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오늘 세계의 그날
경술국치와 민국의 탄생

글 강응천 기획집단 문사철 대표, 역사저술가
경술국치와 민국의 탄생
1912년 4월 15일 새벽 2시 20분경, 그때까지 볼 수 없었던 최악의 선박사고가 일어났다. 하느님도 침몰시킬 수 없는 배라고 선전하던 세계 최대의 초호화 유람선인 타이타닉호가 뉴욕으로 가는 도중 북대서양 뉴펀들랜드 근해에서 빙산과 충돌해 차가운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미국에서 새 인생을 열어갈 꿈에 벅찼던 사람들이 배와 운명을 함께했다. 승무원을 포함해 배에 타고 있던 약 2,340명 가운데 생존자는 겨우745명. 이 비극은 1년 반 전 침몰한 동아시아의 유서 깊은 왕조를 떠올리게 한다. 왕조의 이름은 대한제국이었다.

타이타닉호의 모습
서쪽엔 대영제국, 동쪽엔 대일본제국
대한제국이 멸망한 것은 1910년 8월 29일이었다. 이로써 한반도는 아시아의 ‘떠오르는 태양’ 대일본제국의 특별행정구역으로 편입되었다. 동방에 대일본제국이 있었다면 서방에는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이 있었다. 그해 5월 31일 대영제국은 남아프리카에 보유하고있던 트란스발, 오렌지자유국 등 4개의 식민지를 하나로 합쳐 영연방 내의 남아프리카연방으로 재조직했다. 영국은 일찍이 이곳에서 네덜란드계 청교도 이주민인 보어인과 분쟁을 겪다가 1899년부터 시작된 보어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남아프리카의 주인이 되었다.
일본은 1890년 2월 대일본제국 헌법을 공포했다. ‘제국’은 단어 뜻대로만 풀면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이지만, 현실에서는 영국·미국·프랑스 등 열강처럼 국외에 식민지를 거느리는 대국을 의미한다. 대일본제국이 획득한 첫 번째 식민지는 1895년 청일전쟁 후 시모노세키조약에 따라 청으로부터 떼어낸 타이완. 일본은 이곳에 총독부를 설치하고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삼기 위한 예행연습을 충실히 진행해왔다. 일본제국의 두 번째 식민지는 1905년 러일전쟁 후 포츠머스조약에 따라 러시아로부터 떼어낸 사할린섬의 북위 50도 이남 지역이었다. 이곳에는 타이완과 달리 1907년 3월 가라후토청이라는 행정조직을 설치해 통치했다. 가라후토는 사할린섬을 가리키는 일본 말이다. 그리고 1910년에 편입된 새로운 식민지는 타이완이나 사할린섬과는 차원이 다른 곳이었다. 수천 년의 역사를 이어오던 문명국가가 통째로 식민지가 된 것이었으니까.

