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독립운동가와 친일파를

함께 기리는 국립현충원

독립운동가와 친일파를 함께 기리는<BR />국립현충원
    


글 이계형 국민대학교 특임교수


독립운동가와 친일파를 함께 기리는

국립현충원


  

1945년 우리 민족은 광복을 맞았지만, 독립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미완으로 남은 사건, 해결되지 못한 문제, 기억해야만 하는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은 독립운동사를 과거에 머문 역사가 아닌 현재의 문제로 다루며, 오늘도 신문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독립운동 및 일제강점 이슈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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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 묘역(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



현충원과 독립운동가의 묘지

6월은 ‘호국보훈의 달’로, ‘나라를 지킨다’는 뜻의 ‘호국(護國)’과 그러한 ‘공훈에 보답한다’는 ‘보훈(報勳)’을 의미로 추념하는 달이다.  6월 6일 ‘현충일’, 6월 25일 ‘6·25전쟁’을 비롯하여 2002년 6월 ‘제2연평해전’까지 더하여 희생한 분들을 기리고자 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가장 뜻깊은 날은 법정공휴일로 지정된 현충일일 것이다. 이날은 조기가 게양되고 국립서울현충원이나 국립대전현충원에서 대통령과 3부 요인이 참석한 가운데 추념식이 거행되는데 오전 10시 사이렌 발령과 동시에 조포를 쏘기도 한다.

그런데 종종 국립현충원에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안장되었다며 이장을 촉구하는 시민단체의 성명이 발표되고 신문·방송에서 이 같은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왜 이런 문제가 불거졌을까? 이는 서울시 동작구 흑석동에 위치한 국립서울현충원이 본래 국군묘지였기때문이다. 1955년 5월, ‘육탄십용사현충비’가 세워지고 같은 해 7월 국군묘지가 조성되어, 이곳에 장군으로 예편한 일제강점기 일본군 혹은 만주국 간도특설대 출신자들이 적지 않게 묻혔다. 다음 해인 1956년 4월에는 6월 6일을 ‘현충기념일’로 제정하였다. 이런 이유로 그해 처음으로 치러진 현충일에는 순국선열이 포함되지 않았다. 육해공군 전몰장병합동추도식이 거행되었을 뿐이다. 이날에는 모든 가무음곡이 금지되었고 댄스홀과 카바레의 영업을 중지했다.

추념식에서 순국선열이 빠진 것은 국군묘지에 독립운동가들의 유해가 안장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정부 차원에서 별도로 독립운동가 묘역이나 순국선열을 기념하는 날을 지정한 것도 아니었다. 해방 이후 순국선열의 기념행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1945년 12월 23일 개최한 ‘순국선열추념대회’가 처음이었고, 다음 해부터는 임시정부가 기념해온 ‘11월 17일’에 맞춰 행사가 거행되었다. 하지만 이는 정부 차원이 아닌 민간단체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다. 1958년 7월, 국회에서 현충일과 별도로 국치일인 ‘8월 29일’을 ‘순국선열의 날’로 제정할 것을 정부에 건의하였지만 그뿐이었다.

1962년부터 순국선열들을 다 함께 모실 수 있는 국립묘지를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1965년 3월 국군묘지가 국립묘지로 승격하는 것에 그쳤다. 그렇다면 국립묘지가 조성되기 전까지 독립운동가들의 유해는 어디에 모셔졌을까? 해방 이후 독립유공자 포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으니 묘지가 조성되었을 리 만무했지만 말이다. 그 때문인지 국립묘지 외에 독립운동가들이 묻혀 있는 곳은 효창공원, 망우리묘지공원, 강북구 우이동 독립지사 묘역 등으로 흩어져 있다.

해방 직후 김구 주도하에 일본에서 봉환된 이봉창·윤봉길·백정기 등의 유해가 1946년 6월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그 뒤 1948년 8월 이곳에 임시정부 요인이었던 이동녕·조성환·차리석 등의 유해가 중국에서 봉환되어 모셔졌고 1949년 6월에는 김구도 이곳에 묻혔다. 서울과 구리에 걸쳐있는 망우리묘지공원은 1933년 ‘경성부립묘지’로 조성된 것인데 일제강점기에 돌아가신 독립운동가뿐만 아니라 근현대사의 유명 인사들의 묘소가 있다. 이곳에는 안창호와 그의 제자이자 비서였던 유상규, 흥사단 단원 문명훤과 한용운을 비롯한 오세창·문일평·방정환·오기만·서광조·서동일·오재영 등이 묻혔다. 이곳은 한동안 방치되다가 2012년 한용운 묘소가 등록문화재로 등록된 이후 모두 9위의 묘소가 국가에 의해 보존·관리되고 있다. 안창호 묘소는 1970년 11월 도산공원으로 옮겨졌다. 북한산 자락에 있는 우이동 독립운동가 묘역에는 1907년 7월, 헤이그 밀사로 갔다가 순국한 이준 열사를 비롯해 손병희·이시영·신익희·김창숙·여운형 등과 광복군 합동 묘소 등 모두 16위가 모셔져 있다. 이준 등 6명의 묘소는 2012년에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같은 곳에 안장된 독립운동가와 친일파

