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독립운동가의 초상
총과 펜을 함께 들었으나
요절하고 만 문화예술인

글 김정인 춘천교육대학교 교수
총과 펜을 함께 들었으나
요절하고 만 문화예술인
문화와 예술은 문화이고 예술일 뿐이다? 그렇지 않았다. 문화와 예술 역시 시대를 비껴갈 수 없었다. 일제시기에는 문화와 예술을 무기로 항일의 정신을 고취한 문학가와 예술가들이 있었다. 그들의 시와 노래, 소설과 영화에는 독립의 의지와 희망이 녹아 있었다. 그리고 독립 정신을 고취하는 데 그치지 않고 몸소 독립운동에 뛰어든 문학가와 예술가도 있었다. 그들 중 결국 독립의 ‘그날’을 보지 못하고 요절한 세 사람을 떠올려 본다.

심훈 사진 (당진시청 제공)

『조선일보』에 연재하다가 일제의 검열로 중단당한 소설 「동방의 애인」 (당진시청 제공)

시 「그날이 오면」 일제 검열 원고
(당진시청 제공)
심훈, 그날이 오면
심훈은 190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0세가 되던 해에 나라를 잃었다. 30대에 접어들면서는 독립을 염원하는 절절한 심정으로 「그날이 오면」이라는 시를 지었다. 하지만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을 바랐던 독립을 보지 못하고 36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심훈의 삶에서 3·1운동의 경험은 각별했다. 1919년 3월 1일 경성고등보통학교를 다니던 심훈은 탑골공원에 열린 독립선언식에 참여했다. 3월 5일에는 강기덕, 김원벽, 한위건 등 전문학교 학생들이 주도한 남대문역 만세시위에 참여했다. 이 날 체포된 심훈은 그해 11월 6일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은 후 석방되었다.
심훈은 출옥한 후 망명을 선택했다. 만주를 거쳐 베이징으로 건너가 신채호와 이회영을 만났다. 당시 두 사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 독립 노선을 비판하며 무장투쟁을 통한 절대독립론을 주장하고 있었다. 베이징에 머무르던 심훈은 이후 상하이, 난징을 거쳐 항저우에서 저장대학을 다녔다.
1923년 귀국한 심훈은 사회인으로서 언론인과 예술가의 길을 동시에 걸었다. 동아일보에 기자로 입사했고 연극단체인 극문회를 조직해 활동했다. 또한 기자 조직인 철필구락부에 참여해 언론자유운동을 벌였다. 결국 조선총독부가 철필구락부 탄압에 나서면서 동아일보를 퇴사해야 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영화를 공부하고 귀국해 「먼동이 틀 때」라는 영화를 제작해 성공을 거두었다.
시를 짓고 연극과 영화 활동을 벌이던 심훈은 조선일보에서 다시 기자로 일하면서 「동방의 애인」, 「불사조」라는 소설을 연재했으나 검열에 걸려 중단되고 말았다. 조선일보를 사직한 후에는 경성방송국에서 잠시 근무했다가 부모가 살고 있던 충청남도 당진에서 집필에 몰두했다. 다시 서울로 올라와 잠시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으로 활동했으나 곧 그만두고 「영원한 미소」, 「직녀성」, 「상록수」 등의 소설을 써서 신문에 연재했다.
1936년 심훈은 대중적 인기를 끌었던 연재소설 「상록수」를 영화로 만드는 일에 착수했다. 하지만 제작에 이르지는 못했다. 「상록수」를 단행본으로 출판하는 일에도 나섰으나 장티푸스에 걸리고 말았다. 1936년 9월 16일 오전 8시, 심훈은 병을 이기지 못하고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36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심훈이 갈망하던 ‘그날’이 왔다. 조선총독부의 검열로 빛을 보지 못했던 심훈의 시집 『그날이 오면』도 세상에 나왔다.

