석 중에서 유일하게 한글로만 새겨진 비석이다.
드디어 제2관문인 조곡관에 닿는다. 조곡관을 지나면 길은 더욱 숲과 가까워진다. 대신 사람의 발걸음은 하나둘씩 줄어든다. 탐방객 대부분이 조곡관까지 걷고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길 가장자리에 시비를 줄지어 세워놓았다. 여러 시인묵객들이 세상을 관조하며 읊었을 다양한 시들이 걷는 이의 발목을 부여잡고 인생무상을 노래한다.
제3관문인 조령관과 가까워질수록 길은 숲으로 빨려 들듯 이어진다. 어느덧 문경새재 과거길의 종착지에 다다른다. 제3관문 조령관이다. 이 문만 지나면 충북 괴산 땅이다. 자박자박 걷는 걸음걸음마다 새로운 사연들이 흩뿌려진다. 문경새재는 지금도 발길에 소리 없이 다져지고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