국군묘지에 독립운동가들이 함께 안장된 것은 1962년부터 박정희 정권이 독립유공자 포상을 재개하고 ‘국가수호자특별원호법안’을 공포한 이후이다. 비록 1970년에 중단되었지만 이때 ‘순국선열의 날’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법안에 따라 1963년 3월, 독립장을 수여 받은 김재근이 다음 해에 유명을 달리하며 최초로 국군묘지에 안장되었다. 그 뒤 이곳에 독립운동가들의 유해가 묻혔다. 친일파들이 묻힌 곳에 독립운동가들이 안장된 셈이다. 당시에는 친일문제가 사회적인 이슈로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이의를 제기하는 일은 없었다. 어찌 됐든 그 뒤 국군묘지가 국립공원으로 승격되면서 1965년 6월, 제10회 현충일에는 전몰장병과 더불어 순국선열들의 추모식도 함께 치러졌다.

국립묘지에는 공동묘지, 혹은 선산에 묻혔던 독립운동가의 유해가 애국지사 묘역에 이장되거나 작고한 분들이 안장되었다. 북간도에서 15만 원 탈취 사건을 주도한 철혈광복단의 윤준희·임국정·한상호 등의 유해가 1966년 11월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그들이 1921년8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여 관할 공동묘지에 묻힌지 40여 년 만의 일이었다. 강우규의 유해도 이곳에서1954년 수유리로 이장된 이후 1967년에 국립묘지로 모셔졌다. 6·25전쟁 당시 총살된 신석구는 1968년 9월 유해 대신 유품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1933년 하얼빈에 묻혔던 남자현의 경우처럼 묘소를 찾지 못해 허묘만 모셔진 경우도 있다. 2019년 5월 현재 이곳에는 독립유공자 218위가 안장되어 있다. 또한 1993년 8월에는 박은식·신규식·노백린·김인전·안태국 등의 유해가 상하이의 만국공묘에서 봉환되면서 서울현충원에 임시정부 묘역이 별도로 조성되어 현재까지 19위가 모셔져 있다.

그런데 19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화의 진전과 함께 친일청산 문제가 다시 대두되면서 현충원에 안장된 친일반민족행위자의 묘소 이장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하였다. 1993년에 작고한 임시정부의 마지막 비서장 조경한은 “내가 죽거든 친일파들이 묻혀 있는 국립묘지가 아니라 동지들이 묻혀 있는 효창공원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였다. 하지만 그의 유해는 유언과 달리 국립서울현충원의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가 임시정부 묘역으로 옮겨졌다. 이후 독립운동가들 가운데 친일경력이 드러난 경우, 서훈이 취소되고 현충원에서 쫓겨나기도 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국립서울현충원에 7명, 국립대전현충원에 4명의 친일파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이들은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포함된 사람들로, 대개 현충원 장군묘역에 묻혀있다. 특히 서울현충원의 경우, 친일파가 묻힌 ‘장군 제2 묘역’ 아래에 ‘애국지사 묘역’이 조성되어 있어서 숭고한 분들의 공간에 누가 되고 있다.

국립현충원에 조성된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묘를 강제로 이장할 수 있는 방법은 현재로서는 없다. 이들이 6·25전쟁 등에 기여했기 때문에 안장 자격이 취소되지 않는 한 강제로 이장할 수 없는 현행법 때문이다. 2016년 이들을 국립묘지에서 퇴출하기 위한 법안이 발의되었지만 수년째 논의만 되고 있다. 하루빨리 국립묘지 공간의 영예성을 회복해야 한다. 이것은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을 추모하고 그분들께 감사하는 ‘호국보훈’의 의미를 되새기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모든 현충 시설에 새겨져 있는 “여기는 민족의 얼이 서린 곳, 조국과 함께 영원히 가는 이들,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리라”는 글귀가 더욱 빛을 발하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