조선의 초대 총독을 지낸 데라우치 마사타케

일제가 조선에 세운 식민 통치기구인 조선총독부
통째로 식민지가 된 문명국가
오랜 문명을 자랑하던 나라를 통째로 삼킨 일본은 특별한 식민 정책을 마련했다. 그것은 오랜 기간에 걸쳐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한 영국의 다소 방만하고 느슨한 방식이 아니라 짧은 시간에 일사불란하게 몰아치는 속도전이었다.
대한제국의 공식 명칭은 ‘대한국’이었다. 국권 피탈과 더불어 그 이름은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일본은 자국 영토로 편입된 한반도의 지역 명칭을 ‘조선’이라 부르기로 했다. 국권 피탈에 협력한 친일파들은 조선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에게 ‘한국’이라는 칭호만은 유지하게 해 달라고 간청했지만, 나라가 사라진 마당에 ‘국(國)’은 가당치 않다며 거절당했다. 일본의 『중외상업신보』는 1면 중앙에 대문짝만하게 한반도의 지도를 싣고 1,248만 4,621명의 인구를 지닌 새 영토의 획득을 축하했다. 일제는 을사늑약에 따라 설치했던 통감부를 폐지하고, 그보다 훨씬 더 강력한 기구인 조선총독부를 식민지 통치 기구로 설치했다. 초대 조선 총독에는 국권탈취의 행동대장인 데라우치 통감이 임명되어 1910년 10월 1일부터 조선총독부를 가동했다. 데라우치는 한국을 병합하던 날 밤, “가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가 살아있다면 오늘 밤 이 달을 어떻게 보았을까?”라는 시를 한 수 지었다고 한다.
한반도의 최고 통수권자인 조선 총독은 일본의육·해군 대장 가운데서 선임되고 일본 천황에 직속되었다. 그는 한반도에 주둔하는 일본 육·해군을 통솔해 한반도의 방위를 맡고, 한국의 모든 정무를 총괄하는 권한과 책임을 보유했다. 또한 천황의 특별한 위임에 따라 총독부령을 공포할 수 있고, 벌칙도 내릴 수 있으며, 법률에 준하는 명령을 내릴 수도 있었다. 한마디로 특별한 식민지의 최고 통치자로서 폭넓고 강력한 권한을 한 손에 쥐었던 것이다.
총독의 자문기관인 중추원에는 의장 밑에 부의장·고문·서기관 등을 두었다. 한국인도 의장만 아니면 3년 임기로 중추원에 들어갈 수 있으나, 그것은 친일 인사를 우대하는 명예직에 지나지 않았다. 한국인은 또한 특별임용령에 따라 조선총독부 소속 관청의 문관에 임명될 수도 있었으나, 그 수가 매우 적고 일본인 관리에 비해 차별 대우를 받았다. 한반도 전역에는 일본군 2개 보병 사단, 헌병 및 경찰 약 4만 명, 헌병보조원 2만여 명이 배치되어 데라우치 총독의 강압 통치를 뒷받침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이로써 대한국은 타이타닉호가 대서양 밑으로 가라앉은 것처럼 역사의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타이타닉호는 다시 떠오르지 못했지만 대한국은 언젠가는 다시 솟구쳐 오를 저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다시 역사의 전면으로 부상할 때 그것은 더 이상 ‘제국’이 아닐 것이었다. 대한국은 같은 영토, 같은 국민을 아우르지만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민국’으로 역사의 무대에 재등장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400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잉카제국의 유적, 마추픽추
다시 모습 드러낸 마추픽추
대한제국이 사라진 직후인 1911년, 지구 반대편에서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던 잉카제국의 유적이 나타났다. 약 400년 동안 사람 눈에 띄지 않던 잉카제국의 유적 마추픽추가 미국의 역사학자 하이럼 빙엄에 의해 재발견된 것이다. 페루 남부 쿠스코시 북서쪽 우루밤바 계곡에 있는 마추픽추는 나이 든 봉우리라는 뜻으로, 산자락에서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어 ‘공중 도시’라고도 불린다. 잉카인은 16세기 후반 그 깊숙한 오지로 들어가 200t이 넘는 거석과 인티와타나라고 불리는 태양의 신전 등으로 이루어진 고도의 문명을 건설했다. 그들이 잉카제국을 등지고 마추픽추로 들어간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에스파냐 침략자들에게 잉카제국이 유린당할 때 피신한 것이 아닐까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확인할 길은 없다.
대한제국이 ‘제국’으로는 부활할 수 없는 것처럼 잉카제국과 아즈텍제국 역시 부활할 수 없었다. 아시아보다 훨씬 더 일찍 유럽인의 침략에 유린당한 라틴아메리카에서는 19세기 들어 새로운 독립 국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옛 아즈텍제국의 땅에서 1821년 독립한 멕시코도 그중 하나였다. 그러나 오랜 식민 지배가 심어 놓은 극심한 빈부 격차와 독재는 멕시코 사람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마추픽추가 발견될 무렵 멕시코에서는 이 같은 식민 유산을 청산하고 진정한 공화국을 건설하기 위한 혁명이 일어났다. 혁명의 두 지도자 판초 비야와 에밀리아노 사파타는 30년간 군림해온 독재자 디아즈를 몰아내고 마데로를 새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비야는 북부에서 정부군 요새를 습격하고, 사파타는 남부에서 지방의 카시크(농촌의 정계 거물)들에 맞서면서 혁명의 불길은 순식간에 타올랐다.
멕시코혁명은 대한제국이 식민지 조선으로 전락하던 시기에 지구 반대편을 뒤흔든 역사적 대사건이었다. 그것은 분명 한국인이 식민 지배를 극복하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겪어야 할 일들의 일단을 미리 보여주고 있었다.

중국의 신해혁명을 이끈 쑨원
중화민국과 대한민국
멕시코혁명이 절정으로 치닫던 1911년 10월, 식민지 조선의 바로 이웃에서도 경천동지할 사건이 터졌다. 중국에서 ‘멸만흥한(滅滿興漢, 만주족을 멸하고 한족을 부흥시키자)’의 기치를 든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쑨원이 이끄는 혁명세력은 우창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킨 뒤 전국적으로 세력을 넓혀 갔다. 만주족이 통치하는 청 왕조는 1842년 아편전쟁에서 패한 뒤 무기력하게 서양 세력에 휘둘려왔다. 이에 중국 민중 사이에서는 이민족인 청 왕조를 몰아내고 한족의 새 나라를 세우자는 운동이 점차 세를 얻어왔던 것이다. 1911년이 신해년이었으므로 이 혁명을 ‘신해혁명’이라 한다.
1912년 1월 1일, 난징에 모인 혁명군은 공화제 국가인 중화민국 수립을 선포하고 쑨원을 임시 대총통에 임명했다. 쑨원은 취임사에서 “청 왕조를 끝장내고 민족, 영토, 군정, 내치, 재정의 통일을 이루어내겠다”고 새 나라의 청사진을 밝혔다. 수천 년 동안 중국 대륙을 지배해 온 청 왕조는 곧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쑨원은 일찍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서양 의학을 배워 신지식을 습득한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그는 봉건 왕조인 청나라가 남아 있는 한 중국의 미래는 없다고 보고 혁명운동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국내 활동이 어려워지자 일본으로 망명한 뒤 중국동맹회를 결성해 혁명운동을 지도해왔다. 새 나라의 이름을 ‘중화민국’이라고 지은 것도 쑨원이었다. 여기서 ‘민국’은 유럽의 시민혁명세력이 왕국을 폐지하고 세운 공화국(Republic)과 비슷한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쑨원이 ‘공화국’이라는 말 대신 ‘민국’을 사용한 데는 18, 19세기에 성립한 유럽의 공화국들보다 더 ‘민(民)’의 주권을 강조하려는 뜻이 담겨 있었다.
1919년 중국 상하이에서 출범한 한국인의 임시정부가 ‘대한민국’이란 국호를 택한 뜻도 다르지 않았다. ‘민국’에는 민을 주권자로 하는 공화국, 즉 민주공화국의 정신이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