나운규 사진

영화 「아리랑」의 한 장면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이 상영되었던 단성사
나운규, 아리랑 고개를 넘지 못하다
나운규는 1902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다. 25살이 되던 1926년 10월 1일, 그가 주연으로 출연하며 직접 제작한 영화 「아리랑」이 단성사에서 개봉했다. 「아리랑」은 농촌 청년 영진과 지주의 심부름꾼인 오기호의 갈등을 그렸다. 사람들은 영화를 보며 영진을 자신과 같은 한국 민중으로, 오기호를 지배자인 일본으로 읽었다. 영진이 오기호를 낫으로 쓰러뜨리고 일본 순사에게 끌려갈 때 마을 사람들이 아리랑을 부르며 배웅하는 장면에서 관객들도 모두 일어나 아리랑을 불렀다. 한국인들은 현실에서 함부로 내뱉을 수 없는 자신의 처지나 생각을 「아리랑」에서 읽어내며 열광했다. 6개월 동안 110만명이 「아리랑」을 봤다. 이 때가 나운규 삶의 절정기였다. 이후 10년간 찬사와 비난을 받으며 영화 출연과 제작에 몰두했던 그는 1937년 폐결핵을 이기지 못하고 심훈처럼 36세의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나운규 역시 17살의 나이로 3·1운동을 경험했다. 당시 그는 회령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간도에 자리한 명동중학에 다니고 있었다. 회령의 만세시위에 참여하고 경찰의 수배를 피해 연해주로 망명했다. 다시 북간도로 와서는 국민회 소속 독립군에 가입했다. 이 때 회령과 청진을 잇는 철도인 회청선 7호 터널의 폭파를 시도했다가 미수에 그쳤다. 1년여 간 독립군 생활을 한 끝에 20대 초반의 청년 나운규는 총을 내려놓고 공부를 더 하겠다는 일념으로 서울로 향했다. 하지만 ‘청회선 7호 터널 폭파 미수사건’으로 체포되어 보안법 위반으로 2년 형을 선고받고 청진형무소에서 복역했다.
1923년 3월 출소한 나운규는 총을 들지도 공부를 하지도 않고 제3의 길을 걸었다. 함흥에서 조직된 극단인 예림회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했다. 다시 부산에 내려가서는 조선키네마주식회사 소속 단역 배우로 활동했다. 이때 연기력을 인정받아 영화 「심청전」에서 처음으로 주연인 심봉사역을 맡았다. 연기파 배우로서 입지를 다진 나운규는 직접 영화 제작에 나섰다. 그가 제작한 첫 번째 영화가 바로 「아리랑」이다. 「아리랑」에 이어 「풍운아」가 대성공을 거두며 승승장구하던 그는 1927년 나운규프로덕션을 창립했다. 나운규프로덕션은 독립군 활약 시절의 경험을 그린 「사랑을 찾아서」를 비롯해 제작한 영화마다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동료들과 갈등을 빚으며 나운규프로덕션은 해체되고 말았다. 이후에는 프롤레타리아 연극을 제작하기도 하고 일본의 국수주의자 도야마 미츠루가 제작한 영화에 출연하는 등 갈팡질팡하는 행보를 보여 많은 사람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나운규는 영화 「임자없는 나룻배」에 출연, 성공을 거두면서 재기에 성공하는 듯했으나 폐결핵으로 병마에 시달리는 몸이 되었다. 주사를 맞아 가며 제작해 1937년 1월 20일 단성사에서 개봉한 영화 「오몽녀」도 흥행에 성공했다. 하지만 폐결핵을 이기지 못하고 그해 8월 9일 36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오몽녀」는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고 말았다.

이육사 사진(이육사문학관 제공)

서대문형무소 수감 당시 신원카드(1934.06.20.) (이육사문학관 제공)

육사시집 초판본(1946, 서울출판사)
(이육사문학관 제공)
이육사,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육사는 1904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났다. 20대부터 의열단원으로 활약한 이래 죽음에 이를 때까지 10번이 넘게 체포를 당했다. 그리고 40세의 나이에 일본 경찰에 의해 중국 베이징으로 끌려가 급사하고 말았다.
1925년 20대의 청년 이육사는 형 이원기, 동생 이원유와 함께 의열단에 가담했다. 1919년 가을 중국 지린에서 결성된 의열단은 당시 베이징으로 이동해 활동하고 있었다. 이육사는 베이징을 왕래하며 국내정세를 보고하고 군자금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다. 1927년 10월 18일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이 일어나자 이육사는 형제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경찰이 세 형제를 주모자로 조작하려 혹독하게 고문했다. 1929년 2월, 폭파사건의 주모자인 장진홍이 1년 4개월만에 체포되었다. 이후 이육사와 형제들도 풀려났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병을 얻고 말았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이육사는 중국으로 건너가 김원봉의 의열단에 다시 합류했다. 1932년 10월 의열단은 난징에 전위혁명가 양성을 위한 군관학교인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치했다. 이육사도 이 학교에 입교해 6개월 동안 교육을 받은 후 이듬해에 귀국해 비밀지령을 수행했다. 1934년 5월 서울에서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
이육사는 1930년에 시 「말」을 발표하면서 문인으로 등단했다. 그의 문필 활동의 절정기는 1930년대 중반이었다. 이 때 건강이 악화되자 문필 활동에 전념했다. 신문과 잡지에 정치논설은 물론 시와 산문, 그리고 문학평론 등을 활발히 발표했다.
아시아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이육사는 아픈 몸을 이끌고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도모했다. 어머니가 사망한 이듬해인 1943년 일시 귀국했다가 서울에서 다시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1944년 1월 16일 새벽 5시 베이징에서 40세의 나이로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라고 노래했듯이 이육사는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아픈 몸을 이끌고 독립의 밀알이 되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