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만든 사람
한형석이 부르는
독립의 노래

글 임영대 역사작가
한형석이 부르는
독립의 노래
한형석은 1910년에 부산에서 독립운동가 한흥교의 4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15년에 상하이에서 처음 아버지를 대면하고, 1948년까지 귀국하지 않고 중국에 머무르면서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학교 교사, 중국 정부군공작대장, 광복군 제2지대선전부장 등으로 복무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귀국하여 방송, 연극, 학계 등에서 두루 활동하였다. 1977년에 건국 포장,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부산 서구에 있는 먼구름 한형석길(부산광역시 서구청 제공)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 싸우러 나가세
음악은 단순히 귀를 즐겁게 하고 삶을 풍요롭게 하는 수단이 아니다. 연극 역시 그저 보고 즐기기 위한 도락만이 아니다. 때때로 음악은 그 선율과 가사를 통해 부르는 이의 사기를 높이는 도구가 되고, 연극은 관객을 계몽하고 단결시킨다. 한형석은 상하이 신화예술대학에서 음악을 처음 배웠다. 그리고 1939년 10월에 충칭에서 한국청년전지공작대 예술부장에 취임하면서 군가를 작곡, 본격적으로 음악을 이용한 독립운동에 나서기 시작한다. 이 시기 「한국행진곡(韓國行進曲)」, 「항전가곡(抗戰歌曲)」을 작곡했으며 「국경의 밤」과 한국 최초의 오페라 「아리랑」 등 항일의식을 담은 가극도 상연하였다. 1940년에는 중국군 간부교육 교관으로 일했다. 1941년 1월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모두 광복군 제5지대로 편입되었는데, 『광복군가집』 1, 2집의 발간과 「국기가(國旗歌)」, 「광복군 제2지대가」, 「압록강행진곡」, 「조국행진곡」 등 항일가곡 100여 곡의 작곡이 모두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신 대한국 독립군의 백 만 용사야.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 삼천리 삼천만의 우리 동포들. 건질 이 너와 나로다.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 싸우러 나가세.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 싸우러 나가세."
1944년 광복군 제2지대 선전대장으로 복무하면서도 작곡과 가극 상연을 멈추지 않았다. 한형석이 만든 노래와 가극은 항일전선에 나선 용사들의 항일의식을 고취하고, 광복군은 물론 중국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끝나지 않는 민족의 선율
한형석을 비롯한 독립운동가의 노력 덕분에 마침내 해방이 왔다. 그러나 한형석은 곧바로 귀국하지 않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동포들을 돕기 위해 교포 귀국 사무를 맡아 일했다. 3년 뒤인 1948년 9월이 되어서야 고국 땅을 밟을수 있었다. 33년 만의 귀국이었다. 돌아와서도 한형석은 손에서 음악을 놓지 않았다. 귀국하자마자 1년간 서울중앙방송국의 촉탁 방송위원을 지냈고, 부산에서 문화극장과 자유아동극장 대표를 역임했다. 부산대학교 문리대학 교수로 20년을 재임하고, 다시 강사로 14년을 더 학생들을 가르쳤다. 특히 한국전쟁 종전 후 문을 연 자유아동극장에서는 2년여 동안 500회나 되는 공연을 선보이며 12만여 명의 아동에게 무료관람을 제공했다. 밤에는 색동야학원이라는 야학을 열어 생계를 위해 일하는 아이 80~90명에게 공부를 가르쳐주기도 했다. 극장과 야학당에 들어가는 비용은 모두 자비였다.
"처참한 전화로서 점증하는 최대의 사회문제로 국가민족의 장래에 암영을 던지는 걸식아동, 부랑아동, 고아원 아동과 일반 실학아동의 교도를 위하여 본 극장은 극장교실로 무료공개하여 세인이 다음 세대 주인공의 정신적 주식물을 제공할 것이며 암담한 거리에서 방랑하는 천사에게 활기 있는 광명의 앞길을 선도하여 이 민족의 병든 새싹에게 비타민이 되기를 바란다. 백원의 야서보다 더 신속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교육영화를 비롯해 환등·음악·아동극·무용·인형극 등으로 아동의 지식계몽과 정서교육에 이 아동극장은 그 발휘할 기능의 범위는 광대하다. 이러한 일은 원칙적으로 국가가 설립 운영할 것이나 막연히 그날을 기다릴 수 없어 미력이나마 합하고 기울여서 우선 뜻을 같이하는 몇몇 동지의 협력 결속으로 이 시급하고도 다잡한 사업에 첫 길을 들어가려고 한다."
민족을 위해 바친 공헌에 보답이 없을 리는 없다. 한형석은 1970년 5월에 제13회 눌원문화상을 받았다. 1977년 12월에는 건국포장,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그리고 1996년 6월 14일에 부산 자택에서 향년 87세로 눈을 감았다. 그러나 한형석을 기리는 움직임은 사후에도 계속되었다. 2002년 가곡집 『잊을 수 없는 선율』이 발행된데 이어, 2004년 6월14일 옛 지인과 유족을 중심으로 ‘먼구름 한형석 선생 추모사업회’가 만들어졌다. 광복 60주년이었던 2005년 8월 16일에는 한형석이 한때 단장을 맡았던 한울림합창단이 기념 음악회 ‘대륙에 묻힌 이름: 항일 독립운동 음악가 한형석’을 부산문화회관 중강당에서 열었다. 그 이듬해에는 부산 근대역사관에서 한형석을 주제로 특별 기획전이 개최되었다. 부산시는 자유아동극장 터를 지나는 도로를 ‘먼구름 한형석 길’로 명명하여 한형석을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